ADVERTISEMENT
오피니언 김민정의 생활의 발견

엄마에게 미쳐야 엄마에게 미친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김민정 시인

김민정 시인

학창 시절 도 대표 단거리 선수로도 뛴 바 있는 엄마는 내 주변 여성들 가운데 가장 ‘몸’을 잘 쓰는 사람이었다. 내가 이 사람의 유일한 딸인가보다 느끼기가 무섭게 4년 터울로 여동생 셋을 내리 낳아 가족사진을 꽉 채운 엄마. 누구 핏줄이건 따질 것 없이 도합 열 명이 넘는 동생들을 맏딸이자 맏며느리로 손수 결혼시킨 엄마. 앨범 속 1988년 막내 고모 결혼식 전날 풍경에 고무장갑 낀 앳된 얼굴의 엄마가 밟힌다. 김장철에나 쓰는 빨간색 원형 대야 가득 당면을 버무려 잡채 만들던 사진 속 엄마. 이뿐이랴, 몇백 명 먹을 국도 가오리 회무침도 모둠전도 겉절이도 다 만들어 식장으로 나르던 시절이니 엄마들이여, 어떻게 그 시절을 견뎌왔냐 물으면 너 때는 편해질까, 하는 답에서 시큰해지는 코끝이다.

[일러스트=김회룡]

[일러스트=김회룡]

그러니까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엄마에게 원더우먼이라는 별명은 애초에 짓지를 말았어야 했다. 원더우먼처럼 이마에 금띠 두른 것도 아니면서 가족 모두가 원더우먼이라 부르니까 이거야 원, 원더우먼 짝퉁이라도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새벽 1시가 넘도록 손빨래해대더니 새벽 5시에 일어나 도시락 열두 개씩 싸고, 새벽 1시가 넘도록 제사상 치워대더니 새벽 5시에 일어나 어시장 가서는 생합 사와 아빠 해장국 팔팔 끓이던 엄마. 이제는 4년 넘게 반신불수로 누워 지내는 아빠를 막내아들 삼고 몸 대신 ‘지팡이’ 짚기의 달인이 된 엄마라지.

어릴 적 동네 개천에 키우던 개가 빠졌을 때, 그 개를 따라 막냇동생이 빠졌을 때,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겼음을 알고 다다다 뛰어드는 슬리퍼 발소리가 있었다. 냅다 개천으로 뛰어든 원더우먼의 한 손에는 개가, 또 한 손에는 막냇동생이 트로피처럼 들려 있었을 적에 나도 모르게 와 미쳤다, 하고 읊조렸던 기억 덕분에 미쳐야 미친다는 말을 그때로부터 40년이나 지난 지금에야 온전히 이해하는 나다. 그리하여 올해의 내 사자성어는 불광불급(不狂不及) 되시겠다.

김민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