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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장호의 사자성어와 만인보] 건곤일척(乾坤一擲)과 한유(韓愈)

중앙일보

입력

한유. 바이두백과

한유. 바이두백과

 “독일 사람들 합리적이야.” 독일에 10년 이상 머물다가 귀국한 지인의 답변이었다. 어느 가을 오후로 약속을 하고 테헤란로에서 반갑게 그를 만났다. 카페에 자리를 잡고 몇 분 후에 필자가 그에게 불쑥 건넨 질문이 하나 있었다. “네가 직접 경험한 독일 사람들을 딱 한 마디로 요약해 줄 수 있겠니?”

‘합리적이다’라는 이 말도 때론 정반대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다행히 그의 온화한 표정과 함께 전달받은 이 말의 뉘앙스는 긍정적인 쪽이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에 이어 1990년 독일 통일까지 일사천리로 가능케 했던 마법의 키워드 하나를 엿들은 기분이었다. 이 들뜬 기분 덕분에 그와 주고받은 독일 이야기에 더 몰입할 수 있었다.

그래, 통일을 주도한 것은 드러난 소수 정치인의 ‘건곤일척(乾坤一擲)’이 아니었다. 동서독 국민의 몸에 밴 합리적 기질이었다. 이 저력이 마침 유리하게 전개되던 천시(天時)와 결합해 지극히 당연한 열매인 통일을 거의 빛의 속도로 이뤘구나, 이런 지점까지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이번 사자성어는 ‘건곤일척’이다. 우선 글자부터 살펴보자. 건(乾)은 태극기의 좌상에 위치한 모양으로 주역(周易) 8괘의 하나다. 음양으론 양(陽), 사상(四象)으론 태양(太陽)에 속한다. 대략 하늘을 뜻한다. 한편, 곤(坤)은 태극기의 우하에 위치한 모양으로 역시 주역 8괘의 하나다. 음양으론 음(陰), 사상으론 태음(太陰)에 속한다. 대략 땅을 뜻한다.

‘주사위를 한 번 던지다’, 이 동작이 일척(一擲)이다. 따라서 ‘마치 하늘과 땅처럼 큰 뭔가를 남김없이 걸고, 오직 한 번으로 최후 승부를 겨루다’, 이게 ‘건곤일척’의 의미다. 중국에서는 ‘고주일척(孤注一擲)’이 훨씬 자주 쓰인다. 비록 앞 두 글자가 바뀌었지만, 뜻은 별반 차이가 없다. 승패 예측이 어려운 일에 자신이 가진 전부를 걸고 마지막 주사위를 던지는 상황이다. 심장이 멎을 듯한 비장미가 두 사자성어 해석의 핵심이다. 결사전의 ‘용기’에 방점이 찍힌 ‘파부침주(破釜沉舟)’와는 쓰임에서 결이 조금 다르다.

‘건곤일척’은 당송팔대가에 속하는 한유(韓愈)가 지은 과홍구(過鴻溝)라는 제목의 시에서 유래한다. 그는 유방과 항우의 최후 대결이 펼쳐졌던 홍구 지역을 지나다가 문득 웅장한 시상에 사로잡힌다. 호방했던 유방의 한나라 진영과 천하장사 항우의 초나라 진영의 최후 결전, 당시 중국 영토 거의 전부가 걸린 이 운명의 한 판에서 유방이 우여곡절 끝에 승리한다. 이 ‘건곤일척’으로 중국사의 긴 난세에 종지부가 찍혔다. 끝내 겹겹의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항우는 생을 마감했다. 사면초가(四面楚歌)가 바로 이 포위망에서 유래한 사자성어다.

전설적인 홍콩 누아르 영화 주인공들은 픽션이니 일단 여기서 빼자. 이런저런 연유로 스포츠 선수들도 빼자. 그러고 나면 이 ‘건곤일척’과 함께 누가 떠오르는가. 필자에게 이번 숙제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근자엔 눈을 씻어도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시력이 약해진 탓일까. 시력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만약 20세기 후반의 정계로만 우리 시야를 좁혀보면 어떠한가. 자연스럽게 당대 지구촌의 시선을 집중시켰던 두 인물이 떠오른다.

독일 통일의 주역으로 꼽히는 콜 수상과 중국 개혁개방의 설계사로 꼽히는 덩샤오핑, 이 두 인물은 한유가 최초로 꺼내 든 ‘건곤일척’ 이 네 글자의 비장미를 직접 느껴보는 그런 순간들을 겪어보지 않았을까 필자는 막연히 추측해본다. 그 긴장된 순간 그들의 손에 숨겨진 마법의 패들이 이제 AI까지 포함한 우리 눈에도 보인다. 그것은 다름 아닌 당시 독일과 중국 각각 그들 공동체 대다수의 몸에 밴 ‘합리성’과 ‘경제하려는 의지(the will to economize)’였다.

홍장호 ㈜황씨홍씨 대표

홍장호. 더차이나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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