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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가의 야심 북돋울 ‘발전국가 2.0’ 모델 필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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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성장체념론 어떻게 극복하나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

한국은 지금 성장체념론에 사로잡혀 있다. 2%대의 저성장조차도 달성하기를 버거워한다. 지난해 1.4% 성장률(전망치)을 기록한 뒤 올해 2.1%로 전망되고, 2025년에도 2.3%에 불과할 것이라고 한다. 일본의 ‘잃어버린 30년’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다는 비관론이 팽배하다.

그러나 저성장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면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고용과 노령화, 양극화 등 한국경제가 당면한 과제들에 대해 그동안 무수한 대책이 나왔는데도 손에 잡히는 성과가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저성장을 받아들인 상태에서 돈을 어떻게 쓸 것인지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성장률이 높아져야 남의 것을 빼앗거나 다음 세대 몫을 당겨 쓰는 다툼을 줄이고 ‘윈-윈(win-win)’할 수 있는 여지가 커진다.

성장률 높아진 미국·싱가포르
전략분야 기업투자 유치한 덕

자본·노동·기술 창조적 결합해
시너지 내는 것은 기업의 역할

‘발전국가=극우’프레임 깨고
산업자본의 확장 더 유도해야

이코노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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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그동안 여러 경로를 통해 3~4%대의 ‘지속적 중(中)성장 전략’을 제안해왔다. 그러나 정책에 반영되지 않는 것 같다. 여당은 규제 완화를 통해 경제 활력을 높이려 하고 대통령이 ‘제1호 영업사원’으로 열심히 뛰지만, 성장 목표를 내걸지 않고 그 실천 방안에 대한 논의가 없다. 야당에서는 부채 탕감을 통한 3% 성장을 내놓았지만, 이전 정부에서 실패한 ‘소득주도성장’의 개악(改惡) 판에 불과한 것 같다.

그러나 조금만 눈을 외부로 돌려보면 선진국이면서도 괜찮은 성장률을 보이는 나라들이 있다. 세계 최대 경제 대국인 미국은 ‘자유무역’을 해친다는 비판을 무시하고 자국 우선 정책을 시행하면서 성장률이 높아지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이 한국의 두 배 가까운데도 2021년부터 한국보다 높은 성장률을 보여 ‘한미 성장률 역전’ 현상이 나타났다. 싱가포르는 1인당 국민소득이 한국의 두 배가량이지만 중기적으로 3~4% 성장을 자신한다. 그렇다면 “남들은 하는데 왜 한국은 못 하나”로 질문을 바꿔봐야 한다. 필자가 보기에 현재 한국사회에는 저성장에서 중성장으로의 기어 변속을 하는데 크게 두 가지 질곡(桎梏)이 있는 것 같다.

‘잠재성장률 하락’의 신화

첫째는 거시 경제학자나 정책담당자에게 ‘분절(分節)적 성장회계학’의 족쇄가 있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로버트 솔로가 내놓은 성장회계학은 지금까지 거시경제 분석과 전망의 뼈대로 사용되고 있다. ‘저성장 굳어지나…한국 잠재성장률 올해 2% 밑돌고 내년 1.7%’ 등의 기사에서 나오는 잠재성장률이 성장회계학을 통해 계산된다. 성장회계학에서는 잠재성장률을 ‘자본 기여+노동 기여+총요소생산성(TFP)’의 합으로 계산한다. 많은 보고서가 여기에 입각해 추세를 계산한 뒤 천편일률적으로 ‘노동, 자본 등 투입 요소에 의한 성장세가 제한된 상황에서 생산성 향상에 의해 성장잠재력을 확충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자본 기여’와 ‘노동 기여’ 수치가 줄어드니까 TFP 수치를 높여야 한다는 주장은 초등학생도 아는 산수를 반복한 것에 불과하다.

김주원 기자

김주원 기자

필자는 TFP에 대해 매우 큰 회의를 갖고 있다. 수리상의 ‘잔차(殘差·residual)’일 뿐 생산성이라는 말을 붙일 논리적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이 필요할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경제 성장이라는 유기적 과정을 자본 기여, 노동 기여, 생산성이라는 3가지 항목으로 분절시켜 본다는 사실에 있다. 기계에는 과거 기술이 축적돼 있다. 근로자가 그 기술을 습득하고 또 향상하면서 생산성이 올라가는 것이다. 그런데 자본이나 노동 기여가 줄었기 때문에 TFP 향상에 노력해야 한다는 말은 자본이나 노동 투입이 줄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고 나머지만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이 된다. 그러면 경제 성장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진다.

‘분절적 성장회계학’서 벗어나야

지난 2년여 동안 미국 성장률이 높아진 데에는 반도체와 자동차, 배터리 등 자신이 전략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분야에 기업 투자를 많이 끌어들여 왔기 때문이다. 싱가포르가 중성장을 자신하는 이유도 전 세계에서 기업 투자가 몰려오기 때문이다. 기업은 단순히 기계만 갖고 오는 것이 아니라, 인력도 넣고 기술도 들여와 좋은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기 위해 융합한다. 자본과 노동, 생산성의 종합 투자를 하는 것이다. 한국경제가 저성장에서 중성장으로 변속하려면 마찬가지로 자본 투자도 늘리고, 인력도 늘리고(단기적으로도 능력 있는 외국인력을 많이 끌어오면 가능해진다), 생산성도 높이기 위한 여러 노력을 동시에 해야 한다.

김주원 기자

김주원 기자

이를 위해서는 경제 성장에 관한 사고를 기업 위주로 재편해야 한다. 경제성장은 기존 기업이 성장하고 새로운 기업이 만들어지면서 이뤄지는 과정이다. 기업은 자본, 노동, 기술을 다양하게 결합해 ‘시너지(synergy)’를 창출하면서 성장한다. 분절적 성장회계는 ‘1+1=2’라는 산수에 머물지만, 기업 활동은 시너지를 통해 ‘1+1=3’도 만들 수 있고, ‘1+1=10’도 만들어낼 수 있다. 또 기업가의 야심은 한계가 없다. 고성장 혹은 초고성장을 하고 싶어하는 기업가들이 즐비하다. 기업가의 야심을 잘 북돋우고 여건을 만들어주면 중성장 달성이 가능해진다.

정부 역할, 시대에 따라 달라져

중성장으로 가는 길에 있는 두 번째 질곡은 정부 역할에 대한 경직된 사고다. 개발 시대에 한국은 ‘발전국가(developmental state)’가 순기능을 해서 고성장을 달성했지만, 이제 중진국을 넘어서고 대외개방이 이뤄진 상태에서는 발전국가를 시도하는 것에 역기능이 많다는 생각이다. 여기에는 선진국이 될수록 정부 역할을 최소화하고 완전 자유시장으로 가야 한다는 목적론적 사고가 작용한다. 박정희 정부 시대를 ‘극우 발전국가’라 규정하는 사람들은 지금 발전국가를 도입하려는 시도를 극우 정치로의 회귀라며 거부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경제 발전에 대한 정부 역할은 시대에 따라 유연하게 생각해야 한다. 경제 기적을 이룬 한국의 ‘발전국가 1.0’은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을 달성하기 위해 등장했다. 지금 한국이 저성장에 빠져 있고 당면한 과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을 때, 성장률을 높이는 것은 새로운 시대적 요청이라고 할 수 있다. 정부 역할은 선험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다.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그 방안을 만들어내야 한다. 지금 미·중 갈등이 첨예해지면서 각국 정부들이 공급망 재편에 개입하는 것도 시대 변화에 따른 정부 역할의 조정이라고 봐야 한다.

발전국가가 극우라는 생각도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극우는 금융자본주의 혹은 신자유주의다.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의 구조조정이나 금융투자자 위주의 ‘주주가치 극대화’ 사고가 그 부류에 속한다. 발전국가는 주로 중도우파이고 중도좌파까지도 포함하는 스펙트럼을 갖고 있다. 정부와 기업이 동반자로서 협력해 성장률을 높이고 그 과정에서 비용과 혜택을 나눌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 그래야만 성장 산업이라는 것들에 대한 지원이 정치적 정당성을 갖는다. 과실이 해당 기업이나 그 주주에게만 돌아가는 극우 이데올로기로는 발전국가 시스템을 만들 수 없다.

기업 확장 저지 규제 풀어야

그러면 현 상황에 걸맞은 ‘발전국가 2.0’은 어떤 모습을 갖춰야 할까. 무엇보다도 기업의 역량이 상당히 축적돼 있고 한국이 세계시장에서 생존해야 한다는 조건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발전국가 1.0’에서는 정부가 앞장섰다면 ‘발전국가 2.0’에서는 기업이 앞장서게 하고 정부가 뒤를 잘 받쳐주는 모습이어야 한다. 또 미국이나 중국 같은 대국(大國)이 사용하는 국내 기업 보호 정책은 한국에 설 자리가 없다. 한국 기업이 ‘자유무역’의 기치를 들고 세계시장에서 뻗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에 투자하고 경제 발전에 기여하는 기업은 국적 불문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해주는 개방적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이와 함께 기업 성장과 창업에 정책의 방점을 둬야 한다. 경제 성장이 기업 창업과 성장의 결과라고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동안 한국은 창업에 대한 지원을 크게 늘렸지만, 대기업의 확장을 저지하는 규제를 많이 도입했다. 대기업에 대한 공정거래법이나 금융상의 규제를 대폭 풀어서 확장을 북돋워야 한다. 창업 기업이 소규모에 안주하지 않고 중기업, 대기업으로 커갈 수 있는 ‘사다리 금융’도 강화해야 한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한국의 대기업이 아직 금융화가 덜 진전되고 산업자본으로서 위치를 많이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단기 금융투자자의 요구에 밀려 자사주 매입이나 배당을 늘리기보다 ‘유보와 재투자(retain-and-reinvest)’를 많이 해 중장기적으로 성장하고 고용도 늘리며 산업자본으로 커갈 수 있도록 정부가 기업과 금융투자자 간의 관계를 재정립해줘야 한다.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