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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윤정의 판&펀

영화·드라마 제작사 A24의 성공 비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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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이윤정 문화칼럼니스트

이윤정 문화칼럼니스트

A24가 또 해냈다. 눈 밝은 어떤 팬들은 며칠 전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넷플릭스 드라마 ‘성난 사람들’의 수상에 이렇게 환호했을지도 모른다. 한국계 스티븐 연(사진 왼쪽)과 중국·베트남계 여배우 엘리 웡(오른쪽)은 아시아계 배우 최초로 이 부문 남녀 주연상을 받아 현지 언론의 말처럼 ‘새 역사’를 썼다.

영화 드라마 제작사 A24가 쓰고 있는 새 역사는 눈부시다. 창사 10년을 살짝 넘긴 뉴욕의 이 제작사는 지난해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로 작품상을 비롯, 7개 부문을 받고 ‘더 웨일’로도 2개를 더했다. 독립영화사가 9개 부문을 싹쓸이한 것 역시 사상 최초며 주연 미셸 여도 아시아계 배우 최초의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한국 배우 최초로 오스카를 받은 윤여정의 영화 ‘미나리’도 A24의 영화다. 독립 영화배급으로 시작해 2016년 처음 제작한 영화 ‘문라이트’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아낸 것 역시 흔치 않은 일이다.

‘성난 사람들’ ‘문라이트’ 등 제작
대중문화 트렌드·시대정신 파악
쿨하고 힙한 느낌 주는 데 성공

판앤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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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할 점은 이 제작사를 향한 열광적인 팬덤이다. 이른바 ‘아트하우스 필름’이나 독립영화에 대한 열광은 오랫동안 특정 작품이나 감독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A24는 제작사 자체가 팬들의 추앙 대상이 됐다. 엔터테인먼트 전문지 ‘벌쳐’는 재작년 ‘A24 컬트’라는 특집 기사를 썼다. 팬들이 입을 모아 “이 회사의 영화라면 무엇이든 보겠다”고 자발적으로 외치며 회사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컬트 제작사’가 된 것이다.

A24의 성공 스토리는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이 성장하는 과정을 연상시킨다. 할리우드의 거대 스튜디오들이 수퍼히어로 거대 액션 영화 시리즈로 상상력의 빈곤을 드러낼 때쯤 뉴욕의 영화사 출신 셋이 모여 만든 이 회사는 예술적인 독립영화 배급으로 틈새시장을 열었다. 특이한 점은 예술영화 마니아라면 연상될 만한 어두침침한 색채를 싹 벗어던지고 뭔가 쿨하고 힙한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을 던져주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언론들은 이 제작사를 ‘부티크 호텔’ 같은 ‘부티크 제작사’로 부른다. 여기에는 전통적인 TV 광고를 완전히 버리고 95%를 온라인 마케팅에 집중하며, 데이터 분석과 잠재적 구매자 타겟팅을 통해 마니아들이 발견의 즐거움을 느끼며 공유하게 하는 스마트한 마케팅이 있다. 소셜 미디어 시장이 텍스트에서 영상 위주로 중심 이동하던 2010년대 초반, 팬들은 이들이 영화 속에서 잘라내 뿌린 흥미로운 ‘밈’ 혹은 ‘짤’들을 퍼날랐다. ‘해리포터’의 주연인 대니얼 래드클리프가 시체로 나온 영화의 경우, 시체의 소셜 미디어 계정을 만들어 대화를 나누게 하기도 했다. 또 영화사 자체 멤버십 회원을 모집하고 영화마다 엄청난 수의 관련 상품들을 판매하고 제작사 계간지를 발매한다. 이 제작사의 인스타그램은 220만 명 이상의 팔로어를 가지고 있으며 레딧에 13만 명 이상의 구독자를 가지고 있다. 제작사의 티셔츠와 영화 관련 상품들은 나오자마자 불티나게 팔려나간다.

그러나 이들의 성공은 결코 영리한 마케팅의 덕만이 아니다. 2016년 제작을 시작한 이래 이 제작사는 “재능있는 사람들이 재능을 마음껏 펼치게 하겠다”며 오랜만에 ‘작가’ 영화가 어떤 즐거움을 주는지를 팬들에게 실감 나게 보여주고 있다. 배리 젠킨스(문라이트)나 대런 애러노프스키(더웨일) 등 감독들은 이 영화사가 감독에게 작품에 관한 한 전적인 신뢰를 부여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목소리를 내는 것을 옹호한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대중문화의 트렌드를 주도하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시대정신을 파악하는 능력을 갖춘 제작사”라는 것이다. 놀라운 공포 영화 ‘미드소마’나 ‘유전’ 등으로 공포영화 팬들에게 뭔가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실감케 한 배경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최초의 아시아계, 최초의 한국인계 같은 역사적인 수상 실적을 내는 일 역시 세심하게 영화 산업과 관객의 수요 변화를 읽어낸 결과라 할 수 있다. ‘미나리’나 ‘성난 사람들’은 그저 미국 영화의 배경화면으로만 등장했던 한인 교포사회의 디테일한 생생함을 담아냈고, 캐나다 한국계 감독 셀린 송의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Past Lives)’도 지난해 최고의 영화 중 하나로 언론에서 손꼽히며 아카데미상 수상을 기대하게 한다. 박찬욱 감독의 드라마 ‘동조자’ 역시 A24 팬들의 대기 리스트 앞 순위에 들어가 있다.

기괴함과 기발함 그리고 다양성을 ‘유니크’함으로 만들어내며 밀레니얼 세대들을 예술 영화관으로 끌어내는 A24의 로고는 이제 팬들에게는 ‘품질인증’ 마크의 동의어로 여겨진다. 이 제작사는 지난해 10월 “앞으로 상업영화와 거대 IP 위주의 제작으로 전환할 예정”이라는 기사가 등장하며 일부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팬들은 “거대 영화도 만들고 작은 예술 영화도 만드는 HBO처럼 변신하면 된다”고 변호하고 있다. 독립영화 최후의 보루인 이 회사가 똑똑한 다윗에서 돈만 탐내는 골리앗으로 변하는 걸 원치 않기 때문이다.

이윤정 문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