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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임종주의 시선

공천이라는 이름의 게이트키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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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임종주
임종주 기자 중앙일보
임종주 논설위원

임종주 논설위원

부산 남쪽 끄트머리 태종대를 품고 있는 영도(影島)가 해돋이 숨은 명소로 꽤 입소문을 탔다는 소식이 문득 시선을 끈다. 며칠 전 새해맞이 행사에도 많은 인파가 몰렸다고 한다. 굳이 날짜를 꼽지 않아도 필시 선거가 다가왔음을 직감케 한다. 부싯돌에서 불꽃이 튀듯 프라이밍(점화) 효과가 발동하면서, 기억의 편린을 뉴스 속 영도가 또다시 낚아 올린 것이다. 그리 오래지 않은, 강렬했던 정치적 사건의 잔상이 뇌리를 맴돌면서부터다.

2016년 3월 24일 당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부산 영도구 영도대교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송봉근 기자

2016년 3월 24일 당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부산 영도구 영도대교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송봉근 기자

때는 2016년 3월 24일. 20대 총선 후보등록 첫날이었다. 선거 기사 준비로 분주했던 필자의 눈에 큼지막한 뉴스 속보 자막이 들어왔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긴급 기자회견-지역구 5곳 무공천”. 당시 김 대표는 공천장 직인 날인을 공개 거부하고 지역구로 그냥 가버렸다. 바로 영도였다. 그리곤 고뇌에 찬 듯 바람 부는 영도대교 위에서 처연히 바다를 응시했다. 선거 D-20일, 집권 여당은 대혼돈에 빠졌다. 친박(친박근혜)-비박(비박근혜) 간 공천 갈등을 적나라하게 압축한 한편의 블랙코미디 같은 장면이었다. 뭇사람의 입에 곧잘 오르내리는 ‘옥새(대표 직인) 파동’이다.

새누리당은 여당 우세를 예측한 대다수 여론조사에 취해있었다. 막상 투표함이 열리자 극적 반전의 파노라마가 펼쳐졌다. 패배의 쓰나미가 여당을 덮쳤다. 오만함에 대한 민심의 준엄한 심판이었다. 정국 주도권의 무게추가 급격히 야권으로 기울기 시작한 분수령이 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더중앙플러스’ 회고록에서 “민심은 무서웠다. 여권이 보여준 한심한 자중지란에 대한 국민의 심판이었고, 궁극적으로 나의 책임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패배였다”라며 뼈저린 회한을 감추지 않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박근혜 전 대통령.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공천 뇌관은 쉽사리 해체되지 않았다. 새누리당 후신인 미래통합당은 4년 만에 다시 파열음으로 들썩였다. 최고위원회의 결정을 공천관리위원회가 뒤집고, 그걸 또다시 최고위원회의가 뒤집었다. ‘호떡 공천’, ‘포스트잇 공천’이라는 유령이 당을 휘저었다. 미래통합당은 보수당 선거 사상 최악의 참패를 당했다. 공천관리위원장으로 갈등의 중심에 있었던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공천이 잘됐으면 이런 비참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죄인된 심정이다”(『총선 참패와 생각나는 사람들』)라고 한탄했다.

2020년 3월 13일 미래통합당 김형오 공천관리위원장이 국회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김 위원장은 이날 ″모든 사태에 책임지고 공관위원장을 사퇴한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2020년 3월 13일 미래통합당 김형오 공천관리위원장이 국회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김 위원장은 이날 ″모든 사태에 책임지고 공관위원장을 사퇴한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정당의 선출직 공무원 후보자 선별 절차인 공천은 법적 규제를 받는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정당의 자율적 권한에 속한다는 게 학계의 통설이다. 잇단 공천 파동은 그러나, 자율이라는 명목하에 정당이 그들만의 리그에 갇혀 오만과 독선, 독단에서 벗어나지 못할 경우 돌이킬 수 없는 후과를 맞게 된다는 실증적 사례다. 서구 학계도 “정치의 비밀의 화원” “정당은 선거라는 부엌에서 나는 냄새가 밖으로 퍼지기를 원치 않으므로 공천을 비밀에 부친다.”(『공천과 정당정치』)라며 일찌감치 그 폐쇄성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공론의 장에 던진 화두가 게이트키핑(gatekeeping), 즉 ‘문지기 역할’의 혁신이다.

“세계 도처에서 수신되는 수십억 개 메시지가 어느 일정한 시각에, 일정한 사람에게 전달되는 수백 개의 메시지로 축소되고 변형되는 과정”(『게이트키핑의 이해』)으로 설명되는 게이트키핑은 본래 한 집단 내 식습관이 어떻게 결정되고 변화하는가에 대한 연구에서 비롯됐다. 요리 하나라도 식재료 재배 단계부터 수확과 유통, 셰프의 손길이라는 무수한 취사선택 과정을 거친다. 각 단계의 입구가 관문(게이트)이며, 그 앞을 지키는 문지기(게이트키퍼)의 결정에 따라 요리와 식습관의 운명이 갈렸다. 사람들의 구미를 당긴 메뉴는 식탁에 올라 식문화를 바꿨고, 그렇지 못한 음식은 도태됐다.

공관위 띄운 여야, 공천 모드로
민심 시대적 요구는 ‘정치 혁신’
공천 통해 '정치 교체'로 나가야

새해 시작과 함께 여야가 요란하게 공천관리위원회를 띄우고 있다. 게이트키핑의 본격 출항을 알리는 팡파르다. 객관과 투명, 공정의 깃발도 나부낀다. 중요한 건 말보다 실천이다. 우리 정치는 승자독식 구조에 기생하며 증오·혐오·팬덤 정치라는 괴물을 만들어냈다. 그 틈바구니에서 ‘외로운 늑대’, ‘은둔형 정치 훌리건’ 등 극단주의자들이 출몰했다. 최근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피습 사건도 극한 대결적 정치가 잉태한 비극이었다. 그걸 근본적으로 혁신하라는 게 민심의 시대적 요구다. 게이트키핑의 으뜸 잣대가 다름 아닌 ‘낡은 정치 교체’여야 하는 까닭이다.

이번 4·10 총선에선 칙칙한 옛 기억 대신 밝고 희망적인 생각에 불을 댕겨줄 새로운 부싯돌을 찾을 수 있을까. 선거가 끝나고 나면 봄빛으로 완연할 영도를 직접 찾아가 볼 요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