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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턴 일렉트릭과 클랑필름, 그 귀한 걸 다 가진 황인용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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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2호 25면

명사들이 사랑한 오디오 

카메라타 내부. 벽면은 노출 콘크리트, 천장은 거대한 목재판으로 마감했다. 전면 벽에 웨스턴 일렉트릭 스피커를 매달고 클랑필름 유로노어 쥬니어는 벽면 중앙에 매립했다. [사진 이현준]

카메라타 내부. 벽면은 노출 콘크리트, 천장은 거대한 목재판으로 마감했다. 전면 벽에 웨스턴 일렉트릭 스피커를 매달고 클랑필름 유로노어 쥬니어는 벽면 중앙에 매립했다. [사진 이현준]

초기 오디오는 무척 비싸 극소수의 상류층만 구매할 수 있었다. 19세기 말 조선에 오디오가 전해질 때 소유할 수 있는 이는 단 한 명, 고종 뿐이었다. 1899년 조선 최초의 오디오 상점 개리양행이 서울 정동에 문을 열었지만 여전히 구매력을 가진 소비자는 드물었다. 대신 차 한 잔 값을 내면 오디오를 감상할 수 있는 ‘길거리 유성기 처소’, 오늘날의 음악 감상실이 탄생했다. 한국 음악 감상실의 역사가 올해로 125년이 됐다.

2024년 음악 감상실 부활과 진화 주도

1950년대 트랜지스터 발명으로 홈 오디오가 저렴하게 공급되면서 전 세계 음악 감상실은 소멸했다. 전통적인 다다미방 구조 탓에 음악 볼륨을 마음껏 올릴 수 없었던 일본만 예외적으로 클래식 음악다방, 재즈 바가 번성했다. 동 시기 한국 또한 낙후된 경제와 해외 오디오 수입 금지 조치로 제대로 오디오를 즐길 수 없었다. 대신 사람들은 명동, 무교동에 위치한 음악 감상실을 찾아 갈증을 해소했다. 1988년 수입 자유화 이후 해외 오디오가 정식 유통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의 음악 감상실 또한 하나둘씩 문을 닫았다.

2024년 음악 감상실이 부활했다. 몇 해 전부터 LP를 감상하는 LP 바들이 하나둘 늘어나는가 싶더니 이제는 잘 꾸며진 고가의 오디오 시스템을 갖춰 사람들을 유혹하는 전문적인 음악 감상실로 진화하고 있다. 이 트렌드는 집 안에서 볼륨 높여 음악을 감상할 수 없는 한국 주거 환경을 반증한다. 2024년 음악 감상실 부활을 주도하고 있는 대표적인 장소로 방송인 황인용의 카메라타가 꼽힌다.

황인용

황인용

1967년 동양방송 아나운서로 방송 활동을 시작한 그는 1970, 80년대 ‘밤을 잊은 그대에게’, ‘영팝스’ 등 인기 라디오 DJ로 명성을 얻었다. 내 또래는 척 맨지오니 ‘Give it all you got’으로 시작하는 그의 방송을 들으며 팝을 배웠다. 그는 오디오를 선망했지만 아나운서 박봉으론 언감생심이었다. 1980년대 프리랜서 선언 후 첫 수입을 들고 세운상가로 달려가 첫 오디오 시스템을 구매했다. 당시 가장 인기 있던 탄노이 스피커와 쿼드 앰프였다.

이후 오디오에 깊이 매료된 그는 늘어난 수입을 아낌없이 오디오에 쏟았다. 오디오를 사랑하는 방송인으로 널리 알려지며 오디오 전문지에 글을 기고할 만큼 전문성도 인정받았다. 오디오 사랑이 더욱 깊어진 그는 사재를 털어 1993년 오디오 계간지 하이파이저널을 창간하기까지 이른다. 오디오 테스트 음반으로 정평이 나 있는 ‘체스키 얼티메이트 데몬스트레이션 디스크’의 더빙도 맡았다. 90년대 한국 오디오 문화를 대표하는 인물로 부상했다.

수십 년간 오디오에 천착해 온 그의 최종 종착지는 미국 웨스턴 일렉트릭과 독일 클랑필름이다. 전 세계 최고 석학이 모인 연구 집단 벨 연구소의 초기 프로젝트는 유성 영화 시대를 위한 극장용 오디오 시스템 개발이었고 그 결과물이 웨스턴 일렉트릭이다. 1933년 집권한 나치는 프로파간다(선동 정치)에 쓸 라디오, 스피커 산업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이에 나치의 후원으로 파죽지세로 성장한 기업이 클랑필름이다. 두 기업의 신화는 벨 연구소, 나치의 전설로 시작된다.

1930년대 오디오 산업은 웨스턴 일렉트릭, 클랑필름이 치열하게 경쟁하며 혁신을 이끌었다. 두 기업에 경도된 빈티지 오디오 애호가들은 ‘오디오 산업의 혁신은 1930년대에 이미 끝났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사실 이들의 진가를 가장 먼저 알아본 이들은 일본 오디오 애호가였다. 1980, 90년대 한국 오디오 애호가는 일본 오디오 잡지를 통해 웨스턴 일렉트릭, 클랑필름을 경외의 대상으로 삼았다. 전성기였던 1920년대 후반 ~ 1930년대 초반 생산된 두 제품이 가장 비싸고 희귀한데, 희소성 탓에 가격은 날로 치솟았다. 수입 증가 폭 보다 가격 상승 폭이 더 크니 오늘 구매하는 게 가장 저렴하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다.

오디오에 몰입하던 황인용은 웨스턴 일렉트릭, 클랑필름 모두를 소유하기에 이른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이들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널찍한 공간이었다. 이때 그의 간절함을 들은 건축가 문신규 회장의 배려로 평창동 토탈미술관에 음악 감상실 ‘카메라타’를 1997년 5월 오픈했다. 카메라타(Camerata)는 16세기 말 이탈리아 피렌체 백작 조반니 데 바르디의 저택에 꾸려진 건축가, 음악가, 미술가의 모임 명칭을 가져온 것이다. 그는 카메라타가 단순한 오디오 공간이 아닌 예술가들이 교류할 수 있는 문화의 장이길 꿈꿨다.

카메라타 운영은 순조로웠지만 그는 이제 자신만의 공간을 원했다. 웨스턴 일렉트릭, 클랑필름은 극장을 위해 설계된 스피커로 좋은 음을 들려주기 위해 거대한 공간을 요구한다. 그는 기기의 잠재력을 아낌없이 끌어내 줄 궁극의 공간을 꿈꿨다. 고민하던 차, 자신의 고향 파주에 헤이리 예술가 마을을 조성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덜컥 부지를 계약하고 헤이리 예술 마을에 참여하는 건축가, 건축주 모임에 참석했다. 이때 “음악 감상실을 만드신다면서요?”라며 젊은 건축가가 말을 걸어왔다.

건축가 조병수 소장이다. 조병수 소장은 몬태나 주립 대학 건축학 학사, 하버드 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치고 1994년 귀국, 조병수 건축 연구소를 열었다. 몬태나 대학은 전 세계에서 건축 음향 설계 수업이 개설된 극소수의 대학이었고, 이를 수강한 조병수 소장은 음악 공간 설계에 목말라 있었다. 황인용은 젊은 건축가의 전문성을 높이 평가해 그에게 설계를 맡겼다.

황인용은 새로운 카메라타가 어릴 적 경험했던 천고 높은 소금 창고 같은 공간이길 꿈꿨다. 이에 부응한 건축가는 카메라타를 가장 심플한 박스 형태로 설계했다. 음악 감상에 방해되는 보, 기둥 하나 없는 순수한 큐브를 콘크리트를 부어 완성했다. 플랫한 노출 콘크리트 표면은 음의 울림이 과도해질 수 있기에 거푸집에 하나하나 줄톱으로 흠을 내 불규칙한 패턴을 만들었다. 이를 통해 음향판과 같은 음의 난반사 효과를 얻었다.

DJ박스 뒤편 음반 컬렉션 1만 점 배치

당연하게도 콘크리트만으로는 최적의 음악 재생에 필요한 이상적인 잔향 시간을 만들어낼 수 없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천장에 길이 12m, 두께 2m의 목재판을 더했다. 좋은 음을 위해 미송 원목을 하나하나 켜를 내 맞붙인 디테일을 더했다. 시청실 내부에서는 천장처럼 보이는 이 목재판은 3층으로 올라가면 외부 테라스로 이어지는 거대한 3층 바닥의 역할을 담당한다. 이를 위해 목재판을 12가닥의 22㎜ 스틸 와이어에 매달아 공중에 부유하듯 설치했다. 음과 기능성 모두를 성취한 기발한 아이디어다. 몬태나 대학 지도 교수도 조병수의 설계를 칭찬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공간의 전면 벽에 거대한 웨스턴 일렉트릭 스피커를 매달고 클랑필름 유로노어 쥬니어는 벽면 중앙에 아예 매립해 버렸다. 그제야 두 스피커는 제 소리를 냈다. 스피커 우측에 위치한 DJ 박스에 앰프, 턴테이블을 놓았고 그 뒤편에 음반 컬렉션 1만여 점을 배치했다. 음반은 그가 평생 컬렉션 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 김경원 박사 등 카메라타를 응원하는 인사들이 기증한 양도 적지 않다.

이렇게 헤이리 카메라타는 2004년 탄생했다. 혁신적인 음향 설계로 조병수 건축가는 2004년 한국 건축가 협회 건축상을 수상했다. 카메라타는 음악과 오디오를 사랑한 건축주와 건축 음향을 이해하는 건축가가 만난 이상적인 예다. 카메라타를 계기로 오디오에 빠진 조병수 소장은 서촌에 자신의 오디오 컬렉션을 모은 음악 바 ‘온그라운드 음’을 열었다.

카메라타 완성 이후에도 황인용은 멈추지 않았다. 카메라타의 음을 갈고닦기 위해 치열하게 듣고 연구했다. “오늘 음은 어떠신가요?”라 물으며 전문가의 조언에도 귀를 기울였다. 오디오라는 취미가 흥미로운 것은 음이 오너를 닮아간다는 점이다. 카메라타의 음은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황인용만의 음이다. 더 비싸고 화려한 빈티지 오디오를 가져다 놓고 뽐내는 공간이 여럿 있지만, 카메라타만큼 매력적인 음을 들려주는 공간은 없었다. 카메라타를 벤치마킹한 오디오 공간이 이곳 저곳 생기는 걸 보면 이제 카메라타는 한국 오디오 신에서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이현준 오디오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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