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 음식 28종 395품목…종가 ‘370년 장맛’의 가르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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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2호 24면

기순도 명인의 양진재 종가 손님맞이 9첩 반상의 본보기 차림. 실제 식탁에서 식사할 때는 다섯 가지 음식을 더 차렸다. [사진 이택희]

기순도 명인의 양진재 종가 손님맞이 9첩 반상의 본보기 차림. 실제 식탁에서 식사할 때는 다섯 가지 음식을 더 차렸다. [사진 이택희]

종가의 상차림 목록을 살펴봤다. 28종 395품목이다. 국수류는 넣지 않고도 그렇다. 기록으로 있는 음식이 아니다. 요즘도 때때로 준비하고 차리는 ‘현재 음식’이다. 밥을 위시한 기본음식 7종 137품목, 반찬 10종 177품목, 다과류가 11종 81품목이다. 이 가운데 밥과 다과류 93품목 빼고 간장이 들어가지 않는 음식은 38품목이다. 264품목은 간장으로 간을 하고 맛을 낸다.

이 많은 음식의 법도를 몸으로 익힌 계승자는 기순도(75) 여사다. 대한민국 전통식품명인 제35호(진장 제조 가공)로 지정된 그는 전남 담양의 창평 고씨(제주 고씨 일파) 양진재(養眞齋) 문중 10대 종부다. 종가 장독대 살림을 맡아 올해 쉰두 번째 새해를 맞는다. 1972년 물려받기 시작해 370여년의 맥을 이어가는 세월의 반세기가 되던 2022년에는 장(醬) 문화 전승의 역사적 소명을 생각했다. 음식문화 콘텐츠 전문회사 ㈜다이어리알, 영양학계 원로 이종미(82) 이화여대 명예교수의 도움을 받아 체계적 전수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1년을 밤낮없이 고민했다.

그렇게 출범한 기순도 발효학교(발효 마스터 과정)가 지난해 10월 14일 개교하면서 1기 수업을 시작했다. 수업은 매주 토요일 8주 16강으로 구성하고 하루 120분 3교시 수업을 진행한다. 대학 3학점 과목 한 학기 과정과 비슷하다. 입학식 고사와 기순도 장류(석장염·죽염 포함 31품목) 맛보기로 시작한 수업은 장·콩 및 발효음식문화 기초이론을 먼저 공부한다. 학교 운동장만 한 종가 마당에 도열한 1200여개 장 항아리를 사열하는 듯한 자리에 교육장을 마련했다.

김장하는 김칫소를 만들 고춧가루에 간장을 넣는 기순도 명인. 김치에 젓갈은 쓰지 않고 간장으로 간을 한다. [사진 이택희]

김장하는 김칫소를 만들 고춧가루에 간장을 넣는 기순도 명인. 김치에 젓갈은 쓰지 않고 간장으로 간을 한다. [사진 이택희]

이후 수업은 메주, 고추장(쌀조청), 청국장(식혜), 간장·된장 담그고 가르기, 별미장에 관한 실제이론 수업과 실습으로 이어진다. 종강 때는 수강생 전원이 장을 활용한 졸업작품을 발표 전시한다. 12월 2일 1기 수료식 날은 남녘 김장철이라 양진재식 배추김치 담그기를 덤으로 배웠다. 그 김치는 한 보따리씩 나눠 가지고 돌아갔다. 양진재 18가지 김치에는 젓갈이 일절 들어가지 않는다. 간을 맞추고 맛을 어우러지게 하는 양념으로 간장을 쓴다. 기 명인 친가(곡성군 죽곡면 반송마을)도 그랬다 한다. 배추 100포기 김장에 중간장 50㎏이 들어간다.

양진재 간장은 응용품 제외하고 기본 5종이 있다. ①장물을 분리해 달이지 않고 1년 안에 쓰는 청장 ②장물을 갈라 달인 후 1~3년 묵은 중간장 ③메주를 1년 염지해 장물을 가른 후 씨간장을 첨장하면서 4년 더 숙성해 5년 묵은 진장(명인 지정 품목) ④간장에 메주를 다시 담가 우려 진하게 만든 겹장 ⑤쥐눈이콩 메주로 담근 서목태간장 등이다. 간장으로 간하는 종가음식 264가지에는 재료와 조리법에 맞춰 각기 다른 간장을 쓴다.

발효학교 개교 고사에서 선생님들과 1기 수강생들이 합장하고 있다. [사진 이택희]

발효학교 개교 고사에서 선생님들과 1기 수강생들이 합장하고 있다. [사진 이택희]

발효학교 1기 개강과 종강 수업을 참관, 청강했다. 수업의 매력 중 하나는 매주 점심을 양진재 발효음식으로 먹는 체험학습이다. 개강 날 점심시간이 가까워지자 안절부절못하던 명인은 “내가 나쁜 게 있어요. 음식을 남한테 못 맽겨요”라며 서둘러 안채로 올라갔다. 이날 발효음식체험은 종가의 손님맞이 9첩반상이었다. 밥·국·숭늉을 포함해 모두 25가지 음식이 올라왔다. 반주까지 26가지. 수업 때 예시한 도표에 22가지, 본보기로 차린 독상의 20가지보다 훨씬 많았다. 6가지를 차린 다과상은 따로 나왔다. 음식을 생업으로 하는 전문가 수강생 10명은 상차림을 보고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음식을 먹으면서는 모두 말문을 닫았다. 좋은 콩이 좋은 소금과 물을 만나고 햇빛과 시간을 머금어 낳은 장 맛의 진하고 깊은 진경에 빠져들었다.

수료식 날 점심은 떡국이었다. 그릇을 받은 기 명인은 걱정부터 한다. “아이구 어쩐댜. 능이가 안 들어갔네.” 능이떡국을 준비했는데 주방에서 그걸 빠트리고 떡국을 끓였나 보다. 그런데 수업 과정을 내내 촬영하던 젊은 남자 프로듀서는 감탄을 했다. “외할머니 떡국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생각이 바뀌었어요. 이 떡국이 더 맛있어요.” 옆자리 이종미 교수가 손자 대하는 눈빛으로 설명했다. “간장의 작용이에요. 좋은 간장은 맛의 요소들을 잘 어우러지게 하면서 더 진하게 끌어올리거든요.”

수료식은 눈물바다였다. 반세기 전 시골 초등학교 졸업식처럼 졸업 소감을 말하는 학생도 울고, 그걸 보는 선생님들도 울고. 졸업작품을 일일이 살피면서 기 명인과 이 교수는 감탄과 안도의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기순도 장을 이용한 창작음식들이 기대 이상으로 훌륭했기 때문이다. 청국장 갈비찜·푸딩·오리테린, 진장 순대·토마토김치, 고추장·간장 약과, 된장 드레싱…일찍이 상상하지 못한 음식들이 쏟아졌다. 음식 전문가들의 의욕적이고 새로운 시도에는 전통장의 전승을 넘어 화려한 부활을 기약하는 기운과 다짐이 꿈틀거렸다.

어머니 장 사업을 총괄하는 아들 고훈국(51) 대표와 진장 기능 전수자인 딸 민견(49)씨도 전통장의 가치 재인식과 세계화라는 어머니 평생 소망을 이룰 발판을 새로 마련한 기쁨을 조심스레 내비쳤다. 발효학교 모집정원은 10명이고, 제2기 개강은 3월 중에 할 예정이다. 공지는 인스타그램을 통해서 한다.

양진재 종가의 창평 고씨 중시조는 임진왜란 의병장 제봉 고경명(1533~1592)이다. 문인이지만 장수로 나서 두 아들과 함께 3부자가 순국했다. 기 명인 종가는 제봉의 차남 학봉 고인후(1561~1592)의 증손인 양진재 고세태(1645~1713)가 개창했다.

이택희 음식문화 이야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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