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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경록의 은퇴와 투자

은퇴 부부에게 필요한 3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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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김경록 미래에셋자산운용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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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 한 마리 오래된 연못에 뛰어드네. 퐁당!’ 일본의 바쇼가 지은 유명한 하이쿠(俳句)다. 하이쿠는 운문 문학 중 길이가 가장 짧은 장르에 속하는 데 이 하이쿠는 17자로 이루어져 있다. 새해가 되면 고요한 가운데 변화들이 시작된다. 오랜 직장 생활을 마치고 휴식기를 가지는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간다. 당사자는 별일 아닌 것 같지만 가정이라는 단위에서 보면 고요한 연못에 파문을 일으키는 사건이다.

베이비부머는 남자가 밖에서 일하고 아내는 가사를 돌보다 보니 반평생 서로의 공간이 분리되어 있다. 집에 돌아가더라도 자녀가 중심이어서 부부간의 문제는 부차적이다. 그런데, 남자가 퇴직할 즈음이면 상황이 180도 변한다. 남자가 밖에서 일하는 시간이 급속히 줄고 집에 있는 시간이 그만큼 늘어난다. 설상가상으로 자녀들이 분가하니 집에는 부부만 덩그러니 남게 된다. 당혹스런 장면이다.

김지윤 기자

김지윤 기자

이런 변화에서 은퇴 부부의 충돌이 일어난다. 그렇다고 매번 밖에 나갈 수도 없다. 자녀들이 없으니 이제 둘만의 꿈 같은 시간을 갖자는 것도 무리다. 이처럼, 은퇴라는 변화에 더하여 가정 구조가 자녀 중심에서 부부 중심으로 바뀌었을 때 은퇴 부부는 위기를 맞게 된다. 위기를 돌파할 3가지 방책을 알아본다.

첫째, 공간(空間)이 필요하다. 같은 집에 살면서 사사건건 다투던 엄마와 자녀도 분가해서 살면 사이가 좋아진다. 집도 대문과 안채까지의 공간이 필요하고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눌 때도 적절한 거리가 필요하다. 부부도 각자의 공간이 필요한 이유다. 무엇보다, 집에 같이 오래 있는 시간을 줄일 필요가 있다. 은퇴 후에 남편은 아내와 더 많은 시간을 갖고 싶어 하지만 아내는 남편과의 시간을 줄이고 싶어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남편은 집에 없는 남편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물리적 공간만이 아니다. 은퇴하고 돌아와 집안 살림이나 구조를 새로 정비해보겠다는 등 아내의 삶의 공간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 관심에서도 적절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 은퇴남이 지켜야 할 원칙 중에 ‘아내가 나가면 어디 가는지 어디에 있는지 묻지 말라’는 게 있다. 부부일심동체를 잘못 해석해서 사생활마저 없을 정도로 관심 영역을 공유하고자 하는 건 특히 조심해야 할 부분이다.

퇴직 후 가정으로의 복귀
남편과 아내 서로 관점 달라
공간·공감·공분 3공으로
충돌 피하고 위기 관리해야

둘째, 공감(共感)이 필요하다. 공감은 영어로 ‘compassion’이다. 깊은 슬픔(passion)을 같이한다(com)는 뜻이다. 부부는 평생을 살아오면서 각자가 가지게 된 깊은 슬픔을 이해하고 나누어야 한다. 남자는 밖에서 일하고 여자는 가사를 하는 소위 ‘노동의 안팎 분업’에서 이런 슬픔이 나타난다.

남자는 밖에서 일을 하는 자신이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그 희생 위에 가족의 우아한 삶이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 〈우아한 세계〉에 나타나 있는 남자 주인공(송강호 분)의 관점이다. 반면 여자는 집에서 애들과 함께 평생 씨름하면서 자신의 삶을 희생했지만 남자는 밖에서 우아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남자와 여자의 관점이 이처럼 다를 수 있다.

이 슬픔의 격차를 이해하지 못하면 말 한마디가 섶에 던져진 불씨가 된다. ‘평생 일했으니 이제 집에서 아내가 해 주는 세끼 밥 먹고 좀 편하게 지내보자’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 아내도 자식 다 키우고 집안일에서 해방되고 싶다. 남자의 바깥일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더운 여름에 넥타이를 매고 땀을 흘리며 가는 영업사원을 보면 마음이 짠하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의 깊은 슬픔을 이해하고 보듬어야 한다. 단가(短歌) 시인 손호연의 ‘지나온 길 뒤돌아보면 속 깊은 그대의 상처에 내 손이 닿질 못했네’라는 구절이 와닿는다.

마지막으로, 공분(共分)이 필요하다. 같이 집안일을 나눈다는 뜻이다. 은퇴 전에는 밖의 일과 안의 일로 분업을 했지만, 은퇴 후에는 밖의 일이 없어지고 안의 일만 남게 된다. 안의 일도 자녀 양육 일은 없어지고 집안 관련된 일만 남는다. 일이 줄었으니 혼자 해도 되겠다고 생각하면 오판이다. 사람도 나이 들어가기에 힘들어진다. 가사를 분담해야 한다.

젊은 2030 세대는 집안일을 공평하게 분담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지만, 베이비부머 세대는 여전히 아내가 담당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지럽히는 사람, 치우는 사람 따로 있지 않다. 쉬는 틈에 짬짬이 공부해서 요리사 자격증을 따서 아내에게 점수를 딴 친구가 있다. 관점 하나 바꾸면 세상이 달라진다.

조선 시대에는 나라의 중요한 일을 돌보는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삼의정(三議政)을 삼공(三公)이라 불렀다. 은퇴 부부도 가정에 공간, 공감, 공분 3공을 두고 관리하면 위기를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해본다. 그러면, ‘퐁당’도 일파만파 퍼지지 않고 곧 잦아들어 평화로운 연못이 될 것이다.

김경록 미래에셋자산운용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