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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봉렬의 공간과 공감

기득권과 새로운 단절, 빈 분리파 전시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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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김봉렬 건축가·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김봉렬 건축가·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19세기 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빈은 프로이트·쇤베르크·코코슈카 등 학문과 예술 분야의 천재들이 창조적 에너지를 발산하던 곳이다. 그러나 구체제의 모순에 찌든 제도권 문화계는 여전히 구시대적 전통을 강요했다. 1897년 일군의 진보적 예술가들이 예술협회에서 탈퇴해 이른바 ‘빈 분리파 (Wien Secession)’를 결성했다. 미술의 구스타프 클림트와 콜로만 모제르, 건축의 오토 와그너와 요세프 M. 올브리히 등이 주축 인물이었다.

이듬해 빈 시내 복판에 올브리히가 설계한 분리파 전시관을 건립하고 최초의 분리파 전시회를 개최했다. 카를 비트겐슈타인이 건설 비용을 전담했다. 20세기 최고의 언어철학자인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부친이며, 제철업의 세계적 부호로 진보적 예술가들의 강력한 후원자였다.

공간과 공감

공간과 공감

그다지 크지 않은 규모로 로비와 전시장으로 구성된 단순한 건물이다. 단순한 백색의 입면과 전시장에 설치된 철골조의 유리 천장 등은 모더니즘을 지향한 새로운 요소들이다. 정면의 황금빛 월계구(月桂球)는 새로운 시대의 영광을 상징한 것으로 ‘황금 양배추’라는 별명을 얻었다. 월계구 아래에 “그 시대에 맞는 예술을, 그 예술에 자유를”이라는 명쾌한 선언문이 쓰여있다.

분리파 전시는 아르누보와 인상파 등 당시 유럽의 새로운 예술을 초대하고 건축과 공예, 미술과 음악의 통합을 시도했다. 1902년 14회 전시회는 베토벤에 헌정하는 통합 전시회로, 클림트가 그 유명한 ‘베토벤 프리즈’ 벽화를 그렸고, 구스타프 말러는 빈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9번 교향곡’을 연주했다. 1904년 노선 갈등으로 빈 분리파는 짧은 수명을 다했으나 개방과 연대와 통합이라는 분리파의 정신은 근대를 여는 핵심적인 가치가 되었다.

‘창(創)’자는 곳간(倉)과 칼(刀)의 조합으로 낡은 기득권을 잘라낸다는 뜻이다. 창조는 단절부터 시작하는 것, 여전히 독립 전시장으로 운영되는 분리파 전시관에서 새삼 깨닫는다.

김봉렬 건축가·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