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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에버라드 칼럼

국제사회 조롱받는 북한판 인권백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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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지난 10일은 세계인권선언 75주년 기념일이었다. 그날 ‘인권백서’를 발표하면서 북한은 인권을 존중은 하지만 “인권선언이 강조한 인간의 존엄과 권리는 오늘날 총기류 범죄와 인종차별, 경찰의 폭행, 여성 및 아동 학대 등 사회악이 만연한 미국과 서구에서 무참히 유린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의 이번 백서는 인권에 대한 북한의 입장이 얼마나 뒤틀렸는가를 보여준다.

2014년 2월에 나온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 보고서 등을 보면 북한의 인권 유린은 전방위적이고 지속적이다. 대부분의 국가는 인권 존중을 지향하지만, 북한 정권 존립의 토대가 되는 정치적 신념은 인권이라는 개념과는 완전히 대척점에 있다. 북한에서 개인의 가치, 그리고 개인과 국가의 관계는 최고 지도자와 그를 둘러싼 당에서 출발한다.

북, 인권선언 75돌에 미국 비판
북한도 인권 관련 두 규약 가입
조약 이행 여부 논의할 날 오길

북한의 인권 침해, 두고만 볼 것인가. [일러스트=김지윤]

북한의 인권 침해, 두고만 볼 것인가. [일러스트=김지윤]

이러한 정치체제에서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인권, 당이나 최고 지도자에 좌지우지하지 않는 개인의 권리란 존재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은 절대적 충성이 필수적이었던 항일 조직 빨치산을 이끈 김일성의 개인 경험과 일제 치하 한국인에게 강요됐던 일본 천황에 대한 충성이 혼합된 결과다.

따라서 국제적 인권 약속은 북한과 북한의 전통, 그리고 정치적 신념에 해로운 것으로 철저하게 거부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북한의 입장은 딱히 그렇지도 않다. 1981년 9월 북한은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대한 국제규약(ICCPR)’과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ICESCR)’에 가입하는 기이한 행동을 보여줬다.

신념의 자유, 결사의 자유, 고문으로부터의 자유, 이동의 자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등 북한의 관행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권리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ICCPR와 ICESCR은 모두 독립적인 유엔 기구에 의해 준수 여부를 모니터링하니 두 규약에 가입한 북한이 마치 자국의 인권 유린에 대한 비판을 감수한 것처럼 보인다. 북한이 왜 이들 조약에 가입했는지 우리는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1991년 9월 17일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함으로써 북한도 세계인권선언 준수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이에 따라 유엔 인권이사회의 조사를 받게 되고,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의 북한 인권보고서 발간이 가능하게 됐다. 국제사회와의 약속과 북한 내부 관행의 절충점을 찾기 위한 북한의 노력은 이번 인권백서에서도 드러난다. 진정한 인권 준수는 완전한 주권 없이는 불가능하며 북한은 주권을 수호하고 있기에 당연히 인권도 보호하는 중이라는 것이 북한의 주장이다. 하지만 국제사회는 북한의 주장을 비웃는다.

국제무대에서 행한 인권에 관한 공식적인 약속과 실질적인 관행 사이의 큰 차이는 세 가지 중대한 결과를 초래한다. 먼저 북한은 ICCPR와 ICESCR, 그리고 세계인권선언에 관한 유엔 체제와 지속적인 마찰을 빚고 비판을 받는다. 그때마다 유엔 대표부 북한 외교관은 흥분하고 북한 관영 매체는 유엔의 관련 보고서를 맹비난한다. 북한 정권은 이러한 국제적 비판을 질색하고, 이러한 긴장 관계는 세계가 북한에 적대적이고 유엔은 미국의 조종을 받는다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둘째, 유엔 기구와 조약이 북한 정권의 인권 침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일련의 기준으로 작동한다는 것은 긍정적 결과다. 당장은 북한 정권의 철저한 정보 통제로 인해 북한 주민은 관련된 문서에 접근하기 어렵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정권 자체가 규칙을 위반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이는 북한 정권에 실질적 위협이다.

예컨대 1976년 ‘모스크바 헬싱키 그룹(MHG)’이 밝힌 옛 소련의 국제법 위반은 결국 소련 체제 붕괴로 이어졌고, 1989년 동독이 스스로 규칙을 어겼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그해 말 베를린 장벽 붕괴로 이어졌다. .

셋째, 국제 조약과 기구는 장기적으로 북한의 인권 성적표에 대해 진지한 논의를 나눌 수 있는 기준이 될 수 있다. 물론 국제사회와의 교류가 전무한 북한이 조만간 이러한 논의에 나설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그러나 변화가 생길지도 모른다. 지금은 요원해 보여도 우리는 북한 주민을 생각해서라도 언젠가는 북한 인권 관련 유엔 조약의 이행을 위한 논의를 재개한다는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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