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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윤병세의 한반도평화워치

2024년 지구촌 주의보 “2차대전 이후 가장 위험해질 수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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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

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

“온 사방에 화재가 발생하고 있다.”

지난 10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한국-유럽 회의에서 EU 고위 관계자가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 이후 세계정세를 평가하면서 한 말이다. 세계정세 진단과 전망에는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지정학적·지경학적·지기술적 그리고 가치체계의 단층선을 따라 분열이 점점 더 깊어지며 이러한 파편화가 상당히 장기화할 것이라는 점에는 공감대가 있다.

이는 구질서가 사라졌지만 새로운 질서가 아직 정착되지 않은 데 기인한다. 새로운 권력 중심이 복합 위기를 해결할 리더십을 확보하지 못한 채 질서 전환이 진행됨에 따라 주요국들은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합종연횡 중이다.

미·중 벼랑끝 경쟁 더 거세질듯
미국 등 세계 70여 국가서 선거
트럼프 복귀 여부가 최대 변수
한국의 국제적 역할 키워가야

유엔도 사무총장의 ‘새로운 평화 의제’ 보고서를 통해 지정학적 분열 극복과 집단안보장치 강화를 포함한 12개 조치를 건의하고 내년 9월 미래정상회의에서 논의할 예정이다.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 금융기구들도 경제 질서 파편화(GEF) 대책 보고서를 냈다.

인태 지역, 21세기 지정학 진원지

한반도평화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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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글로벌 지형을 형성할 주요 요인에 대해 2023 뮌헨 안보회의 보고서는 인권, 글로벌 인프라, 개발협력, 에너지 안보와 핵질서 등을 세계 질서 형성의 핵심 영역으로 제시했다. 2023 NEAR 글로벌 보고서도 미·중 전략 경쟁,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미국 리더십 쇠퇴, 경제 기술 안보,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간 대립, 핵확산 및 핵무기 사용 정책, 글로벌 거버넌스 약화 등을 주요 전선으로 제시했다.

미국은 동시다발적 위기에도 새 국제질서 형성의 결정적인 요소는 미·중 전략 경쟁이고 인태 지역이 21세기 지정학의 진원지라는 입장이다. 지난 11월 미·중 정상회담 합의에 따라 최근 합참의장급 군사 채널 재개로 최소한의 안전판을 마련했지만, 대만해협 위기는 단기간 내는 아니더라도 가장 위험한 지정학적 위기로 부상하고 있다. 리청 홍콩대 교수(전 미 브루킹스연구소 중국석좌)는 12월 초 NEAR 국제회의에서 미·중 전쟁은 ‘일어날 것인지 아닌지’가 아니라 ‘언제’의 문제이고 최초의 AI 전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고 키신저 국무장관이 현 미·중 관계가 1차 대전 이전 상황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고 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미·중 경제 기술 패권 경쟁은 ‘작은 마당, 높은 담장’ 정책 표명에도 불구하고 첨단 반도체, AI, 양자 등 하이테크 기술 분야 중심으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경제안보에서 나아가 에너지 안보, 사이버 및 우주 안보 등 신안보 위협으로 확산 중이다.

올해 한·미·일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의, G7 정상회의 공동성명 등은 민주주의 유사 입장국 간 입장 표명의 대표적 사례이다. 반면 중·러 정상회의, 브릭스(BRICS) 확대정상회의, 일대일로 정상회의는 새로운 비전을 추구하는 세력의 맞불 전략이다. 이 사이에서 ‘글로벌 사우스’의 비중이 커지고 있다. 지정학적 부동층으로 불리는 T-25(중립적 성향 25개국) 국가들의 강대국들에 대한 양다리 걸치기 등 새로운 형태의 (비)동맹 현상이 대두하고 있다. 이러한 비전·가치와 전략적 이해의 충돌이 단적으로 나타난 것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유엔 총회의 분열된 결의이다.

국내 정치와 외교안보의 경계선이 엷어짐에 따라 새로운 세계 질서를 요동치게 할 미국의 대선과 주요국들의 선거 동향도 지정학적 지각 변동 못지않다. “외교정책은 국내정치에서 시작된다”라는 경구와, 새해의 잠재적 최악의 뉴스가 트럼프 복귀라는 달더 시카고세계문제협의회장의 경고는 미국이 최대의 지정학적 리스크라는 주장이 힘을 받는 이유이다.

2024년은 세계 70여 개 국에서 최소 20억 이상의 유권자가 참여하는 21세기 최대의 선거판이 세계 도처에서 벌어진다. 미국·러시아·우크라이나·대만·인도·인도네시아·유럽 의회와, 경우에 따라 일본 등이 대표적이다. 선거판이 지정학 지각판을 흔드는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

하스 미국외교협회 명예회장은 “글로벌 도전, 유럽과 인태 지역에서의 강대국 간 전쟁 가능성의 증가, 이란의 중동 불안정 초래 능력의 신장 등이 하나로 합쳐져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위험한 상황”이라고 했다.

미국과 동맹 우방국들 사이에서도 동시다발적 전쟁이나 충돌에 대처할 능력에 관한 논쟁이 진행 중이다. 국내에서도 북한이 우크라이나와 중동에서의 전쟁과 향후 대만해협에서의 긴장 고조 등을 악용할 것이며 동맹의 관여 능력이 분산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이러한 시대전환에 맞추어 한·미 동맹, 한·일 관계, 한·미·일 안보 협력을 계속 강화하고 EU·NATO·아세안·중동아·남태평양·중남미 등 외교 지평을 확대하면서, 한·중·일 정상회의 추진 등 한·중 관계 개선을 위해서도 노력해야 한다.

‘알려진 도전’ ‘알려지지 않은 위험’

그럼에도 앞으로 다가올 ‘알려진 도전’과 ‘알려지지 않은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서 유의할 사항들이 많다. 첫째, 동시다발적 복합위기 시대에 도전의 상호 연계성에 부합하는 통합적 전략과 위기관리 대책을 세워야 한다. 북핵은 최우선 순위이지만, 캠프 데이비드 합의에 따라 인태 지역에서 오는 도전이나 위협·도발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우크라이나· 중동 등 다른 지역의 나비효과도 무심할 수가 없다. 경제 기술 안보도 마찬가지다.

둘째, 내년도 2차 한·미·일 정상회의와 한·중·일 3국 정상회의 주최는 물론이고 유사한 입장의 중견국 연대를 주도해야 한다.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에 대한 새로운 비전과 맞춤형 전략을 강화해야 한다.

셋째, 우리가 내년부터 유엔 안보리 이사국을 다시 맡는 만큼 글로벌 의제 활성화 및 유엔 개혁에 중심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

넷째, 2차 대전 와중에 발표된 대서양 헌장은 유엔 헌장과 함께 유럽 통합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최근 NEAR 글로벌 보고서가 향후 인태 헌장을 모색할 필요성을 제언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다섯째, 내년 미국의 대선 결과가 한·미, 한·미·일간 합의를 포함한 지역·세계 질서에 미칠 영향에 대비해야 한다. 한·미 핵협의그룹과 후속 조치를 되돌릴 수 없도록 해야 한다.

약 30년 만에 오는 대전환기에 우리가 시대 변화에 얼마나 잘 적응하고 역할을 해 나가느냐에 미래가 달려 있다.

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