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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신복룡의 신 영웅전

소탈했던 딘 러스크 국무장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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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공직자의 삶이란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할 때면 나는 딘 러스크(1909~1994·사진) 미국 국무장관의 사례를 든다. 러스크는 1931년부터 4년간 로즈 장학생으로 선발돼 옥스퍼드대에서 철학과 정치경제학을 공부했다. 수업이 시작되기 15~20분 전 미리 교실에 들어가 교수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별명이 엘리야였던 그는 한때 목사가 되고 싶었다. 졸업식에서 ‘세실(Cecil) 평화상’을 받은 그는 귀국해 밀스 칼리지에서 교수로 근무했다. 스스로 수재라는 자부심을 품던 로즈 장학생은 박사학위 논문을 쓰지 않고 글에 각주를 달지 않았다. “우리는 남의 글을 읽고 그를 참고해 쓰는 것이 아니어서 우리의 주장이 곧 학설이다.” 그들은 괴벽스럽고 까칠한 인물들이었다.

신영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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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러스크는 1940년에 대위로 다시 입대해 인도-미얀마-중국 전구에서 복무하다가 전쟁성으로 전보됐다. 거기서 정보국을 창설하고, 작전국 참모과장으로 활약했다. 이때 윗선으로부터 “인도차이나 반도가 중국 북쪽에 있는지 남쪽에 있는지 알아보는 정도의 일을 했다”고 회고록(『As I Saw It』, 1990년)에서 투덜거렸다.

러스크는 한국전쟁 뒤에 록펠러 재단 이사장으로 근무하다가 봉급이 25분의 1로 깎이는 것을 감수하면서 국무장관에 발탁됐다. 1961년부터 1969년까지 존 F 케네디와 린든 B 존슨 대통령 행정부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직업’을 즐겼다. 국무장관 재임 중에도 동네 세탁소에 가서 아주머니들과 25센트 동전을 넣으며 세탁했다.

은퇴할 때는 소득세 신고 자료와 지인들의 연락처가 담긴 수첩만 들고나왔다. 정계를 은퇴한 뒤에는 조지아대에서 강의했다. 부부 가운데 한 사람은 살아남아 자식들을 돌봐야 한다면서 평생 아내와 한 비행기를 타지 않을 만큼 섬세한 사람이었다. 큰일을 하다 보면 가정에 소홀하다는 말도 괜한 소리다.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