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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임종주의 시선

달과 손가락을 모두 봐야 하는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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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임종주
임종주 기자 중앙일보
임종주 정치에디터

임종주 정치에디터

초콜릿값이 급등했다는 뉴스에 눈길이 가는 걸 보니 크리스마스가 머지않았음을 새삼 느낀다. 몇 해 전 미국 대형마트에서 크리스마스 초콜릿이 산더미를 이룬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는데, 그때 각인된 기억이 스멀스멀 재생 효과를 발휘하곤 한다. 고물가 추세에 주원료인 카카오 작황마저 기상 이변으로 타격을 입어 초코플레이션(초콜릿+인플레이션)까지 우려된다고 한다. 이래저래 초콜릿 마니아의 상심은 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지난 8일(현지시간) 한 여성이 영국 런던 슈퍼마켓에서 크리스마스 초콜릿을 배경으로 포장지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8일(현지시간) 한 여성이 영국 런던 슈퍼마켓에서 크리스마스 초콜릿을 배경으로 포장지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소중한 이에게 초콜릿을 선물할 때는 사랑의 마음도 함께 담는다. 널리 알려진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의 기호 체계에 따르면, 초콜릿이 기표라면 사랑의 마음은 기의다. 두 개가 짝을 이뤄 ‘사랑의 초콜릿’이라는 하나의 기호가 된다. 사랑의 마음이 초콜릿이라는 운반체에 실려 상대방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환한 미소로 화답해오면 성공한 커뮤니케이션이 된다. 반대로 반응이 영 신통치 않으면 의미 작용은 서로 엇나간 것이다.

초콜릿의 이면에는 모순적 실상이 도사린다. 인권단체들이 지적하는 카카오 농장 아동 강제노동과 수탈적 먹이사슬 구조다. “(초콜릿의) 비밀을 알아 버린 지금, 이것은 더 이상 잠 못 드는 밤을 달래는 달콤한 향기가 아니었다. 돈 한 푼 받지 못한 채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는 고통의 냄새, 아무리 일해도 매질을 피할 수 없는 공포의 냄새였다.”(『나는 초콜릿의 달콤함을 모릅니다』)

서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 농장에서 건조 중인 카카오 원두. 연합뉴스

서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 농장에서 건조 중인 카카오 원두. 연합뉴스

대중매체나 SNS·광고 등 우리를 둘러싼 현실은 이 불편한 진실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뒤바꿔 놓는다. 초콜릿은 달콤함 그 자체로 뒤틀리고 굴절된다. 원래도 그랬고 앞으로도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현실이란 완벽히 역사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저널리즘·예술·상식 등에 의해 자연스러운 것, 본래적으로 둔갑해 버리는 현상, 즉 현실의 거짓된 자연스러움이 참을 수 없이 느껴졌다.”(『롤랑 바르트-현대의 신화』)

기호학자이자 문예비평가이기도 했던 바르트는 소쉬르의 기호 체계를 신화(myth) 개념으로 정교화해 현실 왜곡 메커니즘을 읽어낸다. 유명한 사례가 프랑스 군복 차림의 흑인 청년이 삼색기에 거수경례하는 사진이다. 바르트가 이발소에서 우연히 접했다는 잡지 속 사진은 흑인 병사의 경례라는 기표와 프랑스적 특성이라는 기의가 결합해 ‘흑인 병사가 프랑스식 거수경례를 한다’는 하나의 기호가 된다.

바르트는 이 같은 1차 체계를 토대로 신화적 2차 체계의 의미작용을 판독해 낸다. 그건 바로 ‘프랑스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알리바이’로 나타난다. 초콜릿의 달콤함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순간 자본주의 초콜릿 신화는 즉각적인 효과를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신화는 부지불식간에 거의 모든 사물이나 이미지를 통해 특정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고, 그 이데올로기는 힘의 원천인 헤게모니 정당화에 봉사한다.

신이나 영웅 이야기 수준에서 일상적 담론으로 확장된 신화는 비정치적 언술이라곤 하지만 실상은 지극히 정치적이다. 언어로 이뤄지는 정치 세계가 딱 그렇다. “정치적 신화 제작자들은 교묘하게 왜곡과 굴절을 최대한 이용한다. 모든 정치배는 거짓을 신화화한다. 히틀러가 커다란 거짓일수록 군중들에게 잘 먹혀 들어간다고 하지 않았던가!”(『기호학이란 무엇인가』)

경기도 김포시 한 거리에 내걸린 서울 편입 관련 현수막. 연합뉴스

경기도 김포시 한 거리에 내걸린 서울 편입 관련 현수막. 연합뉴스

내년 4·10 총선이 이제 넉 달도 채 남지 않았다. 거대 양당이 쏟아내는 달콤한 언어와 기호가 홍수를 이루며 온 세상을 장식할 것이다. 이미 ‘메가 서울’을 시작으로 신도시 특별법과 구도심 개발 촉진법까지 각종 개발 공약이 포문을 열었다. 타당성과 실현 가능성에는 여지없이 의문부호가 따라붙는다. 지난 21대 총선 공약 이행률도 26.95%로 30%조차 넘지 못한 처지에서다.(2022,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총선 노린 ‘공약’ 쏟아지는 요즘  
'메가 서울' 등 실현성은 미지수  
포퓰리즘의 ‘겉과 속’ 읽어내야

정작 자연스럽지 않은 것은 선거 때마다 공수표를 남발하면서 아성을 쌓아온 거대 양당 기득권 카르텔 구조 자체다. 수십 년 독과점 체제를 구축하고 정쟁과 극단적 대결의 정치를 양산하는데도 자연스럽게 느껴진다면 거기엔 필시 왜곡이 있거나 타협적 요소가 개입한 것이다. 필연적이거나 원래 그래야만 하는 당연한 정치 현실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화는 분석적 판독으로 그 의도가 폭로되는 즉시 파괴된다. 난무하는 정치 기호들 속에 담긴 지시적 의미와 내포된 함축적 속뜻을 분명하게 가려낼 때 신화의 의미작용은 해체되고 속임수는 간파된다. 누군가 손가락으로 달을 보라고 가리키면 응당 달을 봐야 하지만, 손가락도 간과해선 안 된다. 초콜릿의 달콤함 뒤에 숨겨진 씁쓸한 진실 또한 무심결에 망각의 강으로 흐르지 않도록 촉각을 곤두세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