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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성수의 우리 과학 이야기

‘지석영 신화’를 넘어서…일제가 숨긴 조선의 종두법 실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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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송성수 부산대 교양교육원 교수

송성수 부산대 교양교육원 교수

“옛날 어린이에게는 호환·마마·전쟁 등이 가장 무서운 재앙이었다.”

1990년대 후반에 불법 비디오의 유해성을 경고하는 공익 광고로 사용되었던 문구다. 여기서 ‘마마’는 오랫동안 인류를 괴롭혀온 전염병인 천연두(두창)를 지칭한다. 천연두에 걸리면 대개는 죽음에 이르렀고, 설사 살아남는다 해도 얼굴에 짙은 흉터가 남아 곰보로 취급되었다. 1979년에는 세계보건기구(WHO)가 천연두의 완전한 소멸을 발표했는데, 지금까지 천연두는 인류가 정복한 유일한 질병에 해당한다.

천연두를 예방하기 위해 백신을 접종하는 것을 ‘종두(種痘)’라고 한다. 종두법에는 인두법(인두접종법)과 우두법(우두접종법)이 있다. 전자는 사람의 천연두를, 후자는 소의 천연두를 백신으로 활용하는 방법이다. 인두법은 15세기 중국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우두법은 18세기 영국의 의사인 제너가 처음 개발했다.

구한말 보급된 천연두 예방법
중국·서양 등 다양한 경로 거쳐
지석영은 일본에서 새로 익혀
일제는 조선 정부의 무능 부각

이재하·최창진 등 여러 사람 익혀

서울 종로구 대학로 서울대병원 구내에 있는 지석영 동상. 지석영은 우리나라에 ‘종두법’을 보급한 사람 중 한 명이다. [중앙포토]

서울 종로구 대학로 서울대병원 구내에 있는 지석영 동상. 지석영은 우리나라에 ‘종두법’을 보급한 사람 중 한 명이다. [중앙포토]

우리나라에서 우두법을 확산시킨 일등공신으로는 ‘조선의 제너’로 불리는 송촌 지석영이 꼽힌다. 지석영은 1879년 가을에 제생의원(현재 부산광역시의료원)에서 일본인 의사로부터 우두법을 처음 익혔다. 그는 두묘(백신의 원료)와 종두침을 얻어 오늘날의 3번 국도에 해당하는 길로 귀경하던 중 처가가 있는 충주군 덕산면에 들렀다. 거기서 지석영은 두 살배기 처남을 시작으로 40여 명에게 우두를 시술했다. 지석영이 충주에 도착한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144년 전인 1879년 12월 6일이었다.

당시에 우두법을 습득한 사람으로는 지석영 외에도 이재하·최창진 등이 있었으며, 일본인뿐만 아니라 중국인을 통해서도 우두법이 전래되었다. 이에 대해 이재하는 1889년에 발간한 『제영신편』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을해년(1875)에 내가 평양에 머무를 때 계득하를 만나 교류하게 되었는데, (…) 그는 매번 나에게 영국 양의(良醫)의 어질고 덕이 빛나는 우두법에 대해 말해주었다. (…) 뒤에 지석영이 일본인에게서, 최창진이 중국인에게서 이 방법을 배웠다.’ 또한 조선에 파견된 서양 선교사들도 의료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으므로 그들을 통해 우두법이 전파되었을 가능성도 농후하다.

지석영은 1880년 2월에 서울로 돌아와 개인적으로 우두법을 보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두묘는 제한된 양밖에 없었고 지석영은 두묘 제조법을 몰랐다. 마침 1880년 5월에 김홍집이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갈 때 지석영이 수행원으로 동참할 수 있었다. 지석영은 일본 내무성 위생국의 우두종계소를 방문하여 독우(송아지)의 사육과 우두의 채취·제조·저장 등에 관한 방법을 새로이 익혔다. 1880년 9월에 지석영은 서울에 종두장(種痘場)을 차린 후 두묘를 만들어 우두접종 사업을 벌였다.

전국 단위 우두사업 펼친 조선 정부

1882년에는 전라도 어사 박영교가 전주에 우두국을 신설할 계획을 세웠고, 1883년에는 충청도 어사 이용호의 건의에 의해 우두국이 설치되었다. 이어 1885년 4월에는 지석영이 우리나라 최초의 우두법 교재에 해당하는 『우두신설』을 발간했다. 드디어 1885년 10월에는 조선 정부가 전국의 주요 도시에 우두국을 설치하여 우두 보급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당시 조선 정부의 우두 사업은 북으로는 두만강 이북의 간도, 남으로는 제주도 아래 마라도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조선 정부의 우두 사업은 1890년 5월에 중단됐으나 5년 뒤에 다시 부활했다. 1895년 10월에는 전국의 모든 어린이에게 의무적으로 우두접종을 실시한다는 ‘종두규칙’을 공포됐다. 같은 해 11월에는 종두의사를 양성하기 위한 ‘종두의양성소규정’이 마련되었다. 1897년에는 종두의양성소가 설립되어 1899년까지 53명의 종두의사가 배출되었다. 이어 1899년에는 ‘각 지방 종두규칙’과 ‘두창 예방규칙’이 제정되었고, 1900년에는 13도 관찰사에게 훈령을 내려 각 도와 군의 종두사무를 보고하도록 했다.

그로부터 약 30년이 지난 1928년에 일제는 지석영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는 12월 6일에 종두 50주년 기념식을 거행했으며, 이에 앞서 기관지인 매일신보는 ‘조선의 제너: 송촌 선생’이란 기사를 연재했다. 일제는 지석영이 일본의 도움을 받아 조선인의 무지와 조선 정부의 무능을 무릅쓰고 홀로 우두법을 보급했다는 주장을 퍼트렸다. 전북대 신동원 교수가 칭한 ‘지석영 신화’가 탄생했던 것이다. 일본과 지석영만 미화하는 이런 주장은 조선에 대한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매개물로 작용했고, 미키 사카에(三木榮)가 1935년에 집필한 『조선종두사』에도 그대로 담겼다.

식민통치에 이용한 ‘지석영 신화’

소위 ‘지석영 신화’는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우두법은 이미 19세기 초부터 정약용을 비롯한 조선인 학자들에 의해 소개되었으며, 개항을 전후해서는 일본인뿐만 아니라 중국인과 서양 선교사를 통해 우두법이 조선에 들어왔다.

또한 조선 정부는 1885년에 우두법을 전국적으로 시행하고 1895년에 우두접종에 관한 법제를 마련하는 등 자체적으로 우두 사업을 추진했다. 일반인이 우두법과 같은 새로운 기술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종종 나타나는 일종의 문화적 현상에 해당한다.

지석영이 조선 우두법의 역사에서 두드러졌던 인물이고 그가 일본인에게서 우두법을 배웠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여러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한 개인의 업적을 칭송하게 되면 부지불식간에 영웅주의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아직도 지석영에 대한 상당한 책자가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신화에 의존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송성수 부산대 교양교육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