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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0만원 훌쩍 넘는 英명품…댓글 쏟아진 '이효리 스피커' 정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명사들이 사랑한 오디오

최근 ‘후디에 반바지’로 컴백한 가수 이효리는 디지털 싱글 발매 직후 음원 사이트 상위에 랭크하고, 모델로 계약한 패션 브랜드는 매진을 기록하는 등 여전한 ‘이효리 파워’를 증명했다. 그는 얼마 전 유튜브를 통해 자신의 오디오 시스템을 공개했다. 널찍한 전용 룸에서 존재감을 발휘하는 거대한 스피커가 어떤 제품인지 문의하는 댓글들이 쏟아졌다. 이효리의 스피커는 영국 오디오 역사의 산증인 탄노이(Tannoy)의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취임식 때도 사용

탄노이 모니터 골드가 설치된 영국 애비로드 스튜디오. [사진 탄노이]

탄노이 모니터 골드가 설치된 영국 애비로드 스튜디오. [사진 탄노이]

그가 자신의 탄노이 스피커를 공개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0여 년 전 리얼리티 TV 프로그램을 통해 서울 논현동 자택을 공개했을 때 거실에 놓인 탄노이 웨스트민스터는 화제를 모았다. 결혼 후 방영한 ‘효리네 민박’에서도 이 스피커는 제주도 집 별채의 홈 스튜디오에 당당히 자리 잡고 있었다. 종영 후 이사한 지금의 집까지 탄노이 웨스트민스터는 10년 넘도록 메인 스피커의 자리를 차지해 온 그의 애장기다.

탄노이 웨스트민스터는 1983년 출시이래 동사의 플래그십 모델 자리를 단 한 번도 놓치지 않은 스테디셀러다. 현재 소비자 가격 6000만원이 훌쩍 넘는 고가의 스피커임에도 이효리가 선뜻 구매할 수 있었던 데에는 열렬한 오디오 애호가 남편 이상순의 조언이 큰 역할을 담당했다. 이상순은 탄노이 외에도 서브 오디오 시스템인 하베스, 음악 작업을 위한 모니터 스피커로 ‘류이치 사카모토의 스피커’로 널리 알려진 독일 가이타인(Geithain)을 소장 중이다.

이효리

이효리

지난해 부부가 제주 구좌읍에 오픈한 카페 롱플레이(Longplay)는 이들의 음악 사랑이 듬뿍 묻어나는 공간이다. 매장 명을 LP의 본말인 Long Play에서 따왔을 뿐만 아니라 커피 원두에도 제플린, 질베르토 등 유명 아티스트의 이름을 붙였다. 이곳을 방문하면 이상순이 직접 선곡한 플레이리스트를 그가 엄선한 암피온(Amphion) 스피커로 1시간 동안 감상하며 커피를 즐길 수 있다. 카페를 빙자한 음악 감상실 같은 공간이었다.

이토록 음악을 사랑하는 이효리, 이상순 부부가 10년 넘게 소장 중인 탄노이 웨스트민스터는 어떤 제품일까. 탄노이는 엔지니어 가이 R. 파운틴(Guy R. Fountain)이 1926년 영국 런던에서 창업한 기업이다. 1877년 에디슨의 포노그래프 발명 이후 오디오 시장의 패권은 미국이 움켜쥐고 있었다. 반면 영국은 음반의 흥행이 오디오 산업의 성장을 견인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EMI, DECCA 레이블의 활약이 탄노이의 성장을 야기했고 이후 비틀스, 롤링스톤즈, 핑크 플로이드의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을 통해 B&W, Linn, ATC, Naim 등 2세대 영국 오디오 메이커들이 탄생했다. 영국 오디오 산업은 영국 음악을 통해 세계를 지배했다.

이효리의 스피커 탄노이 웨스트 민스터. [사진 탄노이]

이효리의 스피커 탄노이 웨스트 민스터. [사진 탄노이]

1920년대 오디오 산업은 미국의 벨 연구소, 독일의 클랑필름(지멘스·AEG 합작사) 두 기업이 치열하게 경쟁하며 혁신을 이끌었다. 벨 연구소는 AT&T라는 거대 자본으로, 클랑필름은 나치의 후원으로 크게 성장한 반면, 영국은 음반에서만 겨우 체면치레를 했을 뿐 자국을 대표하는 오디오 기업을 만들어내는 데 실패했다. 그리고 마침내 영국에도 도약의 기회가 찾아왔으니 바로 라디오의 등장이다.

영국 중앙 우체국(GPO)은 라디오 시대를 맞아 사업 면허 신청을 받기 시작했고 이에 100곳이 넘는 업체가 몰려 들었다. 방송이 중구난방으로 운영될 것을 우려한 정부는 이들이 모두 공동 운영하는 하나의 통합 방송국을 제안했고 이것이 지금의 BBC(British Broadcasting Company)다. 1922년 10월 18일 BBC 첫 송출 이후 비싼 축음기 대신 공짜로 음악을 들려주는 라디오의 수요는 급증했고 이를 채워줄 새로운 영국 오디오 업체들이 속속 등장했다. 이 때 탄노이, 보이트(이후 보이트-로더) 등이 등장했다.

탄노이 웨스트민스터가 놓여 있는 이효리의 집. [사진 유튜브]

탄노이 웨스트민스터가 놓여 있는 이효리의 집. [사진 유튜브]

초기 라디오는 진공관을 사용했고 진공관의 필라멘트를 가열하기 위해 낮은 직류 전압이 필요했다. 전기는 교류전류이기 때문에 진공관을 위해 별도의 배터리를 써야 했는데 당시 배터리 가격은 무척 비쌌고 자주 충전해 줘야 하는 불편이 따랐다. 이에 착안한 가이 R. 파운틴은 1926년 자신의 이름을 딴 ‘Guy R. Fountain’사를 창업, 교류를 직류로 변환하는 전자식 정류기를 제작해 라디오 제조사에 공급했다. 정류기의 제품명을 주요 소재 탄탈륨(Tantalum)과 납합금(Lead Alloy)를 더한 조어, 탄노이(Tannoy)라 명명했다. 탄노이 정류기는 탁월한 품질로 유명세를 얻었고 이에 고무된 그는 사명을 아예 탄노이로 변경했다.

가이 R. 파운틴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본격적인 오디오 기기 개발에 착수했다. 1930년 15인치 혼 스피커를 발표했고 1931년에는 축음기까지 발매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당시 오디오의 음이 만족스럽지 못했다. 고품질 오디오 설계를 위한 정밀 계측기를 직접 개발했고 이 과정에서 훗날 영국 PA를 대표하는 탄노이 마이크가 탄생했다. 1933년에는 당시로서는 놀라운 100W 진공관 앰프를 발표해 세상을 경천동지 하게 만들었다.

안동림·김정운 교수, 윤광준 작가도 써

탄노이의 혁신을 가장 먼저 반긴 곳은 영국 정부였다. 2차 세계대전 발발 후 영국 정부는 나치의 치밀한 프로파간다에 맞설 우수한 마이크와 스피커 시스템이 필요했고 이에 적격은 단연 탄노이였다. 영화 ‘킹스 스피치’의 실제 인물인 영국 국왕 조지 6세가 연설 시 애용한 마이크와 스피커도 탄노이였다. 1952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취임식 때 런던 시내를 수놓은 수많은 혼 스피커, 이를 구동한 1000W 고출력 앰프도 모두 탄노이였다.

영국 왕실의 공인으로 영국 PA 시장을 장악한 탄노이의 다음 목표는 홈 오디오였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찾아온 경제 호황, LP·스테레오 등 신기술의 보급으로 홈 오디오 시장은 급성장하고 있었다. 이를 기회로 삼아 미국의 JBL과 AR, 독일의 브라운 같은 신성이 부상하고 있었다. 영국의 자존심 탄노이도 자사의 기술력을 널리 알릴 혁신적인 홈 오디오가 필요했다.

1947년 탄노이는 런던 라디오 쇼에서 훗날 명기로 기록되는 듀얼 콘센트릭 유닛을 발표했다. 듀얼 콘센트릭은 중저역을 재생하는 15인치 우퍼 중앙에 고역을 재생하는 2인치 트위터를 장착한 것으로 모든 음이 같은 축 상에서 재생된다고 해서 흔히 동축(同軸) 유닛이라 부른다. 이전에도 젠센 등에서 동축 유닛을 선보인 적이 있었지만 탄노이의 듀얼 콘센트릭만큼 놀랍도록 선명하고 깨끗한 음을 들려주는 제품은 없었다. 이후 꾸준히 음질 개선이 이뤄졌지만 제품 구조는 초기 모델의 그것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탄노이 애호가들은 초기 모델을 ‘블랙’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는데 상태가 좋은 모델의 경우 1억원을 호가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

탄노이 듀얼 콘센트릭 유닛의 잠재력을 가장 먼저 알아본 곳은 영국의 레코딩 스튜디오였다. 클래식의 명가 데카(DECCA)는 자사가 선보인 혁신적인 신기술 FFRR(Full Frequency Range Recordings)을 효과적으로 재생할 수 있는 압도적인 성능의 스피커를 원했고 당시 탄노이 외 대안은 없었다. 데카는 자사 레코딩 스튜디오의 모니터 스피커로 탄노이를 낙점하는 동시에 데카가 개발 중인 장전축 데꼴라(DECOLLA)에 사용하기 위해 듀얼 콘센트릭 유닛 900개를 주문했다. ‘탄노이가 클래식 재생에 최고’라는 오디오계 전설은 클래식 명가 데카의 모니터 스피커라는 사실에서 시작됐다.

데카에 이어 애비로드 스튜디오도 탄노이 스피커를 설치했고 이를 통해 핑크 플로이드의 ‘The Dark Side of the Moon’ 등의 명반이 탄생했다. 탄노이로 레코딩한 영국 음악들이 세계를 점령하며 탄노이의 명성도 전 세계로 뻗어나갔다. 탄노이는 자사 제품에 웨스트민스터, 버킹검, 옥스퍼드 등 영국 지명을 붙이며 영국 문화를 전 세계에 알리는 첨병을 자임했다.

탄노이의 열풍은 아시아까지 이르렀다. 도쿄 올림픽을 기점으로 해외 오디오 수입을 허가한 일본에서도 최고의 인기는 단연 탄노이였다. 소설 ‘상신’으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고미 야스스케는 동시대 오디오 평론가로도 활동했다. 그는 1964년 아시아 최초로 탄노이 오토그래프를 영국 본사에 주문했고 저서 『서방의 음』 등을 통해 평생 동안 탄노이를 찬미했다. 오디오 수입 금지 시대에 일본을 통해 오디오를 접한 우리 또한 이에 영향을 받았고, 밀수로 오디오를 접해야 했던 1970~80년대에도 탄노이는 높은 인기를 구가했다.

탄노이 사용자 중에는 이효리, 이상순 부부 외에도 유독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이 많다. 『이 한 장의 명반』으로 유명한 안동림 교수는 탄노이 아덴을 평생 사용했다. 『소리의 황홀』로 많은 이들을 오디오의 세계로 인도한 윤광준 작가는 작업실 비원에 1967년 생산된 탄노이 오토그래프 레드를 두고 20년 넘게 애용 중이다. 김정운 교수도 절친 윤광준 작가의 권유로 탄노이 블랙을 구입했고 지금도 여수 미역창고의 음악을 담당하는 현역기로 활약 중이다.

이현준 오디오 평론가. 유튜브 채널 ‘하피TV’와 오디오 컨설팅 기업 하이엔드오디오를 운영한다. 145년 오디오 역사서 『오디오·라이프·디자인』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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