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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람은 심장이 없어” 인간성 회복 꿈꾼 고레에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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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8호 19면

오동진의 시네마 역사

괴물(2023). [사진 각 영화사]

괴물(2023). [사진 각 영화사]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2022년작 ‘브로커’는 공개 단계에서 엄청난 화제를 모았다. 일본의 거장 감독이 한국의 스타 송강호·강동원·아이유 등과 합작했기 때문이다. 자본도 한국이 댔다. 그러나 막상 영화가 개봉된 후 사람들은 크게 실망했다. 일각에선 ‘고레에다가 서서히 끝을 보이는 게 아닌가’라는 얘기가 나왔을 정도다. 그만큼 ‘브로커’는 망작이었다. 아이를 유괴한 두 남자와 그 아이를 베이비 박스에 버렸던 여자의 우연한 동행기. 영화는 희비극을 오가지만 한국 사회를 뿌리 깊숙이까지 알지 못하는 한 이국인의 시선이 전체 서사를 다소 인공적으로, 무엇보다 무리하게 끌고 나간 흔적을 지우지 못했다.

순수한 이념적 지향 지닌 영상 예술가

아무리 거장이라도 자신이 잘 하는 이야기가 있고 익숙지 못한 테마가 있다. 고레에다 감독도 복잡한 한국사회가 지닌 2중·3중 모순의 실타래를 한 번에 풀 재간은 없다. 그보다 그는 아이들의 시선, 아이들의 문제를 다루는 데 일가견이 있다. 아니 탁월하다. 아이들 얘기는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가족의 문제로 이어진다. 보폭을 더 넓히면 사회 전체의 이슈로 휘감아 갈 수 있다. 최근 국내 개봉이 이루어진 ‘괴물’이 바로 그렇게 작은 강에서 큰 강으로 흐른 작품이다. 학교에서 이상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 5학년 아들 미나토가 사실은 선생으로부터 학대(체벌)를 받았으며 그래서 영혼이 다쳤다고 생각하는 엄마 사오리와 해당 교사 호리 선생의 충돌, 무엇보다 학교 당국의 방관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보여 준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학교 교장(다나카 유코)의 태도인데 그녀는 시종일관 눈을 내리깔고 기계적으로 “저희가 실수가 있었다면 이를 잘 파악해 조치를 마련하겠습니다” 같은 사과 아닌 사과를 반복한다. 이는 “저희의 잘못을 인정합니다”와는 아주 다른 맥락의 문장이다. 즉, 법리적으로 피해갈 요량의 의도가 있을 때 쓰는 문어 투의 문구다. 교사들로 구성된 조사위원회는 호리 선생에게 “저의 팔꿈치와 아이의 코가 만나는 일이 있었다”는 식으로 얘기하라고 공식 답변을 준비시킨다. 그러다 결국 교장은 해당 교사를 전체 학부모 간담회에서 사과하게 한다. 진짜 그가 잘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도, 아이 엄마의 계속되는 항의가 무서워서도 아니다. 그녀가 두려워하는 대상은 교육위원회의 평점이다. 한국 사회나 일본 사회나 공공 교육기관은 주무부처의 평가에 따라 공공 지원금에 대한 인허가가 결정된다. 교장은 호리에게 ‘선생이 학교를 살리는 것’이라며 전체를 위해 개인이 희생해 달라고 말한다. 일본 공교육 사회에 강고하게 남아 있는 전체주의의 잔재이다.

어느 가족(2018). [사진 각 영화사]

어느 가족(2018). [사진 각 영화사]

한 영화감독의 필모그래피를 통해 그 나라 사회의 흐름을 지켜보거나, 지난 20~30년 혹은 30~40년의 현대사를 파악한다는 것은 다소 무리한 이야기일 수 있다. 그러나 종종 한 감독이 만드는 일련의 영화들은 잘만 해석하면 그걸 가능케 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이번 영화 ‘괴물’은 그의 전작이자 네 번째 작품으로 2004년 칸영화제에서 당시 유소년이었던 배우 야기라 유야에게 남우주연상을 안겨줬던 ‘아무도 모른다’의 후속작 같은 느낌이다. 또 이 둘의 변형판 영화가 바로 2018년 칸에서 황금종려상(최우수 작품상)을 받은 ‘어느 가족’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 정도로 이들 세 영화에는 관통하는 어떤 정서가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눈에는 일본 사회 내 흐르는, 청산하지 못한 군 국주의 정서, 따라서 아직도 잔존해 있는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이 극단적인 관료주의와 가혹한 각자도생의 이기주의를 만들어 내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들은 매몰찰 만큼 타인의 일에 무관심하며 이것은 기형적으로 발달해 온 일본 자본주의 사회의 결과물이라고 그는 생각하는 것 같다.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바로 그런 일본 사회의 극단적 개인주의를 드러낸 일종의 고발 르포르타주였다.

다른 남자들에게서 다섯 아이를 낳은 여자가 아이들을 버린 채 떠나고, 열네 살짜리 장남이 나머지 동생들을 돌보며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다들 출생신고도 하지 않은 상태여서 학교도 가지 않는다. 일본 사회에서 아예 존재가 없는 아이들이다. 넷째는 출산 후 얼마 안 돼서 죽었고, 엄마가 버리고 간 막내는 두 살 때 동네 꼬마 애들의 이지메로 죽는다. 장남 아키라는 아이들의 장난스런 폭행으로 사망한 두 살배기 동생을 잡목 숲 어딘 가에 묻어서 유기한다. 영화는 이들이 엄마로부터, 아니 일본 사회로부터 철저히 방치된 6개월간의 기록이다. 제목 ‘아무도 모른다’처럼 아무도 몰랐다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알고 싶지 않았거나, 아무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한 얘기이다. 현대사회가 디스토피아로 변질돼 가고 있는 건 이런 사회적 무관심에 기인하고 있음을 영화는 통절한 심정으로 그려 나간다.

송강호·강동원 출연 ‘브로커’는 망작

아무도 모른다(2004). [사진 각 영화사]

아무도 모른다(2004). [사진 각 영화사]

원제가 ‘만비키 가족’ 그러니까 비속어로 ‘쓰리꾼 가족’인, 영화 ‘어느 가족’은 언뜻 보기에 가난하지만 나름 단란하고 행복한 대가족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데서 충격을 준 작품이다. 엄마와 아버지, 할아버지, 고모, 두 아이들 모두 일종의 유사(類似) 가족, 곧 사이비 가족이다. 혈연이 아니라 길에서 우연히 만났거나 필요에 의해서 상부상조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모두 홈리스이거나 소매치기, 윤락녀 출신이다. 아이들은 쉽게 말해 유기된 애들이거나 방치된 애들이다.

이들 가족은 어느 날 빈 집에서 울고 있(다고 생각되)는 여자 아이를 데려다 키우려 한다. 아이에게는 누군가에게 묶여 있었거나 매 맞은 상처가 있다. 가족 모두는 어린 여자 아이를 데려와 귀여워하며 지극정성으로 대한다. 고모는 창녀인 셈이지만 마치 막달라 마리아처럼 순결한 영혼으로 아이를 대한다. 할머니는 그지없이 다정하다. 아빠는 비록 아들에게 도둑질을 가르치지만, 엄마는 그 결과로 생긴 돈으로 늘 정성스럽게 음식을 차려 새로 들인 아이를 먹여 키운다. 이들은 다들 착한 심성의 사람들이다. 하지만 바로 그 어린 소녀가 모든 사건의 발단이 된다. 이들 ‘어느 가족’은 곧 유괴범으로 몰리게 되고 가족이 가족이 아니었음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다.

한 여자 경찰은 엄마 노부요(안도 사쿠라)를 심문하며 반복해서 같은 질문을 한다. “아이가 당신을 뭐라고 불렀나요?” 이때의 대답은 법리상 매우 중요하다. 이는 곧 아이가 당신을 친엄마라고 생각했느냐는 것이다. 노부요는 아이가 ‘당연히!’ 자신을 엄마라고 불렀다며, 그럼 자기가 엄마가 아니면 무엇이냐고 되물으며 하염없이, 그리고 점점 더 철철, 눈물을 흘린다. 이 장면은 영화 ‘어느 가족’ 중에서 가장 가슴 아픈 장면이며 또 다른 한편으로 가장 분노가 이는 장면이다. 국가와 사회, 커뮤니티는 버려지거나 학대받는 아이들, 소외된 저지대의 사람들, 노인들을 돌보지 않는다. 특히 일본 사회가 그렇다고 고레에다는 생각한다. 일본 사회는 전쟁 후 급격히 고도로 성장하면서 더욱 더 급속하게 인간성을 잃었다는 것이 영화 ‘어느 가족’을 통해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하려고 했던 얘기이다. 그런데 이는 일본 사회만의 얘기는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그 기이한 보편성이 영화 ‘어느 가족’을 두고 전 세계가 격감(激感), 곧 격렬하게 공감했던 이유이다.

씨네파일

씨네파일

결국 고레에다의 메시지는 현대사회가 인간성을 상실했으며 인간주의의 회복이야말로 좌파나 우파 이데올로기에 앞서는 새로운 ‘이즘’이라는 것에 모아진다. 그래서 그는 종종 따뜻한 가족주의에 입각한, 극히 사(私)소설적인 작은 영화를 만들어 호평을 받곤 한다. ‘걸어도 걸어도(2009)’가 그랬고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2011)’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 ‘태풍이 지나가고(2016)’가 그랬다. 한국 여배우 배두나를 캐스팅해서 만든 ‘공기인형’은 섹스돌로 만들어진 노조미가 사람과 같은 감정과 사랑을 느끼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결국 비극적 살인사건으로 귀결되는 이 기구한 스토리 중간쯤, 공원에서 만난 한 노인이 노조미를 옆에 두고, 그녀가 사실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른 채 이렇게 혼잣말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요즘 사람들에겐 심장이 없어 심장이.” 하지만 정작 공기인형 노조미에게는 심장이 있다. 따뜻한 마음이 있는 것이다.

1962년생인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27년간 방송 프로덕션 PD로 일하다 그 중간쯤인 30대 중반 1995년에 ‘환상의 빛’으로 영화감독이 됐다. 그는 자서전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에서 ‘영화에 대해서는 늘 망설여 왔고 나 스스로 순수한 영화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라고 적었다. 고레에다가 순수한 영화인이 아닐 수는 있다. 그러나 어쩌면 가장 순수한 이념적 지향을 지닌 영상 예술가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의 영화들을 보고 있으면 일본 사회의 처절한 상황만 보이는 것이 아니다. 그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우리가 어떤 사고와 사유, 사회철학의 방향을 가져가야 하는지를 알게 해 준다. 사회엔 늘 정신적 지도자 같은 존재가 필요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들이 그렇다. 일본 사회가 그나마 유지되고 있는 이유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ohdjin11@naver.com 연합뉴스·YTN에서 기자 생활을 했고  이후 영화주간지 ‘FILM2.0’ 창간, ‘씨네버스’ 편집장을 역임했다.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컨텐츠필름마켓 위원장을 지냈다. 『사랑은 혁명처럼 혁명은 영화처럼』 등 평론서와  에세이 『영화, 그곳에 가고 싶다』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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