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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이 입수한 종이 한 장 독일 암호문, 세계사를 바꿨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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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8호 27면

[제3전선, 정보전쟁] 1차 세계대전 ‘치머만 전보 사건’

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한 ‘치머만 전보 사건’은 종이 한 장 분량의 정보가 거대한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사건으로 역사에 기록된다. 그래서 정보기관과 정보력의 중요성을 언급할 때 흔히 인용되기도 한다. 역사적 의미에 가려 간과되는 경향이 있지만, 치머만 사건은 정보사(情報史)적 관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영국이 감청을 통해 정보를 수집한 기법은 당시로서는 과학기술을 이용한 최첨단 방법으로, 인간에 의존하던 기존의 정보수집 방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과학정보 방법을 개척한 것으로 평가된다. 당시 전황을 되짚어 보면서 이 사건을 살펴보다 보면 그 중요성과 현대적 의미가 더욱 생생하게 다가온다.

미국 내 독일 비판여론에 기름 부어

독일이 미국 워스턴 유니온 민간통신사를 통해 주 멕시코 대사에게 보낸 암호전문 원문. [사진 미국의회도서관]

독일이 미국 워스턴 유니온 민간통신사를 통해 주 멕시코 대사에게 보낸 암호전문 원문. [사진 미국의회도서관]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충돌로 촉발된 제1차 세계대전 초반 독일은 벨기에와 프랑스를 조기 함락시켜 전쟁을 빨리 끝낸다며 속전속결로 나갔다. 그러나 연합국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장기전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특히 화학무기가 동원되고 지루한 참호전이 전개되면서 인명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인도적 참상이 눈 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한편 전황이 팽팽해지면서 중립국을 자기 진영으로 끌어들이려는 외교전도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가 주축이 된 동맹국은 오스만제국과 불가리아를 끌어들였고, 영국·프랑스·러시아가 주축인 연합국에는 이태리·그리스·루마니아·일본이 가세했다. 복잡한 세력균형이 얽히고 설켜 세계대전으로 비화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미국은 여전히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 전쟁의 승패는 미국의 선택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미국의 입장이 중요해졌다. 영국은 미국의 참전을 이끌어내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했고, 독일은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미국의 연합국 참전을 막으려 했다. 미국은 요지부동이었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전쟁에서 미국을 구한 대통령”이라는 캐치프레이즈로 1916년 대통령 선거에 임할 정도로 중립유지 입장이 확고했다.

지루한 공방전은 1917년 비로소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해 1월 16일 영국 해군의 암호해독부서인 ‘제40호실’이 전쟁을 끝낼 만한 중요한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바로 독일 외교장관 치머만이 주(駐) 멕시코 독일대사에게 보낸 외교전문이었다. 내용은 믿기 어려울 만큼 놀라왔다. 미국이 계속 중립을 지키도록 외교 노력을 경주하되, 여의치 않을 경우 미국과 멕시코간 전쟁을 일으켜 미국이 본토를 떠나지 못하도록 하라는 지시였다. 미국 턱밑의 멕시코를 이용해 미국의 발목을 묶어두려는 속내였다. 치머만이 주 멕시코 대사에게 내린 훈령은 이랬다. 첫째, 미국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계속 중립을 유지하도록 모든 외교적 노력을 전개할 것. 둘째, 만약 이 노력이 실패할 경우 멕시코가 미국을 침공하여 전쟁을 일으키도록 제안할 것. 셋째, 멕시코가 미국에 대해 전쟁을 일으키는 대가로 1846년 미국·멕시코 전쟁 당시 멕시코가 미국에게 빼앗긴 뉴멕시코, 애리조나, 텍사스를 되돌려 준다고 약속할 것. 넷째, 일본과 연합하는 방안도 적극 고려할 것 등이다.

1차 대전 당시 아르투르 치머만 독일 외무장관. [사진 미국의회도서관]

1차 대전 당시 아르투르 치머만 독일 외무장관. [사진 미국의회도서관]

이 정보를 보고받은 영국 지도부도 놀랐다.  동시에 영국 지도부는 쾌재를 불렀다. 미국 국민들을 자극할 수 있는 핵폭탄급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공개하면 참전을 꺼리던 윌슨 대통령과 의회도 어쩔 수 없이 생각을 돌릴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영국 지도부는 2가지 고민때문에 주춤했다. 무엇보다 미국이 이 정보에 대해 ‘미국의 참전을 유인하기 위한 영국의 허위정보’라고 오해한다면 오히려 심각한 역풍을 맞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또한 독일이 도청당한 사실도 모르게 해야 했다. 전쟁이 계속중인 만큼 비밀정보 출처를 반드시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다. 영국 정보당국은 지혜를 짜냈다. 우선 치머만 전문은 40호실의 감청을 통해 입수한 것이 아니라, 미국 웨스턴 유니온(Western Union) 통신사 직원을 매수해 입수한 것으로 위장했다. 당시 독일 외교전문은 주 워싱턴 독일 대사관이 미국의 민간 통신사를 경유해 주 멕시코 대사에게 전달하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이런 위장 작전이 가능했다.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이 독일 통신선을 대부분 파괴했기 때문에 독일은 위험을 무릅쓰고 민간 통신사의 암호통신을 이용해 온 것이다.

치밀한 준비를 마친 영국은 독일의 속내가 담긴 암호문을 미국에 전달했다. 이를 본 미국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윌슨 대통령은 독일의 이중적 태도에 격분했다. 외교적으로는 평화제스처를 취하면서도 미국의 영토 문제까지 건드리는 독일을 좌시할 수 없었다. 윌슨은 1917년 2월 27일 치머만 전보내용을 언론에 공개해 버렸다. 이를 본 미국 국민들도 분개했다. 독일의 계략은 미국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며, ‘독일은 미국의 적’이라는 여론이 들끓었다. 중립여론이 참전여론으로 급반전했다. 이에 미국 의회는 4월 6일 독일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 윌슨 대통령도 참전 선언에서 “정의가 평화보다 더 소중하다”는 말로 자신의 입장변경을 정당화했다. 물론 미국의 참전은 전적으로 치머만 전보사건 때문인 것은 아니었다. 1915년 5월 7일 독일 잠수함이 영국 여객선 루시타니아호를 침몰시켰을 때 미국 국민 128명이 사망했다. 또한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인해 미국 상선이 위협받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로 인해 미국내 독일 비판여론이 조금씩 싹트고 있었다. 치머만 전보사건은 이 같은 여론 변화에 기름을 부었다. 드디어 참전을 결정한 미국은 독일의 마지막 공세인 1918년 춘계 공세를 막고, 연합국의 마지막 공세인 ‘100일 공격작전’에서 큰 공을 세우면서 1차 대전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과학기술 활용 신호정보 시대 열어

치머만 전보가 공개된 후 미국 신문 만평(독일이 뉴멕시코, 텍사스 등을 칼로 도려내는 모습을 풍자). [사진 미국의회도서관]

치머만 전보가 공개된 후 미국 신문 만평(독일이 뉴멕시코, 텍사스 등을 칼로 도려내는 모습을 풍자). [사진 미국의회도서관]

전시 정보활동의 기본책무는 전쟁승리를 지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치머만 정보는 연합국의 1차 대전 승리뿐만 아니라, 세계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치머만 정보를 계기로 1차 대전에 참전한 미국은 경제대국에서 군사대국으로 발돋움하게 되었고, 세계정치의 중심무대를 미국으로 옮기는 중요한 발판도 마련했다. 결과적으로 치머만 정보는 북미의 미국을 세계의 미국으로 만드는 초석이 되었다. 결정적 정보 하나가 국가의 운명은 물론 세계사를 변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치머만 정보의 물리적 무게는 종이 한 장 정도에 불과하지만, 역사적 무게는 지구 무게와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정보사의 관점에서도 그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무엇보다 정보수집을 위한 평상시 노력은 외교적 노력만큼 중요하다는 교훈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영국이 치머만 전보를 가로챌 수 있었던 것은 수동적으로 앉아서 기다린 것이 아니라, 독일의 통신선을 전략적으로 파손시켜 암호전문을 영국이 의도한 통신선으로 보내도록 유인하는 등 능동적으로 움직인 결과다. 그 결과 외교노력으로 달성하지 못했던 미국의 참전을 이끌어 내는데 기여했다.

정보전쟁

정보전쟁

또한 과학기술을 이용한 신호정보의 새로운 시대를 연 것도 정보사에 남을 큰 발자취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40호실의 중요성을 절감한 영국은 1946년 신호정보 임무와 기능을 대폭 확대한 지금의 정부통신본부(GCHQ)를 만들었다. GCHQ는 미국의 국가안보국(NSA)과 함께 세계 양대 신호정보기관으로 꼽힐 정도로 정보력이 막강하다. 극비정보의 사용법과 관리법도 눈여겨 볼만하다. 영국은 수집한 정보가 차질없이 활용될 수 있도록 한 치의 실수도 없이 치밀하고 정치하게 관리했다. 정보의 수집·분석·판단 등 기본 메카니즘은 물론 정보를 어떻게 수집할지, 수집한 정보를 어떻게 활용할지 등 정보의 기획에서부터 사용전략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소홀한 곳이 없었다. 100여년전 치머만 전보사건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또 다른 교훈이다.

최성규 고려대 연구교수. 국가정보원에서 장기간 근무하며 국제안보 분야에 종사했다. 퇴직 후 국내 최초로 비밀 정보활동의 법적 규범을 규명한 논문으로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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