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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인욱의 문화재전쟁

한·중·일 3국의 세계유산 경쟁…숫자 불리기 의미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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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명암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전 국토가 박물관이라는 말처럼 유적이 많은 우리나라다. 그중에서도 유네스코 지정 세계유산은 각별하다. 1978년 도입된 세계유산은 45년밖에 되지 않은 짧은 역사에도 주목도가 매우 높다. 우리도 그렇다. 문화재청과 각 지자체에 담당 부서가 설치됐고, 또 매년 국민적 이슈가 되기도 한다. 세계유산은 어떻게 태동했을까. 또 우리는 왜 세계유산에 관심을 갖게 됐을까.

2023년 현재 전 세계 1199개 등재

유네스코 세계유산은 크게 문화유산과 자연유산, 그리고 둘이 합쳐진 복합유산으로 나뉜다. 이중 문화유산이 흔히 세계유산으로 불린다. 2023년 현재 전 세계적으로 1199개가 지정됐다. 명실상부한 유네스코의 대표 사업이다.

나일강 상류의 고대 이집트 유적인 아부 심벨 사원. [연합뉴스, 중앙포토, 사진 강인욱, 중도종합보고서, 위키피디아]

나일강 상류의 고대 이집트 유적인 아부 심벨 사원. [연합뉴스, 중앙포토, 사진 강인욱, 중도종합보고서, 위키피디아]

본래 세계유산은 각국이 자국의 문화를 자랑하는 차원이 아니다. 국적을 넘어 세계가 함께 문화유산을 지키자는 뜻에서 시작됐다. 출발점은 고대 문명 발상지인 이집트 나일강 유역이었다. 나일강은 예로부터 이집트인의 젖줄이었다. 지금도 이집트 인구의 97%가 나일강 주변에 몰려 살고 있다.

경제력 커진 1990년대 이후 심화
동북아 외교분쟁의 씨앗 되기도

중국은 국가 차원서 총력전 태세
고구려 유적 놓고 북한과 충돌도

군함도·사도광산 등 일본의 공세
과거 행적 지우려는 ‘선택적 기억’

문제는 고질적인 물 부족이다. 이집트는 이를 해결하려고 1950년대 아스완댐 건설 계획을 수립했다. 그런데 아부심벨 같은 세계적인 유적이 수몰될 위기에 처했다. 한국을 포함한 50여 개국이 국제 모금에 나섰고, 서방에서 기술을 지원해 아부심벨 사원 이전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이 사업의 성공 직후 경제개발로 소멸 위기에 놓인 문화유산에 대한 국제적 공동 대처가 발의됐다. 이집트는 나폴레옹의 침략 이래 근대 이후 서구 열강의 문화재 약탈과 파괴가 가장 심한 곳이었다.

중국 두 번째로 많아, 이탈리아 최다

중국 네이멍구 얼다오징즈 유적과 그 밑을 지나가는 고속도로. [연합뉴스, 중앙포토, 사진 강인욱, 중도종합보고서, 위키피디아]

중국 네이멍구 얼다오징즈 유적과 그 밑을 지나가는 고속도로. [연합뉴스, 중앙포토, 사진 강인욱, 중도종합보고서, 위키피디아]

세계유산이 가장 많은 지정된 곳은 서유럽이다. 지금도 세계유산의 절반이 좁은 서유럽에 몰려있다. 심지어 서유럽에서는 경제활동에 제약이 많으니 세계유산에서 해제해 달라는 청원이 제기될 정도다. 이런 편중 현상은 세계유산목록에 올리려면 수많은 행정 절차와 지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저개발국의 경우 인력과 재정이 충분하지 않아 세계유산 등재에 소극적이었다.

유럽 중심의 세계유산 제도에 변화가 일어난 것은 1990년대부터다. 경제성장을 이룬 동아시아 각국이 경쟁에 뛰어들면서다. 가장 적극적인 나라는 중국이다. 현재 등재 유적이 57개로, 최다국인 이탈리아(59개) 다음이다. 중국은 문화유산이 매우 풍부하며 등재 및 심사 과정을 국가가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엄청난 예산을 투입하기에 등재 가능성 또한 높은 편이다. 한국은 현재 16개가 목록에 올라 있다. 1995년 석굴암과 불국사가 선정되면서 경쟁에 뛰어들었고, 지금도 매년 여러 지자체에서 열심히 뛰고 있다.

강제징용의 역사 지워버린 일본

일본이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올린 ‘군함도’(공식 명칭 하시마 탄광) 전경. 일본은 조선인 강제노역을 표기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연합뉴스, 중앙포토, 사진 강인욱, 중도종합보고서, 위키피디아]

일본이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올린 ‘군함도’(공식 명칭 하시마 탄광) 전경. 일본은 조선인 강제노역을 표기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연합뉴스, 중앙포토, 사진 강인욱, 중도종합보고서, 위키피디아]

세계유산이 국제적인 관심을 끌면서 외교 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2004년 고구려사를 둘러싼 한국과 중국의 갈등이 좋은 사례다. 고구려를 중국사로 편입하려는 중국이 세계유산 제도를 이용하여 고구려 고분과 성터를 중국만의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 했다. 결국 북한의 강력한 항의로 중국과 북한이 따로 등재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2017년에는 요르단강 서쪽의 헤브론 구시가지가 팔레스타인의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자 이를 항의하여 유네스코 최대 지원국인 미국과 이스라엘이 유네스코를 탈퇴한 적도 있다.

위에서 내려다본 군함도 모습. [연합뉴스, 중앙포토, 사진 강인욱, 중도종합보고서, 위키피디아]

위에서 내려다본 군함도 모습. [연합뉴스, 중앙포토, 사진 강인욱, 중도종합보고서, 위키피디아]

일본은 세계유산을 통해 부끄러운 과거를 지우고 ‘선택적인 기억’을 합리화하고자 한다. 2015년에 크게 논란이 됐던 소위 ‘군함도’로 더 유명한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이 그랬다. 유네스코는 군함도가 일본 근대화의 세계적 상징성을 공인받기 위해서는 그 과정에서 자행된 잘못된 역사도 모두 표기해야 한다고 결의했다. 일본이 감추고 싶어하는 강제징용 문제를 명기하는 것을 조건으로 등재시켰다. 하지만 일본은 강제징용 부분을 보란 듯이 삭제하여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일본이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 중인 사도 광산. 조선인 근로자가 최소 1400명 동원된 것으로 추정된다. [연합뉴스, 중앙포토, 사진 강인욱, 중도종합보고서, 위키피디아]

일본이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 중인 사도 광산. 조선인 근로자가 최소 1400명 동원된 것으로 추정된다. [연합뉴스, 중앙포토, 사진 강인욱, 중도종합보고서, 위키피디아]

일본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2022년에도 사가현의 대표적인 금광 유적인 사도광산의 신청서를 올리면서 조선인의 강제노동을 삭제하여 또다시 논쟁을 일으켰다. 일본은 또 유네스코 기록유산에서도 ‘가미카제 자살특공대 유서’의 등재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가미카제에 희생된 개인에게 큰 비극이라는 점이 표면적이 이유지만, 궁극적으로 전범국으로서의 역사를 숨기려는 의도다. 만약 일본의 의도가 성공한다면 유대인 수용소에서 근무하던 독일 나치 병사의 일기도 등재 후보에 올릴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최근 들어 각국의 지나친 정치색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취지가 뿌리에서부터 흔들릴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숫자 늘어나며 관광 효과도 줄어

팔레스타인 헤브론 구시가지. 2017년 세계유산에 선정되자 미국과 이스라엘이 유네스코에서 탈퇴했다. [연합뉴스, 중앙 포토, 사진 강인욱, 중도종합보고서, 위키피디아]

팔레스타인 헤브론 구시가지. 2017년 세계유산에 선정되자 미국과 이스라엘이 유네스코에서 탈퇴했다. [연합뉴스, 중앙 포토, 사진 강인욱, 중도종합보고서, 위키피디아]

한국에서도 최근 세계유산 등재를 향한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 각종 선거 때마다 빠지지 않는 공약으로 등장한다. 경쟁이 치열해지며 최근에는 단일 유적이 아니라 여러 유적을 함께 지정하는 경향이 강해지며 우리 주변에서 세계유산을 보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됐다. 예컨대 백제유산지구의 경우 서울·부여·공주·익산 등지가 함께 선정됐다. 가야나 서원도 마찬가지여서 넓은 지역에 고루 널리 퍼져 있다. 이런 경향은 중국도 마찬가지여서 때로는 시가지 전체를 한 번에 선정되기도 한다. 중국 베이징은 이미 7개나 등재됐음에도 베이징구시가지(北京中軸線, Beijing Central Axis)의 내년 등재를 준비하고 있다.

우리 지자체들이 세계유산 경쟁에 뛰어든 가장 큰 이유는 관광 자원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하지만 주변에서 마주치는 세계유산이 많아지면서 그 희소성도 줄고 있다. 이제는 세계유산 등재 자체에 목적을 두기보다 해당 유산을 유지·관리할 비용과 효과를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세계유산의 경쟁 이면에는 문화유산 파괴라는 문제도 여전히 남아있다. 신축 고층 아파트에 가린 김포 장릉과 같이 이미 지정된 세계유산이 법정 다툼으로 번진 경우도 있다. 경제개발에 따른 문화재 훼손 논란도 이어지고 있다. 예컨대 춘천 중도 레고랜드 부지의 경우 청동기시대 집터 1300여 기와 고인돌 150여 기가 발견되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선사시대 유적이자 남한 최대의 유적이었다. 하지만 유적 발굴이 종료되자, 그 위에 레고랜드 놀이시설이 들어섰다.

춘천 중도 유적에 들어선 레고랜드

레고 랜드가 들어선 춘천 중도 유적지. 청동기 시대 주거지만 1300기가 넘는 것으로 조사됐다. [연합뉴스, 중앙포토, 사진 강인욱, 중도종합보고서, 위키피디아]

레고 랜드가 들어선 춘천 중도 유적지. 청동기 시대 주거지만 1300기가 넘는 것으로 조사됐다. [연합뉴스, 중앙포토, 사진 강인욱, 중도종합보고서, 위키피디아]

반면 비슷한 규모의 일본 도호쿠에 위치한 산나이마루야마 유적은 2021년에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한국의 청동기시대에 필적할 만한 규슈의 요시노가리 야요이문화 유적도 개발 대신에 유적공원을 만들어 세계적인 고고학 명소로 자리 잡았다.

최근 경제개발에 매진하는 중국도 유적 보호에는 매우 엄격한 편이다. 2008년에는 만주 서쪽 랴오허 상류의 대표적인 청동기시대인 샤자덴(夏家店) 하층문화에 속하는 ‘얼다오징즈(二道井子)’라는 성터 유적이 고속도로 건설 중에 발견됐다. 이 유적 주변에서 이미 수백개의 비슷한 성터가 발견된 적이 있어 유적을 발굴하고 공사를 계속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중도 레고랜드의 4분의 1밖에 안 되는 얼다오징즈 유적을 보존하기 위해 유적 밑으로 터널을 뚫어서 고속도로를 냈다. 중국과 비교해도 우리의 현실이 초라할 뿐이다. 사정이 이러니 “중국에서 지안의 고구려 고분을 발굴하고 그 위에 놀이동산을 짓는다고 해도 우리는 할 말이 없다”라는 자탄이 나올 지경이다.

세계유산의 진정한 의미는?

유네스코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설립된 교육과 문화를 위한 국제기구다. 유네스코의 가장 성공적인 사업으로 세계유산이 꼽힌다. 21세기에 들어서도 세계유산에 대한 관심은 높아지고 있지만, 정작 원래 취지는 희미해지고 정치적으로 악용되기는 경우가 늘고 있다. 문화재와 개발 사이의 갈등도 여전히 들끓고 있다.

이제는 우리도 되돌아볼 때가 되었다. 세계유산의 숫자를 각국의 문화수준이라고 생각하고 등재 자체에만 에너지를 쏟으려 하는 것은 아닌가. 세계유산의 진정한 의미, 그리고 한국이 세계 문화유산 보호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을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할 때가 온 것 같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