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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형석의 100년 산책

꽉 막힌 한국 정치, 실용주의로 넘어서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모든 선진국은 냉전 시대의 유산인 좌우의 정치적 갈등을 극복했다. 진보와 보수로 탈바꿈하면서 공존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도 그런 국가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가 친북과 친중국 정치를 택하면서, 진보는 열린 사회에 역행해 진보의 본령을 버리고 폐쇄적인 좌파로 퇴락했다. 보수는 미래지향적인 다원 사회를 외면하고 닫힌 극우로 변했다. 그 결과가 오늘과 같은 후진국의 고충을 재연하고 있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치인이 기대하는 이념적 방향으로서의 중도는 불가능하나, 실용주의 방향과 방법은 많은 민주국가가 지향하고 있다. 시진핑 이전의 공산 중국까지도 경제적으로는 실용주의 노선을 택했다. 쥐를 잡는 고양이가 되어야 한다는 정책이다.

영국 공리주의 발전시킨 철학
‘이념보다 사실’ 미국에서 꽃펴

흑백논리, 진영대립의 반대말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이 핵심

개인과 사회의 성장·발전 꾀해
궁극적 목표는 자유와 인간애

의회민주주의와 대통령제 병존

김지윤 기자

김지윤 기자

실용주의(Pragmatism)는 어떤 철학인가. 관념주의 철학을 존중하는 독일과 유럽 대륙의 정치·경제·철학과 상치되는 앵글로색슨 경험주의 철학의 유산이다. 사회적 현실에서 소망스러운 목표를 창출 발전하고 그 이상을 현실화하는 방법이다. 마르크스 공산주의 사상과 정반대되는 사상이다. 정치·경제 외의 정신문화 영역에서는 독일적인 관념주의가 우월할 수 있으나 정치 경제 같은 역사 사회적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영국을 비롯한 현실적 실용가치가 지난 200여 년을 이끌어 온 것이 사실이다.

문예부흥 이후 서구사회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사회과학 분야였다. 도시화 급증, 경제적 생산소비의 급진 현상이 최대 과제가 되었다. 산업혁명이 그것이다. 그때 경험주의 전통을 계승한 영국이 직면한 가장 중요한 사회적 과제는 ‘어떻게 가장 많은 사람이 가장 큰 행복을 찾아 누릴 수 있는가?’였다. 휴머니즘을 계승한 윤리관에서 유래한 사상이다. 우리는 그 철학을 공리주의(Utilitarianism)로 번역해 왔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의 과제였다. 영국은 그 철학을 창안, 현실화하였다. 정치에서는 ‘의회민주주의’ 이상이 없으므로 ‘민주주의’ 정치 기반을 정착시켰다. 지금은 그 민주주의를 반대하는 이데올로기는 없다. 경제의 공리성에도 유일한 방법은 불가능하나, 복지정책의 기본정신은 모두가 수용하고 있다.

이런 공리주의 철학을 이어받은 미국이 그 사상의 구현 방법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다가 탄생한 것이 실용주의 철학이다. 내가 20세기 중반에 미국 대학들을 접해보면서 미국은 이미 영국의 공리주의 정신을 배경 삼은 실용주의 사상과 철학의 길을 개척·발전시키고 있다는 인상을 어디서나 느꼈다.

실용주의 철학이란 무엇인가. 서구 철학자들은 ‘열매 많은 것이 진리’라는 정신으로 대변한다. 정치 경제와 같은 사회문제에서 휴머니즘의 열매, 즉 많은 사람의 인간다운 삶의 가치구현이라는 뜻이다. 그 철학적 결실이 아메리카의 사상적 국시(國是)가 되었다. 그 방법을 정치에 적응시킨 하나의 방도가 대통령 병행제였다. 행정적 결과를 높이기 위해서는 의회민주주의와 함께 대통령 중심 행정이 선도한다는 정치 방법이다. 우리도 그 제도를 택했다. 지금은 총리 제도도 그와 같은 방향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방법론이다. 그 핵심 정신이 ‘대화를 통한 개선’의 방법이다. 주어진 이념에  몰입하는 혁명을 배제하고 폭력에 의한 개혁을 반대한다. 의견과 주장이 다른 개인과 사회집단이 A와 B의 대립을 더 미래지향적인 C라는 객관적 가치를, 대화를 통해 인출하고 C의 현실이 지속하는 동안에 또 다른 D라는 대립 현실에 봉착할 때는 다시 대화를 통해 C도 D도 아닌 E의 객관적 가치를 승화시켜 가는 방법과 방향이다.

여러 사회 문제가 발생하면 무엇보다 사실에서 진실을 찾고, 그 진실에 근거해 더 높은 객관적 가치를 창출하는 사회과학적 방법이다. 거기에서는 흑백논리가 배제된다. 절대적 가치나 유일한 진리 등은 허용되지 않는다. 더 다양한 미래지향적 가치를 찾아 다수에게 소망스러운 결과를 창출 제공하는 병증적 방법이다. 공산주의는 혁명을 택하고 프랑스와 독일은 토론과 이념 갈등을 앞세웠으나 아메리카는 대화에서 개선의 길을 택했다.

미국 대학과 유럽 대학의 차이

그 선결 과제는 ‘대화 교육’의 창출이다. 유럽 대학에서는 교수의 강의가 중심이지만 미국 대학은 문제를 제기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대화와 토론 방법을 택했다. 중고등학교는 물론 대화 교육의 필요성을 초등학교 때부터 키워준다. 대화를 반대 거부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규정한다. 내가 유럽식 강의를 하다가 미국 대학에서 발견한 차이점이었다. 교수가 결론을 제시하고 선생이 자기 지식을 가르치고 설명하는 방법을 넘어 학생 스스로가 객관적 결론을 찾아내도록 유도하는 교육이다.

우리 국회에서 보는 것 같은 폭력적 발언, 투쟁적 자세는 민주주의에 역행할 뿐 아니라 소통과 이해, 공존의 기회와 장(場)까지 스스로 포기할 뿐이다. 대화가 없으면 토론과 투쟁을 통한 개혁이 되고, 그 방법까지 한계에 이르면 혁명의 최후 수단이 된다. 대화는 사회 모순과 질환을 사전 예방하는 방법이다. 선입관이나 고정관념에 따르는 독선과 감정, 이해관계를 위한 투쟁을 최소화한다.

그 궁극적인 목적은 정의·자유·인간애의 완성이다. 더 많은 사람이 자유와 평등을 누리며 인간다운 삶과 그 가치를 찾아 성장 발전해 가는 가능성과 희망 창출을 실현하는 길이다. 그 핵심이 되는 것이 선한 윤리적 가치를 위한 공동체 의식이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