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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장덕진의 퍼스펙티브

여의도 탈당·신당 러시…여야 극단의 정치 비추는 거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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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내년 총선 앞두고 혼란스러운 정치권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리셋 코리아 운영위원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리셋 코리아 운영위원

오는 12일부터 22대 총선 예비후보자 등록이 시작된다. 출마를 준비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총선은 이미 시작된 셈이다. 총선이 가까워지면 으레 제3지대 신당 이야기가 나오곤 하지만, 이번에는 좀 유별난 구석이 있다. 탈당 혹은 신당을 들먹거리는 정치인이 많고도 다양하고, 여야를 막론하고 전직 당 대표나 국회의장급 인사의 탈당과 창당이 관심거리이기도 하다.

다양한 형태의 ‘합종연횡’ 쏟아져

더불어민주당의 경우 5선의 이상민 의원이 이미 탈당했고, 이원욱·조응천·윤영찬 의원 등을 비롯해 비명계 의원들의 추가 탈당도 충분히 예상해볼 수 있는 상황이다. 이상민 의원은 만약 6선에 성공한다면 국회의장 1순위이다. 불과 3년 전까지 당 대표였던 이낙연 전 총리는 강성 당원들의 출당 요구에 대해 “몰아내면 받아야지”라며 탈당과 신당 창당의 가능성을 짙게 내비쳤다. 돌 하나라도 들겠다는 조국 전 법무장관은 본인의 출마 의지가 확고할 뿐 아니라 신당 창당을 준비 중이라는 것이 정설이고, 돈 봉투 사건의 중심인 송영길 전 대표도 아예 ‘윤석열퇴진당’이라는 당명까지 내놓으며 창당을 예고했다.

이상민 탈당, 이준석 신당 움직임 등 요동치는 정치 지형도
시효 끝난 진보와 보수 이념대립 속 ‘중간지대’의 실종 방증
강성 팬덤에 기대는 ‘이재명 민주당’은 ‘트럼프 공화당’ 닮아
국민의힘과 윤석열 정부는 민생 살릴 새로운 담론 제시 못해

이상민

이상민

그런가 하면 국민의힘에서는 이준석 전 대표의 신당이 최대의 관심사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창당 준비위를 꾸리더라도 실제 창당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힘을 얻었는데, 최근에는 실제로 창당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일찌감치 민주당을 탈당하고 지난 대선 때는 잠시나마 윤석열 후보를 돕기도 했던 금태섭 전 의원의 ‘새로운 선택’은 이미 창당을 마쳤다. 상대적으로 주목도는 덜하지만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의 개혁연합신당, 정의당이 추진한다는 선거 연합 정당도 있다.

여기에 다양한 합종연횡 가능성도 더해진다. 양당을 오가며 대통령을 만들어낸 김종인 박사는 이준석-금태섭 연대를 중재하는 모양새이고, 이낙연 전 총리는 민주당 출신의 정세균·김부겸 두 전직 총리와 연쇄 회동해서 이른바 ‘3총리 연대설’이 불거졌으며, 송영길 전 대표는 비록 일방적일망정 이준석 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을 시사하는가 하면 이낙연-금태섭 회동도 이루어졌다.

선거제 개편 둘러싼 복잡한 셈법

용혜인

용혜인

신당의 성공 가능성을 결정할 선거제 개편의 향방은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국민의힘은 병립형으로의 회귀에 기울었고, 최근 이재명 대표도 대선 공약을 깨고 “멋있게 지면 무슨 소용”이냐며 병립형을 시사했다. 만약 준연동형을 유지한다 하더라도 양대 정당이 위성정당을 포기할 것이냐 말 것이냐라는 변수가 또 기다리고 있다. 다양한 탈당과 신당 창당 가능성에 합종연횡이 더해지고 여기에 선거제 개편까지 더해지니 그 복잡한 셈법을 따라가기가 어지러울 지경이다.

국내 상황이 워낙 복잡하니 잠시 눈을 다른 나라로 돌려보자. 우리가 아는 외국의 유명 정치인 중에도 탈당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은 많다. 정당 문화가 우리보다 훨씬 더 깊이 뿌리내린 나라들에서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26대 대통령인 테어도어 루스벨트는 3선 도전을 위한 후보지명에 실패하자 공화당을 탈당해서 진보당을 창당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가 벌인 이 소동으로 많은 진보성향 유권자들이 떠났고, 공화당을 보수 정당으로 고착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루스벨트·레이건·처칠의 당적 변경

이낙연

이낙연

공화당 출신의 대통령이자 신자유주의의 집행자였던 로널드 레이건은 원래 민주당원이자,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과 뉴딜 정책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할리우드 배우 노조 위원장이었다. 1962년 공화당으로 당적을 옮기면서 “나는 민주당을 떠나지 않았다. 당이 나를 떠났을 뿐”이라는 명언을 남겼고, 18년 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가장 놀라운 변신은 아마 힐러리 클린턴일 것이다. 그는 학생 시절 열렬한 공화당원이었다. 1964년 대선에서는 공화당의 배리 골드워터 후보를 위해 카우걸 복장을 하고 ‘골드워터 걸’로 활동했고, 공화당 웰즐리 대학 지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빌 클린턴을 만나 사랑에 빠졌을 무렵 민주당으로 당적을 옮겼고, 20년 후 민주당 대통령 부인을 거쳐 다시 20년 후 민주당 대선후보가 되었다.

윈스턴 처칠은 당적을 세 번이나 옮겼다. 보수당에서 자유당으로, 자유당에서 무소속으로, 그리고 20년 후에 다시 보수당으로 돌아와서 총리가 되었다. 명언 제조기답게 배신자의 복귀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향해 “누구나 배신할 수 있지만 두 번 배신하는 건 아무나 못 한다”고 일갈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극단의 부스러기 노리는 위성정당

이준석

이준석

탈당과 창당이 이어지는 것은 중도가 비어 있다는 뜻이다. 위성정당은 양극단의 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려는 시도이지만 탈당을 거쳐 제3지대 신당을 창당하는 것은 중도에 큰 공간이 비어있음을 시사한다. 정치학의 고전 이론 중 하나인 중위투표론은 유권자들이 좌에서 우까지 정규분포를 이룬다고 가정한다. 극좌나 극우로 갈수록 유권자의 수는 줄어들고 중도에 가장 많은 유권자가 몰려있다는 가정이다.

선거가 다가오면 당연히 정당들은 중도적인 정책으로 선회한다. 중도가 비어있다는 것은 중위투표론의 가정과는 달리 양대 정당이 중도로 옮기지 않고 있다는 뜻이 된다. 외국의 사례 중 현재 민주당의 상황에 가장 가까운 것은 도널드 트럼프 지지를 거부한 공화당 의원들일 것이다. 2016년 트럼프가 공화당 대선후보로 지명됐을 때 다수의 공화당 의원들은 그를 지지하기를 거부했고, 일부는 힐러리 클린턴 지지를 선언하기까지 했다.

‘트럼프 2기’를 노리고 내년 대선 경선 참여를 선언한 현재 상황도 비슷하다. 트럼프의 공화당과 이재명의 민주당은 이념적인 내용만 탈색하고 보면 수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정치의 상식을 벗어난 강렬한 지도자와 강성 지지층, 그리고 사법 리스크 같은 것이다. 이재명 대표가 ‘내 분신 같은 사람’이라고 했던 김용 전 민주연구원 부원장이 정치자금 6억원 수수혐의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된 마당에, 이 대표는 강성 지지층이 더욱 절실해질 것이고 그가 총선을 지휘하는 한 민주당이 중도로 회귀할 가능성은 아마 없을 것이다.

정책 경쟁 대신 정당 경쟁만 남아

며칠 전 또 한 명의 전직 민주당 대표인 손학규 동아시아미래재단 고문이 “당 전체가 사법 리스크의 올가미에 엮여있는 데 대해 책임 의식을 가지라”고 주문한 것은 이런 상황을 정확히 지적한 것이다. 단식을 통해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성사시킨 바 있고 지금은 정계를 떠나 개인적 이해관계도 없는 손 전 대표의 지적은 울림을 준다.

국민의힘이 중도를 비워놓고 있는 것에 대한 설명도 외국 사례에 대한 연구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미국 의회 연구의 권위자인 키이스 풀은 2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탈당하고 당적을 옮긴 적이 있는 상하원 의원들의 본회의 투표를 분석한 연구를 내놓았다. 그에 따르면 탈당을 추동하고 의회의 정상적 작동을 방해하는 것은 이념적 양극화라는 시대 배경과 ‘제2의 차원’이 사라진다는 정책 실종이다.

전통적으로 미국 의회의 입법 경쟁에는 두 개의 차원이 있었다. 제1의 차원은 양당 체제에서 당연히 존재하는 정당 간 경쟁이다. 이것은 민주주의에서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제2의 차원은 남북전쟁 이후 지속하여온, 인종적 분리를 포함하는 지역분할이다. 그런데 제2의 차원이 가지는 중요성이 점차 사라지면서 정쟁만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책 경쟁이 사라진 정당 간 경쟁은 그냥 정쟁일 뿐이다.

힘을 잃은 산업화·민주화 담론

인종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 한국 정치에서 제2의 차원은 무엇일까. 한국 현대사의 두 축은 산업화와 민주화이고, 그 모든 것의 출발점에 안보가 있었다. 안보와 산업화가 보수의 담론이고 민주화가 진보의 담론이었다면, 한 번도 빈곤을 경험한 적 없는 유권자가 다수인 오늘날 보수 담론의 차별성은 사라졌다. 진보의 민주화 담론도 힘을 잃어가고 있지만 학생운동 출신이 야당 지도부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데서 보듯이 그들은 아직도 현역이다. 검찰독재와 군부독재를 등치시키려는 시도는 민주화 담론의 유효기간을 연장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의힘과 윤석열 정부는 기존의 보수담론을 대체할 새로운 ‘제2의 차원’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종류는 바뀌었지만 민생의 어려움은 여전히 존재하는데, 다수 국민이 공감하고 기꺼이 동참할 ‘제2의 차원’이 없다. 그러니 진보냐 보수냐만 따지는 정쟁의 차원 한 가지에만 매몰될 수밖에 없고, 상대가 좌로 가면 우로 갈 수밖에 없다. 오늘날 탈당과 창당 러시는 이 빈 공간에서 자라나고 있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리셋 코리아 운영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