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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원영 스님의 마음 읽기

마음의 김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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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원영 스님 청룡암 주지

원영 스님 청룡암 주지

어느 스님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고 돌아오는 참이었다. 찬바람이 세게 불었다. 엄습해 오는 칼바람에 서 있기도 힘든 오후, 다리가 잠깐 좀 쉬어가자 보챈다. 내가 지쳤다고 느껴서일까. 아니면 숨 돌리지 않고 급하게 걷다가 성난 바람에 휘청거리며 멈춰서일까. 그도 아니면 생을 달리한 지인들을 떠올려서일까. 어느덧 모든 존재가 잠시 쉬거나 서서히 정지해가는 느낌이다. 겨울이란 계절은 이렇듯 몸을 더 작게 만들어 움츠리게 하고 숨죽이게 하는가 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다. 달력 한 장만을 남겨둔 지금도 마음에 찌꺼기를 남기지 않기 위해 동안거(冬安居) 수행에 들어간 이들이 있으니 말이다. 알다시피 동안거는 스님들이 겨울철 석 달 동안 한 곳에 모여 정진하는 수행 기간을 말한다. 음력으로 10월 보름부터 이듬해 정월 보름까지, 가는 해와 오는 해가 교차하면서 결제와 해제가 이루어진다.

스님들은 지금 동안거에 정진
모든 일에는 준비와 성찰 필요
이웃과 나눌 ‘마음곳간’ 채웠나

마음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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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철을 잘 보내기 위해 스님들은 동안거 결제에 들어가기 전 많은 준비를 한다. 옛날에는 겨우내 먹을 양식과 땔감을 준비하고?김장을 해두고, 혹독한 겨울바람을 막으려 문틈과 창틈을 막아 단단히 대비한 뒤 정진을 시작했다. 지금도 뭐 크게 다르진 않다. 사찰의 대부분이 오래된 목조건물이기 때문에, 으레 문풍지를 바르고 김장을 담그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해둔 뒤에야 각각의 소임을 정하고 비로소 수행에 돌입한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 모든 것에 준비가 필요한 듯하다. 계절로 치면, 여름에는 폭염이나 폭우, 태풍에 대비하기 위해 미리 시설물을 점검하고, 가을에는 농작물을 거두는 한편 이듬해 봄에 뿌릴 씨앗 마련을 잊지 않는다. 겨울에는 앞서 말한 것처럼 기나긴 추위와 갑작스러운 폭설에도 잘 견디기 위해 미리미리 챙겨둔다. 준비가 미흡하면 할수록 춥고 황량한 겨울을 보내야 함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인생의 나이대로 보면, 어려서는 더 좋은 학교에 가기 위해 입시를 준비하고 성장해서는 취업을 준비한다. 결혼하거나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도 나름의 계획이 필요하다. 영적 스승인 틱낫한 스님은 『틱낫한 마음』이란 책에서 결혼하기 전 1년 동안 자신의 내면을 깊이 관찰하라고 말한다. 자신에게 긍정적인 씨앗이 부실하다면 그 씨앗이 튼튼해지도록 물을 흠뻑 주는 법을 배우고, 부정적인 씨앗의 힘이 세다면 그 씨앗을 변화시키는 법, 즉 부정의 씨앗에 물을 주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가라고 일러주었다.

그리고 결혼한 뒤 가족을 꾸리기 위해서도 1년 동안 준비 기간을 가지는 게 좋다고 권한다. 예비 엄마·아빠의 말과 생각과 행동이 아기의 심성에 평화와 행복, 기쁨의 씨앗을 심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가시 돋친 말, 책망하는 눈빛, 쌀쌀맞은 행동으로 해로운 씨앗을 심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고 보니 정식으로 출가자(비구·비구니)가 되는 일에도 최소 4~5년은 걸린다. 그 사이에 일생 출가자로서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지 확인하는 점검과 시험, 교육과정이 즐비하다. 아니, 그리 긴 과정까지 말할 것도 없겠다. 출가 자체만 해도 삭발할 때까지 마음을 다잡는 시간이 필요하다. 출가하여 중생회향을 잘하며 살 수 있을 것인가,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지난한 시간을 견딜 수 있을 것인가, 결국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자아성찰의 시간, 즉 ‘마음의 김장’을 하는 것 같은 시간이 각자에게 필요하다.

또한 우리에게 남은 생의 마무리에도 각별한 준비가 있어야 할 것이다. 도연명은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지나간 과거는 탓해봤자 소용없지만, 다가올 미래는 바른길로 갈 수 있음을 알게 됐다(悟已往之不諫 知來者之可追)’고 했다. 세상에 과오 없는 인간이란 없지만, 앞으로를 생각하면 자신의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이끌어주는 구절이다. 어떤 형태로 찾아올지 모를 생의 마지막을 향해 가며, 그 무엇보다 마음의 김장이 필요한 건지도 모른다.

문득 오래전에 TV에서 봤던 ‘배추도사 무도사’란 만화영화의 한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세 가지 보물’ 편에서 돌아가신 갑부 아버지의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첫째와 둘째가 합심하여 막내를 쫓아내지만, 맘씨 착한 막내는 어느 절 스님에게 받은 물건 세 가지로 부자가 된다. 이를 알게 된 첫째와 둘째가 더 큰 부자가 되기 위해 곳간을 열어 마을 사람들에게 다 나눠준 후 그 절을 찾아갔다. 하지만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뒤였고 그들은 빈털터리로 전락하게 된다. 다행히 막내의 용서로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다.

김장도 결국엔 준비이자 나눔이다. 나 혼자 겨울을 잘 나기 위함이 아니라 함께 잘 이겨내려는 마음이 중요한 것이다. 지금 내가 선 자리에서 미래를 위한 마음의 김장이 다 되었다면, 이제는 이웃과 나눌 곳간은 채워져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어떨까.

원영 스님·청룡암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