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조세래의 명품 바둑소설 ‘승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경제 07면

승부 1,2권

승부 1,2권

조세래(1957~2013)의 소설 『승부』(문예춘추사)는 진짜 바둑소설이다. 1·2권 800쪽이 넘는 분량인데 너무 재미있어 단숨에 읽었다. 수많은 고수와 수많은 승부가 등장하고 그 묘사가 가슴을 저밀 만큼 실감 나게 다가온다.

이야기는 조선 말기 여목이란 고수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원세개와의 인연으로 그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그곳의 고수들을 하나하나 격파한다. 조선 마지막 순장바둑의 대가였으며 바둑을 도(道)로 승화시킨 불세출의 명인으로 중국 땅에 짙은 족적을 남긴다. 원세개는 불후의 명반이라 할 벽송(碧松·벽송이 제작한 바둑판)을 여목에게 넘긴다.

조선이 일본에 병합되자 여목은 국내에 돌아와 도장을 차리고 후학을 양성한다. 설숙과 추평사가 그의 뛰어난 제자다. 명문가 출신 설숙은 문하생 중에서도 발군의 기재와 추상같은 기개를 갖춘 존재로 여목의 적통을 이어받는다. 적통의 상징이라 할 벽송도 설숙에게 넘어간다.

추평사는 설숙과 전혀 다른 삶을 산다. 일본 기사들을 혼내주다가 파문을 당하고 떠돌이 내기꾼의 고단한 여정으로 들어선다. 추평사는 당시 내기바둑 천국이었던 일본으로 건너가 내기꾼들은 물론 전문기사까지 수많은 고수들을 추풍낙엽으로 꺾어버린다. 하나 징용공으로 끌려가 심신이 피폐해진 추평사, 술만 마시며 몸을 학대하여 바둑 실력도 평범해지고 만 그가 우여곡절 끝에 일본 내기바둑계 최고의 승부사로 꼽히는 존재와 건곤일척의 승부바둑을 둔다.

추평사가 자신의 전부를 건 생명을 쥐어짜는 그 승부가 가슴을 울린다. 작가 조세래를 처음 만난 건 정지영 감독의 영화 ‘남부군’ 때였다. 시사회를 갔다가 조세래 조감독을 알게 됐다. 그는 바둑을 소재로 한 시나리오를 썼고 그걸 영화로 만들고 싶어했다. 이 시나리오는 훗날 영화 ‘스톤’(2014년)이 됐다.

소설 『승부』를 보면 당시 기원의 풍경이 참으로 사실적으로 묘사된다. 내기꾼들, 속칭 독립군들, 야통기원, 꼰, 사기바둑, 호구, 치수 숨기기 등 어둡지만 우스꽝스럽고 잔잔하게 페이소스가 흐르는 기원의 뒷모습이 참으로 적나라해서 숨을 삼키게 된다. 조세래는 바둑의 상당한 고수였을 것이다. 본인이 기원에서 직접 독립군(전주 없는 내기꾼) 생활을 해 봤을까. 아마도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이름 없는 야생화들의 이야기, 회한에 가득 찬 인생을 살다가 낙엽처럼 스러지는 군상들의 이야기에 더 많은 애정을 쏟아붓는다. 검증된 고수보다는 추평사 같은 자신만의 행마를 찾아 끝없이 헤매고 다니는 숨은 고수가 그의 로망인 것이다.

추평사로 돌아가면, 그는 생의 마지막 불길을 태워 최후의 내기바둑에서 이겼지만 몸도 함께 재가 되어 필연적으로 죽음을 맞게 된다.

설숙의 뒤는 정명운이 잇고 추평사의 뒤는 추동삼이 잇는다. 추평사가 설숙에게 아들을 맡기고 떠난 뒤 정명운과 추동삼의 긴 인연이 이어진다. 세월이 흘러 정명운은 국수 10연패를 이룬 당대 최고수가 되고 추동삼은 기원을 전전하며 내기바둑을 두다가 어디론가 훌쩍 사라지는 방랑기객이 된다. 당연히 벽송은 정명운에게 넘어갔지만 설숙은 죽음에 임하여 자신의 관에 추동삼의 기보를 함께 묻어달라고 한다. 추동삼이야 말로 자신의 최고의 제자임을 인정한 것이다.

승부란 무엇인가. 작가 조세래는 이 질문에 골몰했던 것 같다. 작가가 대국수 여목의 적통이라 할 수 있는 설숙보다 떠돌이 기객이자 내기꾼이라 할 수 있는 추평사를 조선 제일의 국수로 높이고 국수 정명운보다 야통기원을 전전하며 시장판에서 소주를 기울이는 추동삼의 경지를 더 높게 본 대목에서도 그의 고심은 묻어난다.

조세래의 소설 『승부』는 바둑에 관한 많은 것을 담고 있다. 바둑의 이치에 대해서 깊이 탐색하고 바둑의 뒤안길에 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많은 지식을 토해 놓는다. 사람들이 이 책을 꼭 읽어봤으면 좋겠다.

작가는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자꾸 그와 바둑을 한판 두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박치문 바둑칼럼니스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