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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혁의 한반도평화워치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발전이냐 퇴행이냐 갈림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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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이혁 전 베트남 대사·리셋 코리아 자문위원

이혁 전 베트남 대사·리셋 코리아 자문위원

미·중 경쟁이 체제·군사·경제·산업기술·문화 등 다양한 방면에서 전개되고 있다. 이 모든 경쟁의 근저에는 체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지난 11월 샌프란시스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독재자라고 지칭한 것은 자유민주주의 진영 리더로서 미국의 강한 자부심과 책임감을 드러낸 것이다.

2021년 미얀마 군사 쿠데타, 2020년 이후 8개 중서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이어진 군사 쿠데타, 전 세계에서 진행되는 권위주의 통치 행태 심화 등 2000년대 중반 이후 진행된 민주주의의 후퇴는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국익보다 당파 이익부터 추구
진영대립, 포퓰리즘 두드러져
정치에 종속된 외교도 큰 문제
통합 정치가 동북아 평화 불러

한반도평화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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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혼란과 분열, 정책 결정의 지연, 선거에서 이기기 위한 포퓰리즘의 만연 등 민주주의가 치러야 하는 비용으로 인해 국민의 삶이 개선되지 못한 데 대한 불만이 강한 지도자를 갈구하게 해 권위주의 토양을 비옥하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미국도 ‘결함 있는 민주주의’에 속해

이러한 배경에서 세계가 자유민주주의로 귀결될 것으로 본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예측은 빗나간 것으로 평가되는 분위기다. 그러나 그는 러시아의 푸틴과 중국의 시진핑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권력이 1인에게 집중됨으로써 생기는 저급한 정책 결정이 때로는 재앙적 결과를 초래하며, 공개 논의나 토론의 결여는 지도자에 대한 낮은 지지로 이어져 한순간에 권력이 무너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세계가 지향해야 할 체제는 어디까지나 자유민주주의라고 주장한다.

반면 중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될 수 없으며, 이념이나 체제는 각 나라의 토양에 맞아야 한다는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의 주장은 후쿠야마의 주장과 대비된다.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는 2022년 국가별 민주주의 지수를 발표했다. 평가 기준은 선거 절차와 다원주의, 정부 기능, 정치 참여, 정치문화, 시민적 자유 등 5개 항목이다. 이를 성숙한 민주주의가 24개국, 결함 있는 민주주의가 48개국, 혼합체제가 36개국, 권위주의가 59개국이었다.

싱가포르는 70위에 올라 결함 있는 민주주의에 속하지만 1인당 GDP는 한국(3만2255달러)의 두 배가 넘는 8만2808달러로, 세계 5위이다. 중국은 156위로 최하위권이지만 세계 제2의 경제 대국이다.

민주주의 선도국인 미국이 30위로서 결함 있는 민주주의 국가에 포함된다는 사실은 민주주의가 얼마나 시대 상황에 취약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동아시아에서 한국은 24위, 일본은 16위, 대만은 10위로서 모두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에 속한다.

한국 정치, 역동적이나 혼란스러워

한·일의 민주주의 지수를 항목별로 비교하면 한국은 선거 절차와 다원주의(한국 9.58, 일본 9.17), 정치 참여(한국 7.22, 일본 6.67)에서 일본을 앞섰다. 일본은 정치문화(일본 8.13, 한국 6.25)에서 한국을 크게 앞서고 시민적 자유(일본 9.12, 한국 8.53)에서도 우위에 있었다. 정부 기능은 한·일 모두 8.57로 같았다.

이런 결과는 일본 정치는 덜 역동적이지만 안정되어 있고, 한국 정치는 역동적이지만 혼란스럽다는 것을 보여 준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일본은 권력을 일단 믿어주고 따르는 데서, 한국은 권력을 불신하고 저항하는 데서 출발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정치문화 분야에서 한국이 일본에 크게 뒤진다는 사실은 아프게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다. 일본 정치의 여러 결점에도 불구하고 한국보다 분열과 포퓰리즘의 정도가 덜한 것은 강점이라고 본다.

이코노미스트의 평가가 절대적인 건 아니지만 한국 민주주의는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군의 최하위에 있다. 이는 한국 민주주의가 더 높은 발전이냐, 아니면 결함 있는 민주주의 국가로 전락하느냐의 갈림길에 있다고 걸 의미한다. 실제 한국의 정치 상황을 보면 수긍이 간다.

특히 대만이 과거의 혼란스러운 정치문화에서 벗어나 이제는 아시아에서 가장 모범적인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평가받고 있다는 현실을 성찰하면서 우리의 정치 발전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가지는 게 필요하다.

민주주의가 국민의 삶과 국익의 증진이 아니라 정파적 이익을 위해 남용된다면 결국 민주주의 자체도 크게 손상된다. 특히 역대 정부에서 외교가 상도를 벗어나서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한 도구가 되었던 사례가 적지 않다.

자유민주주의는 가장 덜 나쁜 제도

자유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것은 의회(입법부)만의 책임이 아니라 행정부·사법부·경제계·언론·학계, 그리고 국민 전체의 집단적 책무이다. 국익과 국민의 삶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통합 지향의 정치가 절실히 요구된다. 이는 부존자원이 없고 안보 상황이 취약한 한국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다.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는 세계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짧은 기간에 선진 경제와 민주주의를 달성한 드문 나라로서 수많은 국가의 롤 모델이 되어 왔다. 한국이 피땀 흘려 쟁취한 자유민주주의를 더욱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야말로 세계적 민주주의 확산에 공헌하는 길이다. 또 한국 민주주의 발전이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담보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것도 명백하다.

플라톤은 민주주의가 중우정치로 빠질 위험성이 크기  때문에 현자가 통치하는 철인정치가 가장 이상적인 형태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국은 이미 자유민주주의 이외에는 선택지가 없는 나라가 되었다. 한국은 자유민주주의가 처칠이 말한 가장 덜 나쁜 정치제도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잠재력과 소명을 가진 나라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 각계각층의 실천 의지이다.

이혁 전 베트남 대사·리셋 코리아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