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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정탁의 인문지리기행

산도 깎는 물의 글씨, 고통 속에 피어난 달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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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해남 대흥사 침계루 현판

김정탁 노장사상가

김정탁 노장사상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마주한 현판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전남 해남 대흥사의 침계루(枕溪樓)다. 침계루는 ‘계곡(溪)을 베개 삼는(枕) 누각’이란 뜻인데 사찰 건물 이름치고는 특이해도 이름은 주위 환경과 잘 어울린다. 누각이 울창한 숲에 드리운 계곡과 나란히 위치해 마치 계곡을 베개 삼는 것처럼 보여 침계란 이름에 딱 부합한다. 이름만 그런 게 아니다. 글씨도 인상적이어서 바위 사이를 굽이굽이 흐르는 계곡의 물처럼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그래서 침계루 글씨를 보고 있으면 생각이 맑아져 계곡의 깊은 물처럼 마음도 담박해진다.

조선 명필 이광사의 자취 그대로
끊이지 않고 흐르는 계곡물 같아

역적 집안 몰려 23년간 귀양살이
변방·외딴섬 떠돌며 예술혼 닦아

만물과 다투지 않는 ‘물의 경지’
활활 타올라 재만 남은 마음인가

포부 한번 펴지 못한 명문가 자제

전남 해남 대흥사 침계루 현판. 조선 명필 원교 이광사의 글씨다. 끊이지 않고 흐르는 물을 닮았다. [사진 남수]

전남 해남 대흥사 침계루 현판. 조선 명필 원교 이광사의 글씨다. 끊이지 않고 흐르는 물을 닮았다. [사진 남수]

이 글씨를 쓴 사람은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1705~1777)다. 그는 조선 숙종 31년에 태어나 정조 1년에 죽었으니 추사(秋史) 김정희보다 한세대 먼저 살다 간 사람이다. 두 사람 모두 당대를 대표한 서예가였어도 삶은 대조적이었다. 추사는 영조가 끔찍이 사랑한 화순옹주 시댁 쪽 직계후손에다 영조비 정순왕후 집안이어서 제주도에 귀양 가기 전까진 온갖 호사를 다 누렸다. 이에 반해 원교는 포부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한 채 불우한 삶을 살다 갔다. 조선의 명망 있는 집안의 능력 있는 선비 중에서 원교처럼 불우하게 살다 간 사람을 찾기도 쉽지 않다. 그렇지만 그는 불우했을 뿐 불행하진 않았다. 침계루 글씨가 이를 잘 증명해준다.

침계루 현판이 걸려 있는 대흥사 입구의 누각. [사진 남수]

침계루 현판이 걸려 있는 대흥사 입구의 누각. [사진 남수]

원교 집안은 조선의 명문가 중 하나다. 그의 아버지는 예조판서를 지낸 이진검이고, 큰아버지는 숙종 때 장원 급제한 대사헌 이진유다. 할아버지는 호조참판을 지낸 이대성이고, 증조할아버지는 호조판서를 지낸 이경직이고, 작은 증조할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이경석이다. 이경석은 병자호란 때 조정의 모든 선비가 꺼린 삼전도 비문을 쓴 참다운 용기를 지녔던 선비다. 영의정 때는 대동법 주창자인 김육을 도와서 대동법이 확대 실시될 수 있도록 해 재상으로서 처신도 훌륭했다. 이런 집안의 내력에 비추어 보면 원교는 뼈대 있는 가문 출신임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원교가 평생 불우한 삶을 산 건 오로지 그의 집안이 속한 당파 때문이다. 그의 집안은 소론이었는데 그가 산 대부분의 기간 노론이 득세했다. 특히 소론과 노론은 숙종의 후사를 두고 치열하게 경쟁했는데, 소론은 장희빈의 아들 경종을 민 반면 노론은 무수리 출신의 아들 연잉군(영조)을 밀었다.

간난고초 끝에 완성한 ‘동국진체’

이광사가 쓴 대흥사 대웅보전 현판. 추사가 이 현판을 떼라고 했다가 다시 붙이라고 했다는 설이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사진 김정탁]

이광사가 쓴 대흥사 대웅보전 현판. 추사가 이 현판을 떼라고 했다가 다시 붙이라고 했다는 설이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사진 김정탁]

이런 상황에서 경종이 즉위해 소론이 빛을 발휘하는가 했더니 4년 만에 죽어서 영조가 왕위를 이어받아 노론이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다. 그러자 원교의 큰아버지는 역적으로 몰려서 죽고, 아버지는 강진에 유배되었다가 죽었다. 이때부터 원교에게는 역적 집안이란 꼬리표가 붙어 다니면서 삶의 희망도 사라졌다.

30년이란 세월이 흘러서 역적 집안의 꼬리표가 끊어질 만한 원교 나이 50세 때 더 큰 액운이 그를 덮쳤다. ‘형 경종을 죽이고 왕이 된 역적 영조’라는 벽보가 나주 객사에 걸렸는데 영문도 모른 채 이 사건에 휘말려서다. 당시 상당수 소론은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고 믿었기에 이런 벽보도 등장했다. 원교는 벽서 작성자 윤지의 아들 윤광철과 친해서 몇 차례 편지가 오간 게 발견돼 체포되었다. 그래서 체념하고 감옥에서 자결을 결심했는데 원교 아내가 남편이 처형됐다는 소문에 먼저 목을 매 죽었다. 이에 원교는 자신이 뛰어난 재주가 있으니 목숨만 살려달라고 빌어 사형은 면하고 함경도 부령에 유배되었다.

추사 김정희가 이광사의 대웅보전 현판을 떼어내고 대신 써주었다는 설이 있는 무량수각 현판. [사진 남수]

추사 김정희가 이광사의 대웅보전 현판을 떼어내고 대신 써주었다는 설이 있는 무량수각 현판. [사진 남수]

다산(茶山) 정약용은 강진에서 19년 귀양살이한 거로 유명하지만, 원교는 추운 변방과 외딴 섬을 오가며 23년이나 귀양살이했다. 그리고 완도군 신지도에서 삶을 마감해 사면을 받지 못한 채 죄인 신분으로 죽었다. 이런 간난고초 속에서도 원교는 서예 이론서인 『서결(書訣)』과 『필결(筆訣)』을 남기고, 자신의 필체인 원교체를 완성했다. 원교체를 가리켜 동국진체(東國眞體)라 부르는데, 이 체는 중국 서체의 틀에서 벗어나 조선화한 글씨다. 이 점이 중국 서체의 영향을 받은 추사체와 결을 달리한다.

서예는 직선과 곡선으로 이루어진 예술이라 할 수 있다. 원교가 곡선에서 예술혼을 발휘했다면 추사는 직선에서 예술성을 뽐냈다. 그래선지 남도의 유명한 절에서 원교가 쓴 현판을 자주 만날 수 있다. 해남 대흥사, 강진 백련사, 고창 선운사, 구례 천은사가 그러하다. 서울 봉원사의 대웅전 현판도 원교가 썼는데 영조와 대립각을 세운 소론 출신인 그가 영조가 왕찰로 삼은 봉원사 대법당 현판 글씨를 썼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추사는 왜 이광사를 비판했나

대흥사에 나란히 걸려 있는 이광사의 대웅보전 현판(오른쪽)과 추사의 무량수각 현판. [사진 김정탁]

대흥사에 나란히 걸려 있는 이광사의 대웅보전 현판(오른쪽)과 추사의 무량수각 현판. [사진 김정탁]

한편 원교 글씨는 추사에 의해 평가절하된 면이 크다. 추사는 청나라의 신문물을 배워 원교와 다른 필법으로 명필 반열에 올랐다. 그러니 원교가 국내파라면 추사는 해외파인 셈이다. 그런데 추사는 원교를 마땅치 않게 봐 “세상이 원교의 필명에 미혹돼 금과옥조처럼 떠받드는데 분수에 넘치게 행동하며 망령됨을 헤아리지 못한 채 심한 말로 마구 떠든다. 천품이 남보다 뛰어나도 재주만 있고 배움이 없다”라며 그를 비난했다. 이런 비난이 금석학과 중국의 역대 필법을 연구한 추사에게 조선에 얽매인 원교 글씨가 촌스러워서인지 아니면 소론 원교를 명필이라 칭송하는 세상이 명문 노론 출신 추사에게 어이가 없어서인지 잘 모르겠다.

201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오른 한국의 산사(山寺) 중 하나인 대흥사 전경. [중앙포토]

201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오른 한국의 산사(山寺) 중 하나인 대흥사 전경. [중앙포토]

이런 얘기도 있다. 추사가 제주도 귀양길에 해남 대흥사에 들러서 초의 선사에게 조선의 글씨를 망쳐놓은 게 원교인데 그가 쓴 대웅보전(大雄寶殿) 현판을 어째서 걸어놓았는지 따지자 원교 글씨를 떼어내고 추사가 쓴 무량수각(無量壽閣) 글씨를 대신 달았다. 세월이 흘러서 추사가 유배에서 풀려나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러 일전에 원교 글씨를 떼라고 한 건 잘못된 일이니 대웅보전 현판을 다시 걸라고 했는데 이는 근거 없는 얘기다. 현재 대흥사에는 원교의 대웅보전과 추사의 무량수전 글씨가 옆으로 나란히 걸려 있다.

『도덕경』에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은데 물은 만물을 충분히 이롭게 하고, 만물과 다투지 않고, 많은 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머물러서다. 그래서 물의 덕을 지닌 사람은 머무는 게 땅의 기(氣)에 알맞고, 마음은 연못의 고요함에 알맞고,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건 어짊에 알맞고, 말은 신의에 알맞고, 정사를 펼치면 자연스러운 다스림에 알맞고, 일을 벌이면 능숙함에 알맞고, 움직이면 때에 알맞다. 여기서 다른 건 몰라도 머무는 게 땅의 기에 알맞고, 마음은 연못의 고요함에 알맞다는 표현은 원교가 평생 처신한 바와 부합한다. 그렇지 않고선 원교체가 세상에 나올 수 없다.

비무장지대에 외롭게 남은 묘소

전남 완도군 신지도에 있는 원교의 유배지. 최근 복원했는데 옛 느낌이 전혀 나지 않는다. [사진 김정탁]

전남 완도군 신지도에 있는 원교의 유배지. 최근 복원했는데 옛 느낌이 전혀 나지 않는다. [사진 김정탁]

그런데 원교의 침계루 글씨는 이런 차원을 크게 넘어선다. 삶을 달관해야 침계루 글씨처럼 물 흐르듯 써져서다. 『장자』 제물론에 ‘몸은 말라죽은 나무와 같고, 마음은 불 꺼진 재와 같다’라는 표현이 있다. 여기서 말라죽은 나무는 굶어서 배가 고픈 몸이고, 불 꺼진 재는 활활 타버린 마음이다. 이런 상태가 장자가 궁극적으로 목표로 하는 심재(心齋), 즉 마음을 가지런히 한 상태다.

그러니 심재 상태에 이르러야 침계루 같은 글씨가 써질 수 있는데 평생 고달팠던 원교의 삶이 이를 가능케 했다고 본다. 그의 호 원교도 ‘높이 뾰족하게 솟은 산(嶠)을 둥글게 하다(圓)’인데 이도 마음을 가지런히 해야 가능하다.

신지도에 있는 원교 흉상. [사진 김정탁]

신지도에 있는 원교 흉상. [사진 김정탁]

원교가 죽자 자식들은 부친의 시신을 남도 끝단인 신지도에서 선산이 있는 경기도 장단으로 옮겨와 자살로 삶을 먼저 마감한 어머니 류씨와 합장했다. 여기는 지금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 안이라 갈 수가 없다. 그러니 살아서도 유배지를 전전했던 원교가 죽어서도 유배지를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처량한 생각이 든다.

한편 원교의 장남 이긍익(李肯翊)은 아버지의 고초와 가족의 비극을 목격한 뒤 모든 걸 포기하고 역사서를 쓰는 일로 삶을 일관했다. 그래서 나온 게 명저 『연려실기술』이다. 원교체와 『연려실기술』을 통해서나마 이들 부자의 숨결이 느껴진다.

김정탁 노장사상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