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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달의 예술

열두 줄 가얏고, 공감을 노래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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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오희숙 음악학자·서울대 음대 교수

오희숙 음악학자·서울대 음대 교수

‘슬픔이 너무 커서 기가 막히면 넋을 놓고 히죽대며 웃는다더라.(…) 열두 줄 가얏고에 실어 흐느껴도 설움은 마디마디 더욱 에는 듯 피맺혀. 마침내 우륵은 노래하고 춤추었다.’

가야금 명인 우륵에 대한 김상훈 시인의 ‘우륵의 춤’을 읽고 받은 감흥을 작곡가 황의종(71)은 18현 가야금협주곡 ‘우륵의 춤’으로 풀었다. 지난달 19일 ‘아시아 금(琴) 교류회 창단 30주년 기념 연주회’(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가야금 명인 이재숙의 협연으로 연주된 이 곡은 부드러운 장구 리듬을 배경으로 잔잔하게 흐르는 선율과 다채로운 분위기 변화를 보이며, 가야금의 그윽한 세계로 청중을 이끌었다. 한국 전통 음계와 장단에 현대적 기법을 접목한 이 곡을 들으며 자신을 화려하게 부각하지 않는, 품격 있는 선율에 매료되었다.

아시아 금(琴)교류회 창단 30돌
한·중·일 전통 현악기 한자리에
민족 경계 넘어선 소리의 향연
전통 보존과 현대적 응용 빛나

‘아시아 금(琴) 교류회’ 창단 30주년 기념 연주회 모습. [사진 아시아 금 교류회]

‘아시아 금(琴) 교류회’ 창단 30주년 기념 연주회 모습. [사진 아시아 금 교류회]

이번 공연의 주인공 ‘아시아 금(琴) 교류회’(회장 이지영)는 1993년 창단한 단체다. 우리나라의 가야금·거문고 연주자를 중심으로 아시아 전역의 전통적 현악기를 연구하고, 연주자를 초청하여 교류 음악회를 개최하여 왔다. 우리나라에는 가야금과 거문고가 있다면, 일본에는 고토, 중국에는 고쟁, 몽골에는 야트, 베트남에는 단트란이 있다. 같은 현악기(금琴)이지만 각 나라의 특성에 따라 모양도 음색도 다른 악기들이 긴 전통을 이어가며 연주되었다. 이 단체에서는 이러한 아시아의 현악기 음악을 발굴하며, 아시아뿐 아니라 서구에서도 활발한 공연을 해왔다.

이날 30주년 기념 연주회에서는 한국·중국·일본 세 나라 전통 현악기의 다채로운 편성의 작품이 연주되었다. 한국의 대표적인 현악기 가야금과 거문고의 고유한 아름다움은 현악합주 ‘도드리’에서 펼쳐졌다. 이 단체의 초창기 멤버이기도 한 중견 연주자들이 들려준 이 곡에서는 단선율을 중심으로 흐르는 전통 음악의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중국의 현악기 고쟁으로 연주된 판웨이츠의 ‘경춘라창상곡(景春羅暢想曲)’은 작곡가가 직접 연주하였다. 중국의 전통적 선율을 주제로 한 변주곡으로 중국적 음계와 기교적인 바이브레이션이 전면에 드러났고, 극도로 몰입해서 연주하는 판웨이츠의 장인 정신이 돋보였다. 일본 현악기 고토와 한국의 가야금이 함께 한 사와이 히카루의 ‘꿈의 원’은 미니멀 음악을 연상시키는 현대적 감각이 두드러졌다. 음정의 미세한 변화와 재즈적인 즉흥성이 드러났고, 날카로운 금속성의 고토 선율이 18현 가야금과 25현 가야금과 화합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어 양승환의 거문고 중주곡 ‘명암’, 김성국의 25현 가야금과 현악 앙상블을 위한 ‘잔잔한 파동’에서는 전통적 사운드를 활용한 작곡가의 개성 있는 음악 세계를 만날 수 있었다.

이날 음악회의 하이라이트는 도널드 워맥(D Womack)의 고토·고쟁·가야금·거문고를 위한 협주곡 ‘7 월화수목금토일’이었다. 이번에 세계 초연된 이 작품은 동아시아의 문화적 전통인 오행(五行)을 주제로 한·중·일 세 나라의 현악기를 모두 활용하였는데, 미국 작곡가가 작곡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되었다. 월요일 ‘달빛 그림자’는 바람 소리를 연상시키는 음향으로 시작하여, 고토의 금속성 사운드가 부각되었고, 수요일 ‘녹고 있는 얼음’은 가야금의 우아한 선율로 시작하여 고토의 차가운 사운드를 대비시켰다. 금요일 ‘먼 종소리’에는 고쟁의 경쾌한 울림이 분위기를 주도했고, 토요일 ‘출렁이는 대지’에는 저음의 그윽한 거문고 사운드가 역동적으로 등장했다.

글로벌 시대를 맞이하여, 최근의 현대 음악은 각 나라의 민족적 경계를 넘어서 전 세계인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각 나라의 전통 음악에 대한 관심과 의미 역시 간과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시아 금 교류회’의 활동은 전통을 보존하는 동시에 현대적으로 변모하는 모습까지 보여주고 있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또한 동아시아 음악인의 교류 차원에서도 주목된다. 이번 주 초반 한·중·일 외무장관 회의가 열려 그간 긴장감이 감돌던 동아시아의 정치적 상황을 풀어가려는 모습을 보면서, 음악에서는 이러한 정치적 격변과는 무관하게 늘 묵묵히 예술적인 교류를 이어 나갔음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우륵이 가야금 하나로 혼란스러운 대가야를 통합하고자 한 것처럼, 음악은 나라 간의 갈등을 넘어서서 공감대를 형성하며 화합할 수 있는 장을 열어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번 겨울에는 고령에 있는 가얏고 마을에 가서 ‘악성’(樂聖)이라 칭해진 우륵의 음악 세계를 만나봐야겠다.

오희숙 음악학자·서울대 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