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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응교의 가장자리

중국 항저우를 적신 시인 정지용의 ‘향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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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지난 18일 중국 항저우사범대에서 시인 정지용을 기억하는 시 낭송회가 열렸다. 행사에 참여한 중국 대학생들이 정지용의 ‘석류’을 낭송하고 있다. [동영상 캡처]

지난 18일 중국 항저우사범대에서 시인 정지용을 기억하는 시 낭송회가 열렸다. 행사에 참여한 중국 대학생들이 정지용의 ‘석류’을 낭송하고 있다. [동영상 캡처]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

중공군 병사 한 명이 가족에게 전해달라며 유품을 상관에게 전한다. 소낙비마냥 쏟아지는 포화를 뚫고 병사는 토치카까지 기어간다. 기총 사격을 맞은 병사가 던진 수류탄에 토치카는 파괴된다. 중국 항저우 붉은 깃발이 오르면서, 인해전술로 뛰어가는 전쟁영화다. 지난 17일 중국 항저우의 한 호텔에서 본 영화다. 그때 나는 이튿날 항저우사범대에서 강연할 시인 정지용(1902~1950)의 자료를 검토하고 있었다.

중국의 40여개 대학생들 참여
한국어와 중국어로 각각 낭송
옥천시민 30여명 자리 함께해
위기의 한·중 잇는 따듯한 시심

1987년 서생이 처음 옥천을 찾아갔을 때 정지용이 살던 초가지붕 생가는 들녘에 외롭게 서 있었다. 1988년 시인이 해금되고, 처음 지용제를 하려고 할 때 월북자라는 잘못된 정보에 반대도 있었다고 한다. 옥천시민과 김승룡 전 문화원장은 지용제·학술제 등을 진행하며 옥천과 정지용 시인을 알려왔다. 정지용 생가와 문학관과 함께 오사카·교토·옌볜·항저우사범대에서 시 낭송회와 한글 글짓기 대회, 국제학술대회를 하며 정지용 문학을 적극적으로 알렸다.

2023년 11월, 함께 항저우로 가는 길에 유정현 현 옥천문화원장이 낮게 말한다. “옥천의 시민 문화를 위해 시민들과 토론하다 보면, 밤이 깊을 때도 많습니다. 시민들이 하는 30여 개의 프로그램을 문화원이 함께할 수 있어 기쁘지요.”

항저우 가는 길목에 상하이 임시정부 건물과 루쉰 기념관에도 견학한다. 루쉰 묘지 가까이에 윤봉길 의사가 거사했던 상하이 홍구공원이 있다. 루쉰이 몇 년간 교수로 있던 이 대학에서 매년 국내외 연구자들이 정지용 국제학술대회를 열어왔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시인 정지용

시인 정지용

중국 학생들은 거의 경극(京劇) 하듯이 정지용 시를 낭송한다. 시와 영상이 흐르는 대형 화면을 배경으로 중국인 남녀 두 학생이 ‘향수’를 중국어로 한 번 한국어로 한 번 낭송한다. 아들이 죽었을 때 정지용이 쓴 ‘유리창’은 제목만 읽어도 가슴이 울컥한다.

‘고흔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중국인 학생이 중국어로, 한국어로 낭송하는데 눈시울이 떨린다. 그 학생은 한국에 단기유학 왔다가, 현재 한국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처음 정지용 시 낭송회를 했을 때는 20여개 대학이었는데, 이제는 저장성·산둥성에 있는 40여개 대학 학생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항저우사범대 유춘희 교수가 전한 말이다. 유 교수는 항저우사범대에 ‘정지용 연구센터’를 세웠다. 도시샤대 코리아연구센터, 오사카 한국문화원, 그리고 항저우사범대에서 두 번, 나는 일본과 중국에서 전부 네 번을 정지용 강연을 했다.

이 행사에 매년 옥천시민 30명 정도가 함께 간다. 옥천군 시민 활동가, 군청 공무원, 교육계 인사, 군위원, 문화원 원장, 옥천군수 등이 한데 어울려 인사를 나누고, 옥천을 어떻게 새롭게 할지 3박 4일간 대화한다.

육영수 여사가 태어난 옥천에는 도처에 육 여사를 기념하는 비석이나 공간이 있다. 반대로 특정 신문을 반대하는 유명한 옥천신문사도 있다. 정치관이 다르기에 불편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외지인의 기우일 뿐, 옥천시민들은 정치적 갈등 이전에 ‘옥천’이란 이름으로 모인다. 민초끼리, 정치가끼리, 학자끼리 만나서는 절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다. 민초·정치가·학자들이 벽을 허물고 함께 힘써야 변화든 혁명이든 개벽이든 가능하다.

정지용을 잇는 예술인·시인·소설가들이 문단에서 소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사물놀이 김덕수 선생, 시인 류시화·김성규·유병록·송진권, 방송작가 천성일도 옥천 출신이다. 김묘순·김영미 같은 옥천의 정지용 연구자들은 귀중한 성과를 발표한다.

“옥천명예군민 제도를 실시하려고요. 지용화폐도 만들어 옥천군 골목을 살리고요. 지용제도 유행가만 부르는 축제가 아니라, 정지용 시를 노래로 만들어 부르고, 학술제와 문학제를 살리는 축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황규철 군수의 바람이다.

한·중 관계가 나빠지면서, 중국 대학 내에 한국어학부의 위상이 위축되고, 학생수도 준다고 걱정이다. K드라마와 영화는 은밀한 통로가 아니라면 더 이상 보기 어렵다. 중국 텔레비전에는 항일전 낡은 흑백영화와 한국전쟁 컬러영화가 밤새 방영되고 있다. 방송에서는 항전의 분노가 펼쳐질지 모르나, 정지용과 윤동주 시를 익히고 암송하고 시를 낭송하는 중국인 학생들 마음에는 따스한 시의 봄이 펼쳐질 것이다.

참, 옥천의 옥은 구슬 옥(玉)이 아니라, 기름진 옥(沃)이다. 한반도가 보이는 둔주봉, 물안개 신비한 산맥 부소담악, 일출의 용암사, 장령산 자연휴양림, 향수호수길로, 땅이 기름진 시냇물이 흐르는 ‘별똥 떨어진’ 옥천에서는 정지용 시를 닮은 순한 마음을 만날 수 있다.

김응교 시인, 숙명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