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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경록의 은퇴와 투자

인생 오후 ‘1에서 0으로’ 변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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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김경록 미래에셋자산운용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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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즈와 라헤(Holmes-Rahe)가 만든 스트레스 지수를 보면 상위 10위권에 있는 내용이 배우자 사망, 이혼, 별거, 가까운 친척의 죽음, 해고, 은퇴 등이다.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일까.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다. 1에서 0으로의 디지털적 변화다. 인생 오후가 그러하다. 자녀가 같이 있다가 출가하고, 부모님이 계시다가 안 계시고, 직장이 있다가 없어지고, 월급이 꼬박꼬박 들어오다가 뚝 끊기고, 배우자가 곁에 있다가 없게 된다.

더 본질적인 디지털적 변화가 있다. 인생 오후에는 사회가 보는 나의 가치가 갑자기 없어진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가치는 정년 퇴직을 하더라도 그대로다. 몸도 건강하고 전문성도 최고점에 와 있다. 하지만 사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60세를 넘기면 받아 주는 곳이 없고 일을 한다 하더라도 소득이 절반으로 떨어진다. 하는 일도 단순한 일이 맡겨진다. 사회가 보는 나의 가치가 급락하면서 내가 생각하는 나의 가치와 큰 갭이 생긴다.

퇴직과 함께 커지는 스트레스
친구·사회 관계망 급속히 위축
나만의 강점 발휘할 ‘1’ 키워야

은퇴와 투자. 취업 빙하기. [일러스트=김지윤]

은퇴와 투자. 취업 빙하기. [일러스트=김지윤]

더불어, 나에게 주어진 역할이 사라진다. 인생 오전에는 가정에서 부모와 자식으로서의 역할을 갖고 있고 직장에서 부장·팀장 등의 역할이 주어진다. 주어진 역할을 잘 수행하면 된다. 하지만, 인생 오후에는 주어진 역할이 사라지고 스스로 역할을 찾아야 한다. 역할이 사라지는 것은 배역을 잃은 배우와 같다. 가정과 직장에서 과중하게 떠 맡던 역할이 사라지면 처음에는 홀가분해지지만 시간이 흐르면 점차 배역 없는 배우의 공허함을 느끼게 된다. 역할의 부재는 심지어 자신을 아무짝에도 필요 없는 존재라고 여기게 만든다.

설상가상으로, 나를 보호해주고 위로해주던 관계망이 사라진다. 부부·가족·친구·사회의 관계망은 인생 오전에 귀찮을 정도로 확대되지만 인생 오후에 접어 들면 급격하게 축소된다. 사회적 관계망은 퇴직하고 나면 아침 햇살에 이슬 사라지듯 한다. 가족 관계망도 부부만 남는다. 관계망은 20년 이상 키워 온 아름드리 참나무와 같아 햇볕·바람·비를 넉넉히 막아 준다. 하지만, 인생 오후가 되면 커다란 참나무는 이제 내 몸 하나 피하기도 어려운 작은 참나무가 되어 버린다. 이처럼, 인생 오후에는 사회에서 생각하는 나의 가치가 일순간에 사라지고, 역할과 책임도 사라진다. 그리고, 나를 보호해주고 안식처를 주던 관계망마저 협소하게 줄어들어 간다. 변화가 워낙 급하게 일어나 디지털에 가깝다. 변화가 큰 만큼 받는 스트레스도 크다.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변화에 대해 페르소나(persona)를 적절히 바꾸어야 한다. 페르소나는 그리스 시대 연극을 할 때 쓰는 가면을 말한다. 당시에는 웃을 때는 웃는 가면을 슬플 때는 우는 가면을 쓰면서 연극을 했다. 우리는 인생 오전에 쓰고 있던 부장과 상무 직함의 페르소나를 오후까지 쓰고 있다. 심지어 인생 오전에 가장 잘 나가던 때의 페르소나를 오후 내내 쓰고 다닌다.

이러니 인생 오후의 큰 낙차(落差)에 적응하지 못하고 현기증을 느낀다. 신입 직원보다 적은 소득을 보고 ‘내가 왕년에 누구인데’라는 생각에 잡혀 있기 일쑤다. 직장에서 상사로서의 페르소나와 가정에서 아빠로서의 페르소나가 다르듯, 인생 오전과 오후에 쓰는 페르소나도 다르다. 정신 건강이 좋은 사람은 페르소나 하나를 평생 고집하는 게 아니라 때에 맞게 잘 바꾸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나의 가치를 부단히 지키기 위해 아레테(arete)를 깊게 발전시키는 것이다. 아레테는 자신만이 가진 탁월함 혹은 강점을 말한다. 이것저것 다양하게 하는 것도 좋지만 인생 오후에는 자신 있는 하나를 계속 깊게 파는 것도 의미 있다. 고령의 피아니스트는 많은 곡을 연주하지 않고, 연주 곡의 수를 줄이고 각 곡에 대한 연습량을 늘린다. 인생 오후에 나의 가치가 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나의 전문성을 깊게 해서 독보적(unique)이 되어야 한다.

괴테는 거작 『파우스트』를 23세에 시작해서 죽기 1년 전인 82세에 완성했다. 괴테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내 안의 힘, 내 안에 끈질기게 있는 힘을 가장 좋은 방향으로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을 했다. 내 안에 있는 그 힘이 아레테며 이를 발현시키는 것은 끈기다.

연말이 되면서 ‘있다가 없어지는’ 일을 많이 겪는다. 정년 퇴직을 맞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삶은 디지털적이다. 영국 시인 바이런도 ‘어느 날 아침 눈을 떠 보니 유명해져 있었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인생 오후는 더욱 그러하다. 페르소나를 잘 바꾸고 나의 아레테를 발현하는 것, 이 둘이 인생 오후의 디지털적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두 무기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리고 1에서 0으로의 디지털적 변화 이후 다시 0에서 1로의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을 기대하면서.

김경록 미래에셋자산운용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