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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병일의 이코노믹스

고관세 카드 흔들며 통 큰 양보 얻는 게 트럼프 목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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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한국은 트럼프 2기에 준비되어 있나

최병일 한국고등교육재단 사무총장·이화여대 교수

최병일 한국고등교육재단 사무총장·이화여대 교수

트럼프의 공포가 자유민주주의 세계를 엄습하고 있다. 미국 대선은 내년 11월 5일. 지금 당장 선거가 벌어진다면 트럼프가 바이든을 이길 것이라는 미국 내 여론 조사결과가 공개된 이후부터 트럼프 복귀 공포는 더 커지고 있다.

집권(2017년 1월~2021년 1월) 내내 근육질 미국의 힘에만 의존하는 일방주의 외교통상정책으로 전통적 동맹인 유럽, 한국, 일본을 혼돈과 경악에 빠뜨렸던 트럼프가 아니던가. 2018년 6월 캐나다에서 개최된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의 모임인 G7 정상회의에서 팔짱을 낀 채 의자에 앉은 트럼프와 그 반대편에서 트럼프를 질타하는 태세로 책상 위에 손을 짚고 있는 메르켈 독일 총리, 바로 옆에서 가세한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이 한장의 사진은 미-유럽연합(EU) 대서양 동맹의 분열과 위기를 상징하는 역사적 장면이었다.

트럼프 2기, 미 시장 성벽화 예고
‘관세 올려 산업 보호’ 환상 집착
모든 품목의 수입관세 인상 관측
통상대국 한국 생존 전략 세워야

트럼프 복귀 땐 동맹외교 위기

2018년 6월9일 캐나다 퀘백 라말베에서 열린 G7 정상회의에서 메르켈 독일 총리가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얘기하고 있다. [연합뉴스]

2018년 6월9일 캐나다 퀘백 라말베에서 열린 G7 정상회의에서 메르켈 독일 총리가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얘기하고 있다. [연합뉴스]

2020년 대선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던 그가 권좌에 복귀하면 미국 정치가 극도의 혼란에 빠질 것은 예견되지만, 바이든 행정부가 추진해온 가치 중심 동맹외교도 단절의 순간을 직면하게 될 것이다. 한국 정부는 문재인 정부 때 최악으로 치달았던 한일관계를 복원하고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면서 한·미·일 공조체제를 외교통상의 핵심축으로 삼아 21세기 신냉전의 격랑을 헤쳐 나갈 청사진을 발 빠르게 실행에 옮겨왔다. 그런 한국의 전략은 트럼프에 의해 시련대 위에 서게 될 것이다. 한국은 준비되어 있는가?

트럼프 2기는 통상대국 대한민국에 높은 장벽이 세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세계관과 대통령 시절 행적을 반추해 보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예감할 수 있다.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영국을 제치고 미국을 세계 최고 경제 대국으로 올려놓은 철강·자동차 같은 전통 제조업 분야의 영광을 되찾자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MAGA)’를 외쳤던 트럼프 아니던가. 한국의 자동차 미국 수출이 미국 자동차의 한국 수출을 압도한다는 이유로 ‘윈-윈’ 성공사례로 평가받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던 그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역시 같은 이유로 폐기되었다. “중국이 21세기 무역질서 규칙을 쓰게 할 수는 없다”는 신념으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천신만고 끝에 타결시켰던 21세기 최대규모 무역협정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도 같은 운명에 처했다.

미국이 경쟁력을 갖춘 서비스 분야의 수출을 늘리고 외국이 경쟁력을 갖춘 철강·자동차는 수입을 늘려 서비스 분야 일자리를 늘리고, 제조업 분야는 소비자 후생을 증대시켜 윈-윈하자는 비교우위론적 무역정책은 트럼프에게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비교우위 논리는 미국의 파워 엘리트만 더 잘나게 할 뿐, 중서부 전통 제조업 노동자에게는 좌절과 재앙만을 안겨준다는 그의 선거 유세에 지난 오랜 세월 민주당에 표를 주었던 노동자들까지 트럼프에게 표를 던지지 않았던가.

트럼프 2기는 ‘MAGA 2’ 예고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지난 2018년 9월24일 뉴욕에서 ‘한미 FTA에 관한 공동성명’에 서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지난 2018년 9월24일 뉴욕에서 ‘한미 FTA에 관한 공동성명’에 서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트럼프 2기는 ‘MAGA 2’를 예고한다. MAGA라는 트럼프의 경제관은 다분히 시대착오적이다. 그가 만약 경제학 원론을 수강하는 학생이라면 그의 답안지는 F를 받을 게 뻔하다. 관세를 올려서 미국 제조업자들의 일자리를 보호하고 국가 재정을 두둑하게 한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인상된 관세 덕분에 보호되는 일자리가 생기기는 하겠지만, 인상된 관세만큼 수입가격이 증가하여 소비자 후생은 감소하고, 그 수입품을 자신의 다음 생산 활동에 사용하는 생산자의 가격 증대는 더 심각하다. 관세로 유지되는 산업 보호 효과 논쟁은 이미 20세기 후반에 종결되었다. 서구보다 늦게 산업화의 길로 들어선 국가들이 예외 없이 관세보호 정책을 추진했지만, 관세보호 정책으로 일관한 국가는 모두 실패했다. 산업기반이 취약한 초기에는 보호 정책으로 시작했지만, 국내시장보다 더 큰 세계시장에서 뼈를 깎는 혁신과 도전으로 경쟁력을 키운 국가만이 살아남았다. 한국의 산업화 전환이 세계 경제사에 획기적인 사례로 새겨지게 된 이유다.

미국 철강·자동차 산업이 관세만으로 보호되지 않는 이유는 혁신과 도전에서 다른 국가에 밀리기 때문이다. 명백한 이 사실에 대해 그동안 미국의 정치가, 통상정책 당국자들은 자신의 실패를 교정하기보다는 상대의 불공정 경쟁 때문이라고 비난하기에 바빴다. 그 역사는 일본을 상대로 통상공세를 본격화하던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런 면에서 트럼프를 예외적인 이단아라고 몰아붙인다면 그는 억울하다.

트럼프 1기(2017년 1월~2021년 1월) 주요 통상 정책

◦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
◦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폐기
◦ 한미 FTA 개정
◦ 중국산 수입품 고율 관세 부과
◦ 수입 철강제품 고율 관세 부과

‘수출은 선, 수입은 악’이란 세계관

자신을 ‘관세광(Tariff Man)’으로 자임했던 트럼프. 그가 돌아온다면 모든 품목의 수입 관세가 인상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트럼프 자신도 공언한 바 있다. 평생  최고의 협상가로 자부해 온 트럼프로서는 관세 인상이라는 카드 자체가 목적은 아닐 것이다. 세계 최대 미국 시장을 무기로 고관세 카드를 흔들면서 상대국에 ‘통 큰’ 양보를 얻어내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트럼프 1기의 통상 정책이 ‘상호주의에 기반을 둔 공정무역’이었다. 문제는 통 큰 양보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힘이 트럼프에게 있다는 현실이다.

수출은 좋은 것, 수입은 나쁜 것이라는 중상주의 세계관에 젖어 있는 트럼프에게는 어떠한 설교도 가르침도 소용없다. 일본의 고(故) 아베 총리는 2016년 11월 트럼프 대통령 당선 소식을 듣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 위기에 처했음을 직감했다. TPP를 살려야겠다는 절박함에 뉴욕의 트럼프타워까지 찾아가 설득했지만, 트럼프는 집권 첫날 미국을 TPP에서 탈퇴시켰다. 아무런 토론도 심의도 없이 트럼프 서명 하나로 미국은 TPP에서 허망하게 퇴장했다.

시대착오적 보호무역 정책

철강 수입이 미국의 안보를 위협한다는 논리를 내세워 모든 국가로부터의 철강 수입 관세를 인상했던 트럼프. 동맹국의 철강이 어떻게 안보를 위협할 수 있냐는 EU의 항의와 외교 공세, 학계와 연구계의 비판, 언론의 비난에도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자동차 수입 관세 카드까지 꺼내 들 태세였다. 트럼프 2기는 이런 시대착오적 드라마의 재방송을 의미한다. 통상대국 대한민국 앞에 세계 최대의 시장 미국의 장벽이 더 높아지게 된다. 한국은 준비되어 있는가.

경쟁 우위를 상실한 미국의 전통 제조업을 국가정책으로 되살리려는 시도는 바이든도 하고 있다. 바이든의 ‘미국 제조업 기반 재구축(Build Back Better·BBB)’, 지난해 한국을 기습했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은 트럼프의 MAGA와 본질에서 유사하다. 하지만 트럼프와 바이든의 결정적 차이는 트럼프는 전통적인 동맹을 ‘장기판의 졸’로 업신여긴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말과 행동에서 여실히 증명됐다. “미국에 무역적자를 안겨주는 EU, 일본, 한국은 독재자인 시진핑, 푸틴, 김정은보다 더 나쁘다”고 했고, 동맹국들에도 국가안보를 내세워 철강 수입 관세를 올렸다.

갈림길에 선 한국

트럼프는 중국을 강하게 압박해야 한다고 믿고 있고 그렇게 행동했다. 그가 중국을 겨냥해 쏘아 올린 관세 폭탄은 미·중 무역 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트럼프가 시작한 무역 전쟁은 21세기 신냉전의 본격화를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중국의 기술 굴기를 견제하기 시작한 이 또한 트럼프다. 디지털 대전환 시대의 신데렐라로 부상하던 화웨이를 보라. 하지만 트럼프는 동맹과 연계하여 중국을 압박하는 것에는 무관심하다. 미국 혼자 할 수 있는데 왜 굳이 외국과 연계해 그들의 몸값을 올려주느냐는 장사꾼의 계산이 그를 지배하고 있다.

트럼프가 귀환한다면 한·미·일 연계에서 약한 고리인 한·일 관계는 갈림길에 서게 된다. 트럼프 2기가 미국 시장의 ‘중세 성벽화(城壁化)’를 의미한다면 한국은 그 성안에 이미 들어가 있든지, 아니면 그 성을 넘을 수 있는 사다리를 만들어야 한다. 그 사다리를 한국 혼자의 힘으로 만들 수 있을까, 아니면 같은 상황에 처한 국가들과 연합할까. 그 상대는 누구일까. 트럼프 2기가 시작된들 그것이 세상의 끝은 아니다. 그의 집권 4년을 넘어서 다음을 내다보는 한국의 생존전략이 세워져야 한다는 이야기다. 냉정한 거래의 법칙이 지배하는 국제관계를 낭만적인 정서로 접근한다면 이는 비극의 시작일 뿐이다.

최병일 한국고등교육재단 사무총장·이화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