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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진회숙의 음악으로 읽는 세상

소리의 색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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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진회숙 음악평론가

진회숙 음악평론가

러시아 작곡가 알렉산더 스크랴빈(사진)의 ‘프로메테우스, 불의 시’라는 곡이 있다. 소리와 빛과 색채를 결합한 새로운 작품이다.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함께 연주하는 일종의 협주곡인데, 피아노·오케스트라 파트 외에 ‘색채’가 제3의 파트로 등장하는 것이 흥미롭다. 스크랴빈은 이른바 색광 피아노라는 것을 사용했다. 이 피아노의 건반에는 각각 그에 해당하는 색깔이 있는데, 건반을 누를 때마다 그에 상응하는 색깔이 스크린에 투사된다.

김지윤 기자

김지윤 기자

스크랴빈은 각각의 색깔에도 의미를 부여했다. 초록색은 물질세계를, 붉은색은 언젠가는 파멸할 이승의 세계를, 푸른색과 보라색은 이성과 지혜를 뜻한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프로메테우스, 불의 시’는 단순한 소리와 색채의 결합이 아니라 소리와 색채 그리고 영적인 의미의 결합이라 할 수 있다.

알렉산더 스크랴빈

알렉산더 스크랴빈

이런 신기한 작품을 현장에서 직접 감상한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놀랍게도 음악을 듣고 색채를 보며 갖가지 환상을 보았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현란한 빛깔의 파도와 보라색 바다 위를 떠가는 황금색 배, 그리고 강렬한 불덩어리 같은 것을 보았다고 주장했다. 이쯤 되면 연주회가 아니라 거의 밀교의식(密敎儀式)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소리를 들으며 그에 해당하는 색깔이 눈에 떠오르는 독특한 능력을 공감각(共感覺)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능력이 없기에 이것을 일종의 정신병이라고 치부하는 사람도 있다.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단원들에게 “그 부분은 초록색으로 연주해 주세요.” 라고 말한다면 단원들이 얼마나 황당할까. 하지만 창의적인 작품은 대개 이런 감각의 정신병자들로부터 나오는 법이다. 만약 스크랴빈 같은 사람이 없었다면 우리 같은 정상인(?)은 소리가 빛으로 환원되는 신비로운 환상을 경험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진회숙 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