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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4년 만에 대면 대국, 삼성화재배 관전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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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19일 ‘삼성화재 바둑마스터스’ 16강전에서 신진서(왼쪽)와 대만의 쉬하오훙. [사진 한국기원]

19일 ‘삼성화재 바둑마스터스’ 16강전에서 신진서(왼쪽)와 대만의 쉬하오훙. [사진 한국기원]

2023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가 한창이다. 4년 만의 대면 대국이다. 바둑 승부란 모름지기 상대의 숨소리, 신음소리를 들으며 대국해야 맛이 나는 법. 온라인 대국이 더 편한 기사도 있지만 강자의 포스는 대면 대국에서 더욱 강해진다.

대국장은 일산의 삼성화재 글로벌캠퍼스. 32명의 사투가 16일 시작됐는데 그 이름 중에 커제가 없다. 중국 예선에서 탈락한 것이다.

커제라는 존재가 사라진 대국장이 잔잔하게 가슴을 흔든다. 8년 전 18세 커제는 삼성화재배 준결승에서 최강 이세돌을 꺾었고 이내 우승컵마저 거머쥐었다. 어둡고 칙칙한 커제의 힘, 그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한데 불과 8년 만에 중국바둑의 대명사였던 커제의 이름은 삭제되고 신진서의 이름이 높이 떠올랐다. 커제는 이제 겨우 27세다. 그는 정말 이대로 사라질 것인가.

마침 비번인 대만의 쉬하오훙을 만났다.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박정환·신진서·커제를 차례로 꺾고 금메달을 움켜쥐었던 그 청년. 맑은 눈과 꾸밈없는 모습이 호감을 준다. 오늘날의 일인자가 누구냐고 묻자 곧바로 “신진서”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커제는 왜 밀렸을까. “공부에 질려 재미있는 다른 활동에 빠진 탓이 아닐까요.”

22세의 쉬하오훙은 대만의 영웅이 됐다. 응씨배를 창설한 잉창지씨가 살아있다면 참 좋아했을 것이다. 자신의 바둑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균형과 종반”이라고 한다. 계산에 강한 바둑이란 의미다. 응씨배를 꼭 우승하라고 말하자 환하게 웃으며 소년처럼 고개를 끄덕인다.

32강전 중 가장 먼저 패배한 사람은 와일드카드로 출전한 유럽 우승자 안드리 크라베츠(32) 초단이다. 우크라이나 국적이지만 독일 라이프치히 근처의 시골에서 산다는 그는 참 먼 길을 왔다. 그러나 첫판에 박정환이란 강자를 만나 힘없이 졌다. 이 한판으로 끝이고 다시 먼 길을 돌아가야 한다. 그의 첫마디는 “아쉽다”였다. “바둑이 팽팽했는데 오버플레이 한 번으로 무너졌다”고 자책한다. 다시 도전하길 기대한다고 하자 그는 고개를 떨군다.

“8살에 바둑을 배워 이제 32살이다. 유럽에선 강자지만 아시아 바둑과는 큰 차이다. 더구나 아시아에서도 나이 30이 넘어 토너먼트에서 우승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이튿날, 초미의 관심이 신진서-왕싱하오의 한판 대결에 모아지고 있다. 왕싱하오는 중국랭킹 7위지만 나이가 이제 겨우 19세인 신진 강호다. 커제가 사라진 대국장에서 중국 1위인 구쯔하오보다 더욱 진한 관심을 받는 존재가 됐다. 과거 인터넷 대회서 신진서를 꺾은 이력도 있어 한국 측은 긴장을 떨칠 수 없다.

바둑은 백을 쥔 신진서가 흑진을 삭감하는 데 성공하면서 살그머니 앞서나갔고 이후 점점 격차는 벌어졌다. 박정상 9단은 “신진서는 뛰어난 전략가다. 상대를 연구하고 상대에 맞는 전략을 구사한다”고 말했다. 왕싱하오를 향한 중국의 뜨거운 기대는 이렇게 물거품이 됐다. 그러나 왕싱하오는 점차 강해질 것이고 결국 두 기사는 머지않아 뼈저린 승부를 펼치게 될 것이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32강 토너먼트는 누가 누구의 칼에 맞을지 아무도 모른다. 신진서가 강자인 건 맞지만 그에게도 연전연승은 곡예에 가깝다. 운도 따라야 한다. 한국 2위 변상일은 구쯔하오를 만나 치열한 접전 끝에 반집을 졌다. 운이 없었다.

이창호-신민준의 대국에서는 이창호가 계속 앞서나가는 바람에 찬탄을 자아냈으나 ‘반집’ 차로 역전패했다. 끝내기의 신이었던 이창호가 끝내기에서 당했다. 순전히 ‘나이’ 탓이었다. 이창호-이세돌-커제-신진서로 이어지는 일인자 계보를 떠올리며 세월이야말로 진짜 무적이구나 생각하게 된다.

신진서(23)는 16강전에서 쉬하오훙을 만나 승리하며 아시안게임의 패배를 설욕했다. 신진서는 초반부터 난적들을 연속 만나고 있다. 오늘(22일) 열리는 8강전에선 셰얼하오와 대결한다. 우승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박치문바둑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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