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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류태형의 음악회 가는 길

21세기 해독제 브루크너, 내년 탄생 200주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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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류태형
류태형 기자 중앙일보 객원기자·음악칼럼니스트
류태형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류태형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관악과 현악이 거대한 물결처럼 객석으로 밀려왔다. 장엄한 울림은 숭고함을 남겼다. 지난 16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만난 안드리스 넬손스 지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브루크너 교향곡 9번이 그랬다. 넬손스는 나아갈 방향을 진득하게 응시했고, 옛 음색을 간직한 악단은 그에 부응하며 웅장하고 통풍이 잘되는 음의 텍스처를 만들었다.

내년 9월에는 오스트리아 작곡가 안톤 브루크너가 탄생 200주년을 맞는다. 올해 탄생 150주년의 라흐마니노프처럼 2024년에는 공연장에서 접할 브루크너를 기대한다.

자연을 닮은 소박한 음악을 추구한 브루크너. [사진 위키피디아]

자연을 닮은 소박한 음악을 추구한 브루크너. [사진 위키피디아]

1824년 린츠 근교의 안스펠덴에서 오르가니스트이자 교사의 아들로 태어난 브루크너는 음악에 재능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네 살 때 교회 미사의 찬송가 선율을 소형 바이올린으로 켰고 작은 하프시코드인 스피넷으로 화음을 찾아냈다 한다. 그러나 작곡에서는 모차르트나 멘델스존 같은 천재와 거리가 멀었다. 브루크너의 음악은 늦게 완성됐다.

부친이 사망하던 12세 때 성 플로리안 수도원에 맡겨진 브루크너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음악 교사를 지망한다. 본격적인 작곡 공부는 32세 때부터 할 수 있었다. 교향곡 작곡가로서 활동한 건 40세부터 사망하는 72세까지 약 20년간이었다.

베토벤 이후 서양음악계는 둘로 갈린다. 리스트와 바그너는 신화, 문학과 역사를 도입해 음악을 확장한 표제음악을 표방한 혁신파였고 브람스와 바이올리니스트 요아힘, 평론가 한슬릭은 그에 맞서 ‘음악을 위한 음악’을 수호하는 보수파였다. 바그너를 추종했던 브루크너였지만 그의 교향곡은 순수음악에 더 가까웠다. 혁신파의 이단아였던 셈이다.

대기만성의 브루크너는 평생 바보스러울 정도로 열심히 배우고 성실하게 작곡했다. 만학도였던 그는 열 살이나 어린 오토 키츨러에게 기꺼이 배웠다. 바흐의 대위법과 고전 춤곡 형식, 시골 농민의 춤을 익히고 평생 베토벤을 연구했다.

당대 브루크너의 음악은 부당하게 과소평가됐다. 교향곡 3번이 초연됐을 때는 청중뿐 아니라 오케스트라 단원들까지 줄줄이 나가버렸다. 당대 명지휘자 헤르만 레비는 교향곡 8번 지휘를 거절하기도 했다. 브루크너는 마음이 아파도 꾹 참고 자신의 작품을 여러번 고쳤다.

브루크너 연주는 어렵다고들 한다. 치장할수록 완성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관과 현이 부풀어 오를 때도 있는 그대로의 자연처럼 소박하고 담백해야 본질에 가까워진다. 브루크너 교향곡 전곡 음반을 발매했던 지휘자 임헌정은 “화려하고 자극적이지 않아 금방 친해지기 어렵지만, 익숙해지면 새로운 음악의 세상을 발견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스마트폰에 갇혀 인스턴트 식품을 공급받는 우리에게 자연으로 돌아가 영성을 찾는 브루크너 음악은 삼림욕이자 해독제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