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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 오면 근대문화가 보인다] “K, 인천역으로 어서 와 … 너와 함께 걷고 싶은 길이 있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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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면

대불호텔전시관부터 문학소매점까지 소설가 안보윤의 인천탐방기

국내 최초 서양식 호텔 ‘대불호텔’
작은 예술 마을 ‘인천아트플랫폼’

‘제물포구락부’에서 음악 감상하고
시와 소설 ‘문학소매점’도 들르자

인천 개항장 거리에 위치한 인천아트플랫폼

인천 개항장 거리에 위치한 인천아트플랫폼

한국근대문학관 [사진 인천문화재단]

한국근대문학관 [사진 인천문화재단]

K, 나는 지금 여기에 있어.

인천역에서 만나자고 했을 때 너는 지하철 노선도를 손가락으로 고불고불 따라 그리며 감탄했었지. 정말로 종착역이네. 여기서 뭘 할 거야? 우린 길을 걸을 거야. 내가 말했지. 여기에 너와 함께 걷고 싶은 길이 있어.

너는 지금 어디쯤 왔을까. 언제쯤 인천역의 낮은 역사를 빠져나와 작은 열차모형 앞에 설까. 나는 너와 함께 차이나타운을 가로질러 좁고 긴 골목길로 들어갈 거야. 길은 조금씩 엉키고 구부러지다가 어느 순간 우리를 환대하듯 활짝 열린 곧은 길로 변하지. 우리는 개항기에 일본인들이 거주했던 거리가 채도 낮은 갈색의 목조 건물로 재현된 길을, 모래와 시멘트로 만든 벽에 석재를 쌓아 마감한 근대건축물 사이를 걸을 거야. K 너는 아치형 입구와 기둥 같은 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겠지. 너는 그게 과거로부터 달려온 오늘의 일상이라는 걸 알고 있을까?

우리의 시작은 대불호텔이 좋겠다. 붉은 벽돌을 쌓아 만든 서양식 3층 건물에 일본식 기와 지붕이 얹혀 있고, 고대 그리스 양식의 흰 기둥들이 난간과 함께 돌출되어 있는 ‘대불호텔전시관’은 오래된 케이크 상자 같아. 반듯하면서도 화려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거든. 여기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야. 나는 그런 말을 하면서 너와 고풍스러운 가구들로 채워진 객실을 구경할 거야.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피아노를 골똘히 들여다보면서 시간의 악보를 더듬어보겠지. 호시절을 박제해둔 곳이 으레 그렇듯 조금 쓸쓸한 기분이 들지도 몰라. 그럼 나는 너를 데리고 또 길을 걷지.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담고 있는 작은 예술 마을, ‘인천아트플랫폼’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야.

상상이 가니, K? 1930년대에 지어진 건물에 2023년의 예술가들이 입주해 내일을 조각해내는 모습이. 인천아트플랫폼은 꽤 넓은 부지에 창작스튜디오와 공연장, 전시장, 레지던스 건물 등이 모두 모여 있어. 고즈넉하고 예스러운 건물들과 작은 광장 어느 곳에나 물방울처럼 작품들이 흩어져 있지. 우리는 예술가의 꿈을 훔쳐보는 기분으로 그곳을 돌아볼 거야. 때마침 마음에 맞는 전시와 마주칠 수도 있겠지. 1940년대에 지어진 창고 건물의 노란 철문을 밀고 들어가 공연을 보는 것도 좋겠고. 우리는 시계탑 아래에 서서 이 모든 곳을 그저 바라보기만 할 수도 있어. 적갈색 건물들이 줄지어 선 사이로 건물보다 키가 큰 은행나무들이 지금쯤 노란빛을 흩뿌리고 있을 거야. 아름답겠지만 낙엽들의 시간은 쌓이지 않아. 시간을 쌓는 것은 누군가의 절대적인 노력이 필요한 일이니까.

그러니 우리는 길을 오르내리다 ‘한국근대문학관’으로 갈 거야. 개항장 주변에 즐비하던 창고 건물이 이렇듯 근사한 문학관이 될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백 년이 넘는 시간이 빼곡히 쌓인 이 건물이야말로 근대문학의 역사와 기록을 담아두기 가장 적절한 공간이었을 거야. 문학관에서의 우리는 교과서에서 배운 이름들을 골라내며 한껏 영리한 척을 할지도 몰라. 옛날식으로 제본된 책을 만져보고 근대시로 만든 노래들을 들어보고 문학 퀴즈를 풀고 엽서를 쓰겠지. 천장까지 닿는 책장 앞에 서서 목이 꺾이도록 책등을 헤아려볼 거야. 그러고는 책장이 빙 둘러있는 쉼터에 앉아 책 몇 권을 떠들어보면서 생각하겠지. 누굴까, 예술과 문학과 역사의 공간을 이토록 꼼꼼히 겹쳐 올린 사람은. 이런 건 개인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지. 인천문화재단에는 못 말리는 덕후들이 모여 있구나. 우린 그런 말을 하면서 조금 웃다가, 결국은 고개를 끄덕일 거야. 누구보다 진심인 사람들이구나, 감탄하면서 말이야.

우리는 넓고 좁은 길을 오르내리면서 숨어있는 명소들을 찾아낼 거야. 시선이 닿는 모든 곳에 역사가 있어. 어떤 길은 헤매고 어떤 길은 곰곰이 되짚어가면서 우리는 한참을 걷겠지. 개항기 외국인들의 사교 클럽이었던 제물포구락부에서 음악을 감상하고, 시민들에게 개방된 인천시민愛집에서 한옥 문살 너머 정원을 바라보며 휴식도 취할 거야. 과거와 현재를 실컷 넘나든 뒤엔 원고지 모양의 간판을 달고 있는 ‘문학소매점’에도 들르자. 문을 열고 들어가면 수줍은 얼굴을 한 서점지기가 얼른 카운터 안쪽으로 숨는 작은 동네 서점 말이야. 한국의 시와 소설만으로 꽉 채운 고집스러운 서가와 손님이 손님에게 책을 추천하는 다정한 서가가 공존하는 독특한 곳이야. 책장마다 좋은 문장을 필사한 메모들이 가득하고 계산한 뒤 받는 영수증에조차 책에서 발췌한 문장이 빼곡한, 그야말로 문학으로 가득찬 곳이지. 그곳에서 일과의 마지막으로 서로에게 가장 어울리는 책을 골라 선물하자. 그럼 책장을 펼 때마다 오늘이, 이 거리가, 서로가 떠오를 테니까 말이야.

우리는 다시 인천역을 향해 걷겠지. 달고 따뜻한 것을 먹고 나면 날이 제법 어둑해졌을 거야. 그럼 하루가 고요히 저물어가는 거리에서 그만 길을 잃어도 좋겠어. 계획되지 않은 걸음만큼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게 또 있을까. 개항장 거리는 길을 잃고 헤맬수록 새로운 것들이, 눈여겨보고 싶은 특별한 것들이 연이어 나타나는 곳이야. 이미 지난 골목은 익숙해서 좋고 아직 지나지 않은 거리는 새로워서 좋지. 그러니 실컷 두리번거리고 마음껏 옆길로 빠지자. 길을 잃고 계속 계속 새 길을 열자.

그러니 어서 와, K. 나는 여기서 너를 기다리고 있어. 이곳에 너와 함께 걷고 싶은 길이 있어. 우리는 오늘 이곳에서 함께 길을 잃을 거야.

안보윤 소설가

인천 출신으로, 삶의 희망과 회복을 이야기한다. 2023년 11월 출간한 소설집 『밤은 내가 가질게』에는 23년 이효석문학상 대상 수상작 『애도의 방식』 외 다수 작품이 수록되었다.

〈스펙타클〉 편집부

〈스펙타클〉은 인천 청년들이 만드는 지역 잡지다. ‘두근두근 마계인천’ ‘시티 오브 누들’ 등을 주제로 다뤘다.

인천문화재단

인천문화재단은 인천광역시에서 출연한 비영리 공익법인으로 인천의 예술가와 시민들의 문화활동을 지원하고 한국근대문학관과 인천아트플랫폼 등의 문화시설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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