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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청조도 넘사벽인 사기극…단 한명 속이려, 수십명 고용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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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시네마 역사

세간에 떠들썩한 결혼 사기에 관한 스토리 중 가장 흥미로우면서도, 가장 문학적이고 우아한 것은 영화 ‘마틴 기어의 귀향’이다. 1982년작으로 당시까지만 해도 프랑스 국민배우 소리를 듣던 제라르 드 빠르디외가 나온 작품이다. 1556년 프랑스 한 시골 마을에서 벌어진 실화를 바탕 삼았다.

오래 전에 마을을 떠난 마르땡(제라르 드 빠르디외)이 갑자기 돌아 온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수년 전 떠났을 때와는 조금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의 부모 일이나 특히 아내와의 관계(잠자리 습관까지)에 대해서도 너무나 잘 아는 데다 마을의 소소한 일상을 구체적으로 기억해 내는 것을 보고 그가 마르땡이라고 생각한다. 결정적인 것은 아내 베르트랑드(나탈리 베이)가 그를 마르땡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베르트랑드는 부쩍 다정다감해진 마르땡에게 푹 빠진다. 그녀는 이후 3년동안 그 사내와의 사이에서 딸을 낳기까지 한다. 그러나 마르땡은 아버지 재산을 둘러싼 분쟁의 와중에 가짜라는 의심을 받기 시작한다. 그리고 곧 법정으로 소환돼 재판을 받지만 호소력 있는 구변으로 자기 변호에 성공, 승소할 뻔 한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진짜 마르땡 게르가 나타나고, 본명이 아르노 뒤 틸이라는 이 남자는 사형선고를 받는다.

진실한 사기꾼? 사기꾼의 진실? 그게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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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아내 베르트랑드의 태도다. 여자는 남자가 분명히 자신의 남편이라고 주장한다. 그녀의 강한 주장은 법정에서 중요하게 작용한다. 베르트랑드의 이런 태도는 가족, 친척, 마을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사람들은 마르땡이 진짜냐 가짜냐를 놓고 양분된다. 마을은 일대 혼란에 빠진다. 진짜 마르땡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가짜 마르땡은 무죄로 석방돼 베르트랑드와 삶을 이어 나갔을 것이다.

다니엘 비그네가 연출한 이 프랑스 영화는 1993년 할리우드로 건너 와 리메이크 된다. 존 아미엘 감독이 만들고 리처드 기어, 조디 포스터가 주연을 했던 ‘써머스비’다. ‘써머스비’는 원작 ‘마틴 기어의 귀향’의 시대를 남북전쟁 때인 1860년대로 옮기고 캐릭터를 대폭 수정했다. 특히 여성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운 것이 특징이다. 이를테면 이렇다. 남북전쟁 후 잭 써머스비(리처드 기어)가 돌아 오는데 아내 로렐(조디 포스터)은 그의 변한 모습, 섹시하고 따뜻한 성격에 홀딱 빠진다. 그러나 연방 보안관이 잭 써머스비를 딴 곳에서 벌어진 살인죄로 구속하자 로렐은 그를 잃지 않으려고 잭이 사실은 다른 남자, 호레이스 타운센드라고 주장한다. 잭이 만약 자신을 써머스비가 아니라고만 인정하면 살인죄를 면하게 된다. 가짜 써머스비와 로렐은 일생일대의 고민과 갈등에 휩싸이게 된다. 당시 이 영화의 홍보 문구 중 하나가 ‘진실한 사기꾼이냐, 사기꾼의 진실이냐, 그것이 문제로다’였다. 사기꾼인 줄 알지만 그가 진실되다면 용서하고 받아들일 것이다. 그건 아니다. 아무리 어쩌느니 저쩌느니 한들 사기꾼의 진실은 밝혀내고 응당 그 죄값을 치르게 하는 게 맞다 등등의 갈림길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 답은 현실에서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영화적으로는 프랑스 작품인 ‘마틴 기어의 귀향’보다 할리우드 영화였던 ‘써머스비’가 한 수 위였다. 보다 복잡한 심리의 층위를 보여 주는 연출이 일품이었으며 한창 전성기였던 리처드 기어와 조디 포스터의 연기가 말 그대로 불꽃 튀었다.

문학적이긴 해도 다소 끔찍하고 잔혹한 이야기로 꾸며진 것이 바로 영화 ‘화차’이다. 원래는 미야베 미유키 원작의 작품을 일본이 아니라 한국에서 먼저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2012년작으로 변영주가 연출을 맡았고 이선균과 김민희, 조성하 등이 나왔다. 영화가 원작을 뛰어 넘었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그건 내용과 톤앤매너 면에서 영화가 원작에 비해 한 걸음 더 깊게 들어갔기 때문이다. 문호(이선균)는 선영(김민희)과 결혼을 앞두고 지방에 사는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러 갈 참이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러 잠깐 화장실을 갔다 온 사이 선영이 사라진다. 문호는 그녀가 납치됐다고 생각한다. 여자의 행방을 찾기 위해 경찰에 신고도 하고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선영의 종적은 오리무중이다. 문호는 전직 경찰 출신인 사촌 형 종근(조성하)에게 사건을 의뢰하지만 이후 그의 앞에 놓이게 되는 사실들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선영이 선영이 아닌 것이다. 이름도 가짜고 살아 온 이력과 경력 모두가 가짜다. 선영이란 여자가 선영이 되기까지 숱하게 바꿔 온 이름도 있다. 선영은 누구인가. 그녀의 목적은 무엇인가. 사람이 이렇게까지 사람을 속일 수 있는가.

하지만 이런 얘기를 보면 늘 당도하게 되는 결론은 ‘사람이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속을 수 있다’다. 눈에 콩깍지가 씌워서라는 진부한 표현이 들먹여진다. 속는 상대가 있고 속을 준비가 돼있으면 속이는 건 쉽다. 속는 자는 스스로가 속기를 원하는 것이며, 어쩌면 스스로도 속아야 할 상황일 수 있는 데다 속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욕망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속고 속이는 것은 따라서, 동전의 앞뒷면이다. 속는 자에게도 잘못이 있다. 속이는 자에게 일말의 진실이 있다면 속는 자는 그만큼의 진실만을 보려고 한다. 일말의 진실이나 양심도 없는 사기꾼은 없다. 사기는 사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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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남녀간에 벌어지는 사기 행위가 단순한 애정극의 희비극, 코미디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기엔 늘 불순한 목적이 깔린다. 재물을 가로채려는 욕심이 있고 더 나은 사회 네트워크망을 이용해 스파이짓을 하려 하거나 비밀을 폭로하겠다며 협박을 일삼아 돈을 받아 내려는 범죄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이런 과정에서 사기꾼은 자신의 먹잇감을 정신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한다. ‘가스라이팅’이다. 가스라이팅의 어원은 1944년 조지 쿠커가 만든 영화가 시작이다. 샤를 보와이에와 잉그리드 버그먼이 나왔다. 세기의 미녀였던 잉드리드 버그만이 여주인공 폴라로 나와 남편인 그레고리 역의 샤를 보와이에게 서서히 정신이상자로 몰리게 되는 과정을 그린다. 그레고리의 목적은 폴라의 막대한 재산이다. 폴라는 밤마다 방안의 가스등이 희미해지고 다락방 너머에서 이상한 소리를 듣지만 그레고리는 ‘그게 다 당신이 이상해져서야’라고 말한다. 가스등의 조도를 매일 밤 조작하는 건 그레고리다. 영화 ‘가스등’은 진작부터 폴라의 팬이었던(폴라는 유명 오페라 가수였다.) 런던 경시청 경위의 명민한 수사 덕에 해피 엔딩으로 끝난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영화다. 현실에서는 행복한 결말이 나지 않을 때가 많다.

잉그리드 버그먼이 나와 ‘가스등’과 헷갈리지만 알프레드 히치콕의 걸작 ‘오명(1946)’도 남자가 여자를 죽이려고 계획하는 이야기다. 여자가 먼저 목적을 가지고 남자에게 접근하긴 했다. 여자는 미국 첩보원의 정보망이자 팜므파탈이다. 그가 여자를 접근시킨 대상은 나치 잔당의 두목 격이다. 여자는 이 남자와 결혼까지 하는데 남자는 곧 그녀가 나치 부흥세력을 일망타진하려는 미국의 첩자라는 걸 알게 된다. 그래서 그녀를 제거하되 서서히 병사하는 것처럼 위장하려 한다. 남자는 여자에게 매일 아침 비소를 먹인다. 그리고 그녀가 몸이 점점 허약해지고 있다며 가스라이팅을 시도한다. 남자는 여자가 자신의 거짓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여자는 자신이 그걸 아는 걸 남자가 다시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남자는 다시 여자가 그것의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안다. 상대를 속이는 것, 사기를 치는 것은 거울 속 맞은 편의 거울 속에 비친 내 쪽의 거울이고 다시 내 쪽에 비쳐져 있는 맞은 편 거울 속의 이쪽 거울의 중첩이다. 사기를 친다는 것은 심리의 디자인으로 볼 때 매우 복잡한 이미지이다.

할리우드, 여자가 남자 이용 스토리 많아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할리우드는 현대 영화로 올수록 남자가 여자를 속이는 것보다 여자가 남자를 이용하는 이야기에 빠지는 경향을 보여 왔다. 1981년에 로렌스 캐스단이 만든 ‘보디 히트’가 딱 그런 영화였다. 윌리엄 허트가 바보 같은 시골 변호사 네드로 나온다. 그를 철저하게 이용해 파멸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는 요염한 섹시녀 매티 역은 캐서린 터너다. 캐서린 터너는 1990년작 ‘장미의 전쟁’ 이후 체중 감량에 실패하고 ‘보디 히트’로 이루어 낸 섹스 심볼의 이미지를 잃었지만, ‘보디 히트’는 사기꾼 영화, 팜므 파탈 영화의 대표 격으로 아직도 심심치 않게 거론되는 영화이다.

최근 전청조-남현희 스캔들을 따라가 보면 전청조의 사기 행각이 거의 ‘스팅’ 수준으로 연출되고 조각된(조작이 아니라 조각) 수준임을 알 수가 있다. 1973년 영화인 ‘스팅’에서는 마권 사기를 벌이기 위해 주인공 둘, 곧 폴 뉴먼과 로버트 레드포드가 단 한 사람, 로버트 쇼를 속이기 위해 조역과 단역, 엑스트라를 수십 명 고용해 사기극을 벌인다. 그 지적 게임의 수준이 상당하다. 영화는 그래서 기이한 쾌감을 준다. 두 주인공의 사기 행각이 상대에게 들키게 되면 어쩌나 하는 서스펜스가 상당하다. 그걸 다 뚫고 사기술이 정통으로 통했을 때 관객들은 환호를 내지르게 된다. 주인공들도 좋은 놈은 아니지만 더 나쁜 놈을 응징하는 이야기라서다. 그러나 현실의 사기 행각은 그런 쾌감을 주지 못한다. 찜찜함과 이상한 공포를 유발할 뿐이다. 성공한 사기는 인생을 바꾼다. 선의가 전제돼 있을 때 얘기다. 그럴 일은 좀처럼 없다. 영화와 현실이 다른 점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ohdjin11@naver.com  오동진 연합뉴스·YTN에서 기자 생활을 했고  이후 영화주간지 ‘FILM2.0’ 창간, ‘씨네버스’ 편집장을 역임했다.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컨텐츠필름마켓 위원장을 지냈다. 『사랑은 혁명처럼 혁명은 영화처럼』 등 평론서와  에세이 『영화, 그곳에 가고 싶다』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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