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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의사 절대 이걸 모른다…사람 의사·사람 환자 '심묘한 라포' ['재활 명의' 나영무의 진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칼럼 30) AI가 흉내낼 수 없는 ‘의사-환자의 라포’

‘라포(Rapport)’는 두 사람 사이의 상호신뢰 관계를 뜻하는 말로 ‘다리를 놓다’는 프랑스어에서 유래한다.
의료계에선 의사와 환자 사이의 친밀감 형성을 일컫는 말로 통용된다.

AI 로봇이 의사 자격증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이 속속 들려온다. 하지만 'AI 닥터'가 절대 흉내낼 수 없는 것이 있다. 사람인 환자와 사람인 의사 사이에는 '라포'라는 게 있다. [중앙포토]

AI 로봇이 의사 자격증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이 속속 들려온다. 하지만 'AI 닥터'가 절대 흉내낼 수 없는 것이 있다. 사람인 환자와 사람인 의사 사이에는 '라포'라는 게 있다. [중앙포토]

라포가 형성되면 의사와 환자는 서로 ‘윈-윈’할 수 있다.
의사는 환자와의 소통으로 통증을 유발하는 정확한 원인을 파악할 수 있고, 환자는 치료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 치료효과가 높아진다.

무엇보다 치료에 대한 이해와 믿음이 생기면 환자의 마음에 질환을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자라난다.

하지만 라포로 가는 마음의 다리를 놓기까지 만만치 않다. ‘진정성’과 ‘관심’은 숙성하는데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허리와 무릎 등 근골격계 만성 통증 환자들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환자와 코드를 맞추는 첫 관문은 의심을 걷어내는 일이다.
환자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진료실 문을 두드리면서 ‘제대로 치료하는 실력있는 의사일까? 이것저것 바가지를 씌우며 과잉진료를 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의구심을 갖는다.
의사를 향한 환자의 탐색전이 시작된 셈이다. 일부 환자는 ‘어디 한번 원장님이 내 질환을 잘 찾아보라’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구글이 개발한 안질환 진단용 AI 시스템이 녹내장 등 중대 안질환을 의사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진단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질병 치료라는 '퍼즐'은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중앙포토]

구글이 개발한 안질환 진단용 AI 시스템이 녹내장 등 중대 안질환을 의사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진단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질병 치료라는 '퍼즐'은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중앙포토]

이럴 때 환자의 신뢰를 얻는 길은 정확한 진단이다.
환자 상태를 살피고(시진), 만져보고(촉진), 통증 부위에 대해 이것저것 묻고(문진), 그리고 장비를 통한 검진 등을 종합해 진단을 내리기 위한 퍼즐을 완성한다.
이어 환자와 눈을 맞춘 채 결과를 설명하면서 2차 문진으로 이어진다. 주요포인트는 과거 병력과 현재의 사회적 활동이다.

“과거에 허리와 무릎을 다친 적이 없느냐”고 물어보면 일부 환자들은 “그런 적 없다”며 고개를 젓는다. 하지만 몸에 남은 흔적은 거짓말을 하지 않기에 “천천히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라고 여유를 준다.

어떤 환자는 몇 년 전 등산하다 내려오면서 넘어져 무릎을 다친 것을 기억해 내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동석한 환자의 아내가 “당신 결혼 전 오토바이에 받혀 허리를 다친 적 있다고 했잖아요”라며 거들기도 한다.

이를 통해 만성 통증의 뿌리와 원인을 찾아내고 치료 수준을 결정하는 등 환자에게 맞춤형 처방을 내려주면 그제서야 의심의 눈초리가 환자 눈빛에서 걷히는 느낌이 든다.
라포 형성을 위한 밑그림이 그려진 것이다. 이후 필요한 것은 귀가 따갑도록 하는 ‘잔소리’다.

사실 재활의학과 의사다 보니 환자들에게 ‘운동’을 무척 강조한다.
진료 중에도 하고, 주사치료를 마치고 난 뒤에도 하는 등 보통 3번 넘게 하는 잔소리는 숙제로도 이어져 다음 진료 때 체크하기도 한다.

잔소리가 싫을 법도 하지만 환자들은 기분 나빠하지 않는 눈치다.
아마도 자신에게 신경을 쓰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몇 번 거치다 보면 자연스럽게 친밀감이 생기고 신뢰가 쌓여가는 느낌이 든다.

이렇게 믿음이 자리 잡으면 관심으로 이어진다.
휴식이 필요한데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하는 무릎 관절염 환자에게는 “절대 쪼그려 앉지 말고 보호대를 착용하라”고 말해주고, 피치 못해 장거리 운전에 나서는 허리디스크 환자에게는 “보조기를 차고, 중간중간 스트레칭을 하면서 쉬어가라”는 짤막한 팁을 건넨다.

주치의에게 작은 관심을 받고 있다는 것은 환자들을 기분 좋게 한다.
회복 속도가 더딘 환자들은 “원장님, 알려주신 쿼드셋 운동과 코어운동을 소홀히 해서 그렇습니다. 앞으로 신경써서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는 말로 오히려 나를 위로하고 진료실을 나가기도 한다.

그들의 뒷모습에서 의사와 환자간의 눈과 마음의 주파수가 한곳으로 맞추어가고 있음을 느끼며 가슴 한켠이 뭉클해지기도 한다.

5년 전 나는 직장암으로 의사 가운을 벗고 환자복을 입은 적이 있다. 당시 경험은 환자의 입장에서 진료 현장을 바라볼 수 있도록 시야를 넓혀줬다.

‘라포’는 의사와 환자가 함께 만들어가는 소통과 공감의 길이다.
이는 의료의 인공지능(AI)시대에서도 결코 흉내낼 수 없는 치유를 위한 소중한 의료 자산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도 삶의 터전인 진료실에서 나는 환자들을 만나며 인생을 배운다.
〈나영무 솔병원 원장〉
-끝-

〈나영무 원장은…〉

-現 솔병원 원장
-現 대한산악연맹 부회장, 前 대한빙상경기연맹 의무분과위원장
-現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 투어 주치의
-前 축구국가대표팀 주치의(1996년~2018년)
-前 대한스포츠의학회 회장
-前 김연아, 박세리, 윤성빈, 차준환 등 국가대표 선수 주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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