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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김경록의 은퇴와 투자

퇴직연금, 축적에서 인출의 시대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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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김경록 미래에셋자산운용 고문

김경록 미래에셋자산운용 고문

퇴직연금은 공적연금에 이어 연금 체계의 2층에 해당할 만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우리나라는 2005년에 퇴직연금을 도입한 이래 양적·질적으로 발전했다. 2022년 말 기준으로 퇴직연금 잔액이 335조원에 이르렀으며 지난해 한 해만 40조원이 증가했다. 또한 타겟데이트펀드(TDF) 활성화, 사전지정운용제도(디폴트옵션)와 중소기업퇴직연금기금형 도입 등이 실행에 옮겨졌다.

아쉬운 점은 여전히 있다. 적립금 점유율이 은행이 51%로 가장 높고 예·적금이 148조원에 이르다 보니 퇴직연금의 돈은 은행예금을 통해 대출로 이어지는 통로가 되어가고 있다. 자칫하면 퇴직연금이 부동산 시장의 자금줄이 되는 상황이 펼쳐질 수 있다. 향후에도 퇴직연금 적립금은 빠른 속도로 늘어날 텐데 돈의 흐름이 생산성 높은 곳으로 연결되게 하는 게 중요하다. 이와 관련하여 사전지정운용제도의 미흡한 부분을 보완해줄 수 있는 기금형 도입이 주요 과제다.

60년대 베이비부머 대량퇴직
퇴직연금 운용도 다양해져야
연금인출상품 수요 계속 커져
안정적인 은퇴소득 제공해야

[일러스트=김지윤]

[일러스트=김지윤]

무엇보다 현시점에서 대두하는 현안 중 하나는 믿을만하고 편리한 대표인출상품 제공이다. 지금까지 퇴직연금은 축적에 초점이 맞춰지다 보니 인출에 대해서는 소홀한 면이 있었다. 860만 명에 이르는 60년대 출생 베이비부머가 연금에서 인출해야 하는 때에 들어섰다. 인출계좌로 활용되는 개인형퇴직연금(IRP)이 사적연금 중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의 변화에도 인출 상품이나 제도는 걸음마 단계다.

연금은 축적보다 인출이 까다롭다. 연금의 오해 중 하나는 퇴직연금에 돈을 납입하기만 하면 노후 준비가 된다는 생각이다. 퇴직연금은 연금 단지(pension pot)와 같은 역할을 할 따름이다. 문제는 은퇴 후에 일정한 소득을 만들기 위해 연금 단지에서 돈을 꺼내 써야 한다는 점이다. 만만치 않다. 수명이 불확실하고 자산운용 수익률도 변동성이 큰 상황에서 자산의 수명과 나의 수명을 일치시키는 은퇴소득을 만든다는 것은 전문가들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연금에서 인출할 때는 인출에 관련된 다양한 상품과 함께 이들 상품을 묶어 자동으로 은퇴소득을 창출하는 ‘포괄적인 인출상품’도 필요하다. 우선, 인출 관련 상품은 3가지 군(群)으로 나눌 수 있다. 종신연금, 계좌인출연금, 최소수익보장연금이다. 각 상품군에 인출 상품을 잘 갖출 필요가 있다. 종신연금에는 연금 지급을 이연하여 나이가 80세 넘어서 지급하는 장수연금을 활성화하는 게 필요하다. 장수연금은 적은 금액으로 평균수명 이후의 은퇴소득을 제공해준다.

펀드나 계좌에서 은퇴소득을 만드는 계좌인출연금에는 인컴펀드, 월지급식 펀드, 연금채권 등이 필요하다. 연금채권은 이자만 지급하는 일반 채권과 달리 이자와 원금을 같이 지급해서 만기가 되면 상환액이 없어지는 구조로 은퇴소득을 만드는 데 유용하다. 국가가 이를 발행하면 은퇴소득 마련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또한 계좌에서 체계적 인출시스템을 개발하여 제공할 필요가 있다. 지금 업계에서는 확정기간형, 확정금액형 정도의 단순한 인출시스템이 있을 뿐이다.

최소수익보장연금은 종신연금과 계좌인출연금의 혼합에 해당하는 상품으로 주식 시장이 나빠도 최소분배금을 보장하고 주식시장이 좋으면 그 성과를 공유하는 방식이다. 전기차와 가솔린차의 하이브리드처럼 조건이 되면 전기에서 가솔린으로 동력을 바꾸는 것이다. 미국에서 은퇴소득을 만들 때 사용되는 상품이다. 최근 우리도 관련 상품 개발의 장애물은 많이 해소된 상태이므로 업계에서 다양한 관련 상품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이들 인출상품이 개발되어도 인출은 여전히 복잡하고 난해하다. 인출상품을 연령에 적합하게 배치한 자동인출상품이 필요한 이유다. TDF가 주로 축적기에 동적 자산배분을 해주는 것이라면 자동인출상품은 인출기에 동적 상품배분을 해주는 것이다. 호주는 여기에 해당하는 ‘포괄적은퇴소득상품(CIPR: Comprehensive Income Products for Retirement)’ 도입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예를 들면, 퇴직연금 적립금의 80%는 계좌인출연금을 만들어 85세 이전에 인출하고, 적립금의 20%는 85세 이후 지급하는 장수연금을 구입하여 은퇴소득을 받는 ‘Cut’이라는 상품을 대표적인 은퇴소득상품으로 제안하고 있다.

퇴직연금 시장은 ‘축적에서 인출 시대로(From Accumulation To Decumulation)’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 수명 불확실성, 수익률 변동, 저성장 환경 속에서 안정적인 은퇴소득을 제공할 수 있는 상품이 절실하다. 무엇보다 적격성을 인정받은 대표 자동인출상품 개발이 필요하다. 사전지정운용제도나 중소기업퇴직연금기금형처럼 또 한 번 제도적 도약을 할 때다.

김경록 미래에셋자산운용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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