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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9단이 곧 ‘실력’이었던 조남철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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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박치문 칼럼

박치문 칼럼

프로 입단 42년 만에 9단이 된 조남철, 그리고 입단 4년 5개월 만에 9단이 된 한우진. 이 두 사람을 보면 ‘9단’의 빛과 그림자가 느껴진다. 조남철은 한국 첫 번째 9단일 것 같지만 아니다. 세 번째다. 18세 한우진은 101번째로 가장 최근 9단이 됐다. 9단이 흔하다 싶었지만 100명을 넘어선 건 몰랐다. 중국과 일본보다 많다. 9단의 별칭은 입신(入神)이라는데 소년과 입신은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

소년 9단들이 등장할 때마다 조남철 선생이 떠오른다. 조남철은 한국 최초의 프로기사이자 해방 후 20여년간 적수가 없는 일인자였다. 바둑은 곧 조남철이었고 “조남철이 와도 못산다”는 기원 손님들의 단골 멘트였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9단은 되지 못했다. 우리나라 9단 1호는 조훈현 9단이고 2호는 김인 9단이다. 조훈현은 초단이 된 지 20년 만에 9단이 된다.

조남철은 40세 때 8단이 되었으나 이때부터 20년간 승단하지 못했다. 엄격한 승단 규정 탓이었다.

당시는 승단대회를 통해서만 승단했다. 한데 8단은 승단대회서 젊은 4, 5단들을 2점까지 접어야 했다. 어느덧 나이 들어 전성기가 지나버린 조남철 8단은 마지막 몇점의 승단 점수를 채울 수 없었다. 그래도 조남철은 자신이 만든 승단대회 룰을 고치지 않았다.

그는 9단이 되고 싶지 않았을까. 아니다. 일본에서 공부하고 일본에서 프로가 된 그는 9단이란 이름이 지니는 무게와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바둑에 관한 한 무소불위의 힘이 있었음에도 룰을 고치지 않았다.

조훈현과 김인이 9단이 되자 “조남철 선생이 9단이 못 되는 게 말이 되냐”는 소리가 커졌다. 후배 프로기사들이 ‘조남철의 9단 인정’을 제안했다. 1983년 11월, 기사회의 추천을 받아 이사회가 추인했다. 1941년 프로가 된 이후 42년 만이었고 이때 그의 나이 60세였다. 조남철은 정식 9단이라기보다는 명예 9단에 가까웠지만, 누구보다 9단다운 진짜 9단이라 할 만했다.

현재 9단을 국가별로 보면 일본 81명, 중국 57명, 대만 10명이다. 한국이 101명으로 가장 많고 세계의 9단을 다 합하면 249명이나 된다.

일본에선 한때 한 시대에 오직 1명만 9단이 될 수 있었고 9단이 되기 위해 목숨까지 걸었던 적도 있었다. 9단은 곧 ‘실력’이었다. 하나 일본기원 설립 이후 승단대회를 통해 많은 9단들이 생겨났다. 그 9단들은 점차 늙어 9단의 권위를 지켜낼 수 없었다. ‘물9단’ 때문에 일본바둑이 쇠망할 것이란 자성론도 일어났다.

중국은 승단대회조차 없는 ‘인정단’으로 바둑계에 파문을 던졌다. 녜웨이핑이 세계아마선수권에서 우승하자 즉각 9단을 준 것이다. 하지만 이후 체계적인 프로제도와 승단제도가 도입됐다.

한국의 승단제도는 갈수록 완화되어 승단이 쉬워졌다. 조남철 시대의 접바둑은 사라졌다. 프로기전 우승, 준우승에 1단~3단까지 승단하는 제도도 도입하게 됐다. 이세돌은 승단대회에 나가지 않고 3단으로 지내며 타이틀전을 치렀고 그를 상대하는 9단들이 곤욕을 치렀다. 세계대회 우승하면 3단씩 승단하는 제도가 도입되는 계기가 됐다. 승단대회는 사라졌다.

‘9단’이란 단어에는 모종의 울림이 있다. 그 바람에 ‘정치 9단’처럼 영역을 확대하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날 9단은 오래된 폐가의 느낌마저 준다. 과거엔 화려했지만 어느덧 퇴색했다. 나이가 들수록 승단이 쉬워지는 통에 프로기사로서 나이가 60이 넘었는데 9단이 못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 됐다.

‘9단’은 바둑의 귀중한 자산이었는데 그게 아쉽게도 허공으로 흩어진 느낌이다. 사실 9단의 권위는 바둑의 가치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9단이 빛을 잃으면 바둑의 그 뭔가도 빛을 잃는다. 올해는 조남철 선생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다. 그가 한사코 지키려 했던 9단의 가치를 되새겨 본다.

박치문 바둑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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