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최초 오디오 포노그래프, 전화 도청 탐욕의 부산물이었다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861호 20면

명사들이 사랑한 오디오

벨연구소에서 스테레오기술을 함께 연구하는 지휘자 레오폴트 스토코프스키(좌). [사진 Bell Labs]

벨연구소에서 스테레오기술을 함께 연구하는 지휘자 레오폴트 스토코프스키(좌). [사진 Bell Labs]

최초의 오디오는 토마스 에디슨(Thomas Alva Edison)이 1877년 발명한 포노그래프(Phonograph)다. 이후 발명가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Alexander Graham Bell), 에밀 베를리너(Emil Berliner)가 뛰어들어 에디슨과 치열하게 경쟁하며 오디오 시장을 꽃피웠다. 만년의 에디슨은 자신의 발명품 중 가장 사랑하는 제품으로 포노그래프를 꼽았지만 오디오의 탄생은 음악에 대한 순수 열정의 결과물이 아닌 투자자의 탐욕에 의한 부산물이었다.

현대 기술 사회의 근간이 된 혁신 기술 대부분은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탄생했다. 당시 유럽은 혁신가가 신기술을 발명해도 공방 수준에 머무를 뿐 기업화하기 어려웠다. 반면 미국은 신기술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 기업가들이 있었고 이 생태계를 통해 거대한 부를 일구는 ‘아메리칸 드림’이 존재했다. 벨, 베를리너, 니콜라 테슬라와 같은 걸출한 인재들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쏠려갔고, 투자가들은 아낌없이 후원했다. 후원자 중 대표적인 인물이 J.P. 모건(John Pierpont Morgan)이다.

미 투자가들, 유럽 혁신가 무한 지원

J.P.모건

J.P.모건

J.P. 모건은 당시 미국 최고의 거부로 꼽히는 인물이자 한때 미국 중앙은행 역할을 담당할 정도로 미국 경제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쳤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농업 국가 미국을 근대 산업 국가로 변모시키는데 기여했다는 데 있다. 그 덕택에 부의 중심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전되었다 할 정도다.

남북전쟁으로 큰돈을 번 모건은 금 시세를 이용해 자신의 부를 불리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가 마수를 뻗친 곳은 미국 전역의 전신을 담당하는 업체 웨스턴 유니언(Western Union)이었다. 이를 인수한 그는 모든 전신을 도청해 투자에 유리한 정보를 몰래 빼돌리는 방법으로 막대한 수익을 얻었다. 이 과정에서 철도왕 밴더빌트를 현혹해 미국 전역 철도까지 장악했다.

모건이 승승장구하는 가운데 1876년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전화를 발명했다. 이제 사람들은 불편하고 느린 전신 대신 전화를 사용할 것이 분명했다. 당연히 모건은 전화 사업에 욕심냈다. 하지만 원천 기술이 없어 곤란하던 차 젊은 발명가 한 명이 모건을 찾아와 자신이 벨에게 없는 새로운 송신기(마이크)를 발명했다며 투자를 제안해 왔다. 그가 바로 토마스 에디슨이다. 모건은 전화 시장에서 벨을 압도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해 에디슨의 기술을 특허 신청했지만 반려됐다. 실은 에디슨이 발명한 것이 아닌 벨에서 근무한 에밀 베를리너의 기술을 훔친 것이었기 때문이다.

모건의 전화 사업 진출은 실패했지만 그는 자신처럼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에디슨이 마음에 들었다. 에디슨을 후원하며 새로운 전화 개발을 집요하게 재촉했다. 에디슨은 전화 개발 중 우연히 소리 신호를 기록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바늘을 이용해 원통에 소리를 기록하는 장치를 설계했고 1887년 8월 12일 조수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메리에게 작은 양이 한 마리 있었네(Mary had a little lamb)”라며 동요를 레코딩하는데 성공했다. 지금도 자료로 남아 있는 세계 최초의 레코딩이다.

최초의 오디오 포노그래프는 이렇게 탄생했다. 모건의 전화 도청 탐욕이 의도치 않게 오디오라는 걸출한 발명품을 낳은 것이다. 놀라운 발명에도 에디슨, 모건은 무심했다. 뒤이어 발명한 백열전구가 안겨줄 천문학적인 이익에 혈안이 되어 있었던 탓이다. 1883년 모건의 뉴욕 저택에서 300여 개의 전등이 불을 밝히며 성공적인 론칭쇼를 열릴 때까지 두 사람은 오롯이 전구에만 몰두했다.

이때 벨은 에디슨이 내팽개친 포노그래프에 주목했다. 벨은 전화 발명의 공을 인정받아 프랑스 정부로부터 볼타상을 받았고 상금 5만 프랑으로 소리 연구 기관 볼타연구소를 개설했다. 첫 프로젝터는 오디오였다. 벨은 다이아몬드 소재 바늘, 천연 왁스 실린더를 추가해 에디슨 포노그래프의 단점인 내구성을 크게 개선했다. 포노그래프 단어의 앞뒤만 바꾸어 그래포폰(Graphophone)으로 명명해 판매를 시작했다.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힌 에디슨과 모건을 의식한 작명이었다.

에디슨은 경쟁자 벨의 그래포폰에 크게 놀랐고 이는 그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10여 년간 방치한 포노그래프 개선 작업에 바로 착수했다. 이전의 포노그래프는 손으로 음반을 돌려야 했지만 이제는 에디슨이 만든 발전소를 통해 미국 곳곳에 전기가 공급되고 있었다. 자동으로 회전하는 전기 모터를 장착하고 새로운 브라운 왁스 실린더를 탑재한 ‘완벽한(Perfected) 포노그래프’를 1888년 발매했다.

한편, 에디슨에게 기술을 강탈당할 뻔한 에밀 베를리너는 벨에게 특허를 판매해 받은 자금으로 회사를 창업했다. 그도 에디슨에게 분했던 것인지, 에디슨의 코를 짓눌러줄 포노그래프 개발에 착수했다. 벨은 개선 수준에 그쳤지만 베를리너는 몇 단계 진보된 오디오를 원했다. 포노그래프는 소릿골이 종(縱)으로 새겨졌지만 베를리너는 횡(橫) 방식으로 음반도 원판 형태의 플레이트(Plate)로 교체했다. 이것이 현재의 턴테이블, LP의 원형이다. 베를리너는 자신의 오디오를 문자(Gramma), 음성(Phone)의 합성어, 그라모폰(Gramaphone)이라 명명했다.

베를리너, 세계 음반 유통시장 완성

에디슨포노그래프에 쓰인 브라운 왁스실린더레코드.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에디슨포노그래프에 쓰인 브라운 왁스실린더레코드.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베를리너의 위대함은 그라모폰 자체보다 음반 유통 시장을 완성했다는 점에 있다. 에디슨의 실린더는 대량 생산이 어려워 100장을 제작하기 위해 100번을 레코딩해야 했지만 플레이트는 1번 레코딩으로 몇 장이든 대량 생산할 수 있었다. 베를리너는 축음기보다 음반 시장이 더 큰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라 예견해 음반 유통을 담당하는 아메리카 그라모폰 사를 설립했고 이는 이후 빅터 레코드의 전신이다. 영국 지사는 이후 EMI가 되었고 사촌 동생에게 맡긴 독일 지사는 클래식 명가 도이치 그라모폰이 되었다. 일본 지사는 지금의 가전 기업 JVC로 남았다.

베를리너는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도 탁월했다. 영국 지사 베리 오언은 우연히 음악을 듣는 강아지 그림을 보고 반해 단번에 자사 로고로 채택했다. 이 강아지가 오디오 역사상 가장 유명한 강아지 니퍼(Nipper)다. 레코딩 기사 프레드릭 가이스버그는 새로운 음반 제작을 위해 전 세계를 누볐고 투어 중 이태리 밀라노에서 만난 젊은 테너에게 한눈에 반했다. 그에게 음반 취입을 강권했고, 이 앨범은 100만 장이 넘게 판매되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그가 최초의 레코드 스타 엔리코 카루소다. 가이스버그는 동양의 작은 나라 한국도 주목했다. 바쁜 자신을 대신해 동생 윌리엄 가이스버그가 1906년 12월 한국을 방문해 음반 101장을 레코딩해서 이듬해 발매했다. 한국에서 이뤄진 최초의 레코딩 사례다.

이후 음반 히트작들이 쏟아지며 오디오는 전 세계에 널리 보급됐지만 최초 발명가 에디슨은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자신의 회사를 모건에게 뺏기고 사명에서 자신의 이름마저 지우는 치욕까지 맛봐야 했다. 이 기업이 지금의 GE다. 에디슨을 통해 막대한 부를 움켜쥔 모건은 여전히 전화 사업에 대한 열망이 꺼지지 않았다. 전화 사업에 재도전했고 1875년 전화기 생산 기업 웨스턴 일렉트릭(Western Electric)까지 인수했다.

이후 벨과 치열한 소송전을 벌여야 했지만 상대를 현혹하는 그의 로비는 이번에도 빛을 발했다. 표면적으로는 벨에게 웨스턴 일렉트릭을 매각하며 전화 사업에 손을 떼는 듯 보였지만 실제 모건은 벨의 특허, 투자권을 독점하는 권리를 획득했다. 전기, 전구, 철도, 철강에 이어 미국의 전화 사업권까지 움켜쥐는 순간이었다.

모건은 탐욕의 화신이었지만 발명가, 엔지니어를 항상 우대했다. 웨스턴 일렉트릭 내에 연구소를 꾸려 엔지니어들이 최고의 연구를 할 수 있도록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벨과 모건이 세상을 떠나자 이들의 유지를 받들어 볼타 연구소와 웨스턴 일렉트릭 연구소를 통합한 벨 연구소(Bell Labs)를 개소했다. 자연스레 전 세계 최고의 인재들이 벨 연구소로 쏠렸다. 이후 오디오 혁신은 벨 연구소가 독점했다. 세계 최초 전기 녹음, 유성 영화 극장 시스템, 스테레오, 300B 진공관, 트랜지스터 발명이 모두 벨 연구소에서 나왔다. 벨 연구소의 판매를 담당한 자회사 웨스턴 일렉트릭은 오디오계의 전설로 남았다. 지난 100년간 벨 연구소는 3만 3000여 건의 특허, 13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초기 오디오 역사는 에디슨, 벨, 베를리너 3인의 발명가, 그리고 이들을 후원한 기업가 모건이 주도했다. 오디오는 모건의 도청 욕구의 부산물로 탄생했지만 이후 그가 소유한 회사와 그의 후원 덕택에 수많은 오디오 혁신이 이뤄졌다. 의도가 어찌 되었든 오디오 세계는 모건에게 적지 않은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모건의 탐욕이 있어 오디오가 세상에 움텄다.

이현준 오디오 평론가. 유튜브 채널 ‘하피TV’와 오디오 컨설팅 기업 하이엔드오디오를 운영한다. 145년 오디오 역사서 『오디오·라이프·디자인』을 번역했다. 한국 오디오 문화를 글로벌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 일에 소명의식을 갖고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