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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인욱의 문화재전쟁

이스라엘보다 14년 먼저 북만주에 유대인 자치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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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유대인, 실크로드의 또 다른 주역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중동전쟁이 다시 일어나면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과 다투는 국가로 알려졌지만, 사실 유대인의 나라는 100년도 되지 않았다. 그 이전 2000년간 그들은 유럽은 물론 유라시아 실크로드를 따라 사방으로 흩어져 살았다. 더욱이 만주 일대에도 세계 최초의 유대인 자치주를 이루며 특유의 적응력을 보여주었다. 실크로드 문화교류의 한 축을 맡았던 유대인에서 반목과 갈등의 역사에 대한 대안을 찾아본다.

아시케나지 유대인과 초원민족

흔히 유대인을 하나의 민족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그들은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면서 서로 다른 집단으로 갈라졌다. 그중 대다수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 유럽에서 오랜 기간 거주하며 외모도 다른 백인과 거의 차이가 없는 아시케나지다. 라인강을 중심으로 약 1000년 전에 동유럽에서 건너와 정착한 사람들이다.

1934년 헤이룽강 유역 첫 자치주
러 10월혁명 지지 대가로 땅 받아

고대 로마 때부터 동서교역 맡아
비단길 곳곳에 히브리 성경·문서

현지에 동화되며 문화충돌 없어
상호 인정과 공존의 가치 일깨워

이들이 유럽에 유입된 당시 우크라이나와 흑해 일대에는 몽골 인종이 다수를 차지한 투르크계의 하자르 칸국이 있었다. 그래서 아시케나지 유대인은 하자르 칸국에서 기원했다는 설도 있었다. 이 말이 맞는다면 아시케나지(유대인의 약 80%)가 실제 이스라엘이 아니라 구소련 사람들이 유대교를 믿으면서 ‘유대인’처럼 살았다는 뜻이 된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벗어난 출애굽 사건을 기념하는 유월절 행사를 맞은 러시아의 유대인들. 유대인은 실크로드를 따라 동서 문화교류에 기여했다. [사진 리아 노보스티, 위키피디아]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벗어난 출애굽 사건을 기념하는 유월절 행사를 맞은 러시아의 유대인들. 유대인은 실크로드를 따라 동서 문화교류에 기여했다. [사진 리아 노보스티, 위키피디아]

이스라엘 학자들은 DNA 분석 등을 내세우며 이 이론에 강력히 반박한다. 사실 하자르 칸국 자체가 다양한 민족이 섞인 유목민이고, 그들의 유전자도 정확히 밝혀진 것이 없다. 재미동포가 미국에서 살면 미국 문화와 융합되듯 유대인이 하자르 칸국에 살았다면 그들과 자연스럽게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유대인이 하자르 기원설에 반발하는 것은 반유대주의와 나치의 인종청소 등에 이 가설이 동원됐기 때문이다.

반면 ‘아시케나지’ 이름과 유라시아 기마민족인 ‘스키타이’ 사이엔 관계가 있다. 아시케나지는 구약성경과 히브리성경에 등장하는 노아의 후손으로 처음 등장한다. 아시리아 설형문자에 ‘아스쿠자이’(Aškuzai)로도 표기된 이 이름은 ‘스키타이’를 의미한다.

스키타이인은 기원전 8세기경 흑해 연안에서 근동 지역으로 진출했고, 뛰어난 군사술로 이집트까지 진출할 정도였다. 게다가 북이스라엘왕국을 무너뜨린 신아시리아(앗수르)에 맞서 연합군을 결성할 정도였다.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스키토폴리스(스키타이의 도시)라는 지명과 함께 스키타이 계통의 유물이 발굴되고 있다. 북방에서 내려온 아시케나지는 이후 북방 산악지역에 살던 유대인 이름으로 널리 통용됐고, 이것이 지금의 아시케나지 유대인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졌다. 물론 아시케나지 유대인이 스키타이족의 일부라는 뜻은 아니다. 유대인 형성의 초기 단계부터 유라시아 초원 지역의 문화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는 뜻이다.

중국 카이펑에 독립공동체 형성

헤이룽 강 주변 러시아 유대인 자치주에 서 있는 지붕 위의 바이올린 동상. 러시아의 대표적인 유대인 작가인 숄롬 알레이헴을 기념하여 세운 것 이다. [사진 리아 노보스티, 위키피디아]

헤이룽 강 주변 러시아 유대인 자치주에 서 있는 지붕 위의 바이올린 동상. 러시아의 대표적인 유대인 작가인 숄롬 알레이헴을 기념하여 세운 것 이다. [사진 리아 노보스티, 위키피디아]

유대인이 본격적으로 실크로드에서 활동한 것은 서기 70년 로마제국에 의해 유대인의 디아스포라가 시작된 이후이다. 한나라와 로마를 중심으로 실크로드가 열리던 때였다. 실크로드는 교역을 위해 발달한 것이니, 이재에 밝은 유대인이 모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다만 그들은 거대 도시나 국가를 건설하지 않고 이미 있는 도시에 진출해서 금융과 교역을 담당했다. 유대인 공동묘지도 아프가니스탄 가즈니에서 발견됐다. 이들은 페르시아 계통으로 실크로드에서 나온 거의 유일한 무덤이다. 그 외에 간혹 발견되는 유대인 흔적은 히브리어 문헌 정도다.

현장 법사의 『대당서역기』에서 아프가니스탄 조구타국(漕矩陀國)의 종교를 언급하는데, 그중 다른 종교에서는 쓰지 않는 이름이 등장해서 유대교의 모세로 추정하기도 한다. 또 중국 신장지역에선 서기 8세기경부터 유대인의 흔적이 등장한다. 옛 호탄 왕국의 단단 윌릭(Dandan-Uiliq)과 둔황에서는 히브리어 성경이 발견되기도 했다.

20세기 초반 중국 카이펑 유대인의 예배 모습. [사진 리아 노보스티, 위키피디아]

20세기 초반 중국 카이펑 유대인의 예배 모습. [사진 리아 노보스티, 위키피디아]

중국에서는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온 유대인 상인을 술홀·석홀 등으로 불렀다. 유대인을 지칭하는 예후디(Yehudhi, Yahud)에서 유래한다. 중국의 유대인이 번성한 시기는 서기 10세기 이후다. 우리나라 고려시대에 해당하는 송·원 시대였다. 그 이전 당나라 때는 소그드 상인이 널리 활약했는데, 시대가 바뀌면서 유대인이 그들의 상권을 물려받았다. 중국에서 발견되는 유대인 유물에는 막연히 ‘상인’으로만 알려진 그들의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중국의 유대인은 외모와 문화는 중국에 동화됐지만 그들의 종교를 지키며 지금껏 카이펑(開封) 일대에서 독립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다. 흔히 ‘카이펑 유대인’이라고 하는 중국의 토착 유대인은 유럽과 달리 중국에선 별다른 차별을 받지 않고 그 세력을 유지해 왔다. 송단단(宋丹丹)같은 유명 연예인은 자신이 유대인 출신임을 내세우기까지 한다.

우리 역사 북방의 유대인 문화

카이펑 유 대인 출신의 중국 국민배우 송단단. [사진 리아 노보스티, 위키피디아]

카이펑 유 대인 출신의 중국 국민배우 송단단. [사진 리아 노보스티, 위키피디아]

자기 땅이 없이 2000년간 떠돌던 유대인만의 자치 공간이 생긴 것은 이스라엘이 처음이 아니다. 이스라엘 건국 14년 전인 1934년에 소련에서는 아무르강 유역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건너편에 남한 3분의 1 크기의 땅을 떼어서 유대인 자치주로 만들었다. 제정 러시아 때 탄압받았던 유대인이 러시아 10월 혁명을 지지한 대가였다.

유대인이 땅을 받은 지역은 한국 고대사와도 관련 있는 읍루와 말갈 지역이다. 읍루는 고구려와 발해 시기에 말갈로 계승되었고, 그들의 일부는 함경도 일대의 여진으로 이어졌다. 또한 이 지역에는 고구려 계통의 불상과 발해 계통의 성터와 유물도 발견된 적이 있다.

이 유대인 자치주에서 발견된 대표적인 고대 유적으로 ‘나이펠드 문화’가 있다. ‘나이펠드’는 이디시(유럽 유대인이 쓰는 말)어로 새로운 벌판(New Field)라는 뜻으로, 고구려와 발해에 복속됐으며 신라에도 조공을 온 흑수말갈(黑水靺鞨)을 의미한다.

읍루인의 유적도 유대인 자치주에서 처음 발견되었으니, 고고학계에선 이를 ‘폴체 문화’라 부른다. 넓은 벌판이라는 뜻으로 여기에 정착한 러시아계 유대인 사투리에서 기원한다. 우크라이나와 동유럽에서 살던 유대인은 스탈린 시절에 이렇듯 극동 지역으로 이주했고, 그들도 우리처럼 넓은 벌판을 찾아 곳곳에 정착했다. 그리고 우리 역사 속 북방민족 문화에도 유대인의 명칭이 붙게 됐다.

동방에 정착한 유대인은 하얼빈·상하이 등으로 진출해서 서구의 금융·학문·예술을 전파하는 데 기여했다. 서양인과 외모 차이가 없었기에 탄압을 받지 않고 유럽의 선진문화를 퍼뜨렸다.

현재 유대인은 근대 이후 산물

폴 펠리오가 발견한 둔황의 히브리어 문서. [사진 리아 노보스티, 위키피디아]

폴 펠리오가 발견한 둔황의 히브리어 문서. [사진 리아 노보스티, 위키피디아]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처럼 유대인은 흔히 탐욕스러운 자본가 이미지로 그려졌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유대인의 의미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들은 세계 곳곳에서 수천년간 거주하면서 다양한 인종적 특징을 드러냈다. 중국에는 카이펑 유대인이, 중앙아시아에는 실크로드에 잔류한 ‘부하라 유대인’이 있었다. 또 아프리카에는 에티오피아 유대인이 있다.

중국 신장성 단단울릭에서 발견된 히브리 문서. [사진 리아 노보스티, 위키피디아]

중국 신장성 단단울릭에서 발견된 히브리 문서. [사진 리아 노보스티, 위키피디아]

이스라엘 역사학자 슐로모 산드는  『만들어진 유대인』에서 지금의 유대인은 근대 이후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론도 있겠지만 오늘의 이스라엘은 유라시아 각지에 따로 살던 유대인이 다시 모여 건국한 것임은 분명하다. 유대인은 순수한 단일민족 혈통이 아니라 유대교라는 종교로 하나가 되어서 다양한 지역 간의 교역과 지식 전달을 담당하던 네트워크였다. 땅에 얽매이지 않고 여러 지역을 오가면서 무형의 자본·지식·예술 등에 집중했기에 20세기 이후 세계의 중심에 설 수 있었다.

유대인이 이스라엘을 다시 세운 명분은 그들의 역사였다. 2000년 전에 살았다는 것을 근거로 나라를 세우고 영역을 넓히며 주변 지역과 갈등을 일으켰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의 건국은 문화재 전쟁의 원조인 셈이다.

전쟁에 휩싸인 이스라엘의 오늘

사실 팔레스타인은 역설적으로 고대 이스라엘의 모습과 가장 유사하다. 예컨대 2000년 전 한국인이 한반도를 떠나서 아프리카 대륙으로 이주해서 현지에 동화됐다고 가정해보자. 흑인화가 진행된 그들보다 한국과 대립하던 여진족·몽골족이 원래 한국인 모습에 더 가깝지 않겠는가.

유대인은 소그드인을 이어 실크로드와 동아시아에서 최근까지 동서문명의 교류에 이바지하며 토착인과 자연스럽게 공존했다. 영토에 대한 다툼도 없었고 각자의 장점을 인정하며 살아왔다. 대대적인 박해도 없었다. 중동 전쟁에 세계가 긴장하고 있는 지금, 유라시아 유대인의 생존 방식이 더욱 소중해 보인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