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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류태형의 음악회 가는 길

펜싱에서 떠올린 ‘로미오와 줄리엣’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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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류태형
류태형 기자 중앙일보 객원기자·음악칼럼니스트
류태형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류태형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항저우 아시안게임이 초가을을 달궜다. 대회 초반에 펜싱 경기가 눈길을 끌었다. 금6 은3 동3의 한국은 중국과 일본을 누르고 4회 연속 아시아 최고임을 재확인했다. 한국 펜서들의 선전에 환호하며 펜싱의 매력에 푹 빠졌다. 상대를 몰아붙였다 빠졌다 하며 찌르고 막는 날렵한 동작은 예술적이었다.

펜싱 경기를 보며 환청처럼 떠오른 음악이 있다. 프로코피예프의 발레음악 ‘로미오와 줄리엣’ 모음곡 중 ‘티볼트의 죽음’이다. 원수 집안인 몬태규가의 로미오와 캐퓰릿가의 줄리엣이 비밀 결혼식을 올리지만 두 가문의 갈등은 지속된다. 캐퓰릿가의 티볼트에게 친구 머큐쇼를 잃은 로미오는 칼싸움 끝에 티볼트를 죽인다.

몬테카를로 발레단의 ‘로미오와 줄리엣’. [사진 수성아트피아]

몬테카를로 발레단의 ‘로미오와 줄리엣’. [사진 수성아트피아]

캐퓰릿가 사람들은 몬태규가에 대한 복수를 다짐한다. 격렬한 칼싸움을 연상시키고 쓰러진 티볼트의 장송행진곡이 연주되는 ‘티볼트의 죽음’은 다이내믹하고 그로테스크하며 ‘톡 쏘는’ 프로코피예프다운 음악이다.

이탈리아 베로나를 무대로 하는 ‘로미오와 줄리엣’은 셰익스피어가 1595년 무렵 쓴 희곡이다. 그가 처음 쓴 작품은 아니다. 말리면 더 불붙는 젊은 남녀의 사랑은 일찍이 보편성을 획득했다. 셰익스피어보다 65년이나 먼저 이 내용을 쓴 작가는 루이지 다 포르토다. 포르토의 원작을 징가렐리, 바카이(줄리에타와 로메오), 벨리니(카풀레티가와 몬테키가) 등이 오페라로 작곡했다.

한편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베를리오즈가 극적 교향곡으로, 구노가 오페라로, 차이콥스키가 환상 서곡으로, 프로코피예프가 발레 음악으로 써서 널리 퍼져갔다.

프로코피예프의 발레는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존 크랑코, 프랑크푸르트 발레단의 존 노이마이어, 몬테카를로 발레단의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 등 여러 안무 버전이 있다.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은 부상의 위험도 따르기에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실제로 공연 중 로미오와 티볼트의 펜싱 장면에서 무용수의 다리를 찌른 일도 있었다.

이달과 다음 달 ‘로미오와 줄리엣’이 찾아온다. 먼저 모나코의 왕립발레단인 몬테카를로 발레단이다. 예술감독인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의 안무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거리보다 사랑과 죽음의 재현에 중점을 둬 인상적인 무대가 기대된다. 지난 7일 대구 공연에 이어 13~15일 서울 예술의전당, 18일 강릉아트센터 무대에 오른다. 유일한 한국인 수석무용수 안재용이 티볼트 역으로 출연한다.

11월 17일 국립심포니는 다비트 라일란트의 지휘로 베를리오즈의 극적 교향곡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주한다. 독창자, 합창단과 관현악단을 위한 ‘드라마가 있는 교향곡’이다. 셰익스피어 이전에도 있었던, 이 유구한 사랑과 죽음의 서사는 여전히 우리를 사로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