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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오준의 퍼스펙티브

EU처럼 유엔 의사결정에 인구·국력 차이도 반영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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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위기의 유엔, 어떻게 바꿀 수 있나

오준 경희대 석좌교수·전 유엔대사

오준 경희대 석좌교수·전 유엔대사

이렇게 생각해 보자. 어느 나라에 정부나 경찰이 기능을 못 하는데 조직폭력 집단만 50개가 있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이들은 서로 피 흘리며 다투다가 나름대로 질서를 유지하는 게 모두에게 이익임을 깨닫고 협의체를 만들었다. 각자의 영역을 인정하면서 남의 영역을 침범하는 조직이 있으면, 나머지 집단이 단합해 응징한다는 게 합의였다.

그중에 가장 힘이 강한 ‘5대 패밀리’는 예외로 했다. 이들은 합의를 주도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스스로 깨지는 않을 거라는 기대와 함께 실제로 나머지 조폭들이 힘을 합쳐도 이들 하나를 상대하기도 어렵다는 현실적 고려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5대 패밀리 중 하나가 다른 중소 조폭의 영역을 힘으로 빼앗으려 해서 큰 싸움이 났다. 이 싸움이 어떻게 끝나든 간에 과연 50개 조직의 협의체가 앞으로 계속 유지될 수 있을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두 차례 세계대전 반성하며 유엔 창설, 무력 사용권까지 부여
우크라 전쟁으로 한계 노출…안보리 상임국의 거부권이 난제
‘세계정부’ 역할 막는 최대 걸림돌은 국가별 ‘주권평등의 원칙’
EU의 이중다수결제도 주목…한국도 유엔 개혁에 동참해야

바이든의 안보리 이사국 확대 요구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9월 19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제78차 유엔총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안보리 상임이사국과 비상임이사국 수를 늘리는 것을 포함해 유엔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AP=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9월 19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제78차 유엔총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안보리 상임이사국과 비상임이사국 수를 늘리는 것을 포함해 유엔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AP=연합뉴스]

이것이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유엔 개혁 필요성이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는 국제사회의 메타버스 버전이다. 1945년 유엔을 창설한 51개의 원 회원국은 국제 평화와 안보의 유지를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았다. 집단안보를 위한 강제력이 없어서 독일과 일본의 침략 행위를 막지 못한 국제연맹의 실패를 교훈 삼아 안전보장이사회라는 강력한 기구를 만들고 무력 사용 권한도 부여했다.

그러나 이때 유엔을 만든 5개 강대국, 즉 안보리 상임이사국(P5)은 강제력의 칼날이 자신들을 향하지는 못하도록 안전장치를 만들었다. 상임이사국의 거부권 제도가 그것이다. 이 때문에 상임이사국은 불법적 전쟁을 일으켜도 유엔이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가 없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처럼 국제 평화유지 메커니즘에서 가장 큰 약점을 노출했다. 따라서 유엔을 개혁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9월 19일 유엔총회 연설에서 안보리를 확대하고 상임이사국과 비상임이사국의 수를 늘릴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윤석열 대통령도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안보리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폭넓은 지지를 받는다”고 말했다. 78년 전 강대국들을 유엔에 참가하게 하려고 부여한 특권이 그들의 전횡 수단이 돼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민주주의와 전체주의 대립 격화

그러면 이러한 움직임은 실제 유엔의 개혁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해 제대로 된 개혁이 가능할지는 미지수다. 20세기 이후 국제사회는 참혹한 전쟁을 겪고 나면 국제협력을 강화해 인류의 미래를 확보하려는 진지한 노력을 보였다.

예컨대 1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국제연맹과 민족자결주의가 태어났고,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유엔이 창설돼 국제 평화유지에 우선순위를 부여하게 됐다. 집단적 성찰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런 움직임은 국가중심주의가 통제되지 않으면 국가 간의 충돌을 가져오고 인류의 생존까지 위협할 수 있음을 비싼 대가를 치르고 깨닫게 되면서 가능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영향만을 놓고 볼 때 국제평화 체제를 개혁해야 인류의 미래가 있다는 절실함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모든 상임이사국이 동의하지 않는 한 유엔 헌장 개정이 불가능한 현실에서 완전히 판을 새로 짜는 수준의 변화를 추구할 정치적 의지는 어느 강대국에도 없어 보인다.

바이든 대통령이 말하는 안보리 확대도 러시아와 중국을 몰아붙이는 효과를 보면서 일본·독일·인도와 개발도상국 등에 대한 립서비스 차원으로 보는 것이 더 현실적일 것 같다.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서방 세력과 중국·러시아 등 전체주의 세력의 대립 양상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의 세계에는 우크라이나 전쟁만이 중요한 변수가 아니다. 특히 세계화라는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현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류는 오랜 시간에 걸쳐 과학·기술의 발달로 세계를 하나의 지구촌으로 만들었다. 과거에는 국가들이 싸우고 반목하면 문을 걸어 잠그고 살면 됐지만, 상호의존도가 절대적으로 높은 오늘의 세계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글로벌 시대의 ‘세계정부’ 역할해야

아무리 자기중심적인 국가도 각자도생은 결국 공멸로 간다는 사실을 깨닫는 게 별로 어렵지 않다. 따라서 국제사회가 어떻게 지구적 도전을 극복하고 글로벌 거버넌스를 강화할 수 있을지가 인류 공동체의 미래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유엔을 중심으로 한 글로벌 거버넌스를 강화하려면 유엔이 점차 ‘세계정부’에 가까운 역할을 하도록 해줘야 한다. 그러려면 넘어야 할 과제가 많다. 가장 큰 난관은 역설적이게도 국가 주권 평등의 원칙이라고 생각한다. 수백 년간 모든 국가가 인구나 국력과 관계없이 평등한 주권을 갖고 있다는 원칙은 국제관계의 기초가 됐다.

잘 생각해 보면 이러한 원칙은 상당히 인위적이다. 국가는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고 인간이 만든 것인데, 왜 국가는 모두 동일한 주권을 가진 것으로 인정해야 할까. 역사적으로 봐도 주권 평등의 원칙을 철저히 적용하려 했던 국제연맹은 결국 강대국들의 외면으로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이런 교훈을 염두에 두고 탄생한 유엔은 국제적 현실을 제도에 반영하려 했으나 결국에는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가진 안보리에만 집중됐다. 결과적으로 안보 분야에서는 강대국들의 권한을 지나치게 반영해 놓아서 국제분쟁 시 유엔의 행동이 제약되는 일이 흔하다. 경제·사회·환경·인권 문제들에서는 유엔이 구속력 있는 결정을 할 수 없어 실효성이 의문시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주권 인정하되 국가별 차이도 고려

이렇게 볼 때 유엔의 개혁은 국가들의 주권을 인정해 주면서도 인구나 국력의 차이가 반영되는 거버넌스 체제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이 대목에서 참고할 수 있는 예가 미국의 연방제도나 유럽연합(EU)의 의사결정 방식이라고 본다.

예컨대 미국은 50개 주의 자치권을 인정해 연방 상원은 각 주에서 2명씩 선출한 상원의원으로 구성된다. 하지만 대통령과 하원은 인구에 기초한 선거를 통해 선출한다. EU도 원칙적으로 모든 회원국이 동등한 자격으로 가입하지만, 이사회는 회원국 55%, 전체 인구의 65% 찬성이라는 이중다수결 제도를 적용해 다수 인구의 의사를 존중한다. 이런 제도들을 원용한 유엔의 개혁이 현시점에서는 비현실적으로 보이지만, 언젠가는 진지하게 논의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은 유엔의 개혁에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한 마디로 민주주의의 국제적 확산과 글로벌 거버넌스의 강화에 기여해야 한다고 본다.

20세기에 두 차례 세계대전을 시작했던 독일과 프랑스 간에 다시 전쟁이 발생할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것은 그들의 상호의존성이 너무 크고 민주주의가 지배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국가는 서로 싸우지 않는다’는 철학자 칸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세계 민주국가들의 러시아에 대한 제재가 유엔의 군사개입보다 오히려 더 큰 압박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은 일리가 있다.

지난 70년간 국제사회에서 민주국가의 비율은 2배 증가해 전 세계 국가의 60% 이상이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다. 어려운 과정을 거쳐 민주화를 이룩한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확산으로 국가 간의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추세가 강화될 수 있도록 기여해야 한다. 더 많은 국가가 민주적 결정을 통해 국민 다수가 원하는 선택을 함으로써 무력 분쟁의 가능성을 줄이는 것이다.

한국, 국제평화·안보에 앞장서야

또한 한국은 국제 평화와 안보를 위한 글로벌 거버넌스를 강화하는 데도 앞장설 필요가 있다. 한국처럼 국토가 크지 않고 대외의존도가 높은 국가는 국제관계가 법과 질서에 따라 예측할 수 있게 유지되는 것이 이롭고 바람직하다.

전쟁을 막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튼튼한 국방력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모두가 힘의 경쟁에만 치중한다면 그러한 평화는 불안한 공존이 될 뿐이다. 결국 인류 문명의 발전이 과거의 오류를 성찰하고 전쟁과 평화의 끝없는 반복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가져오게 해야 지속적인 평화가 가능하다. 국가 간의 역사가 단순한 역학관계의 반복이 아닌 큰 방향성이 있는 변화로 채워질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한 때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오준 경희대 석좌교수·전 유엔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