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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정탁의 인문지리기행

“모기” “빈대” 으르렁댄 노·소론, 껍데기 유학의 폐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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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논산 황산서원과 이념 갈등

김정탁 노장사상가

김정탁 노장사상가

오늘날 우리나라 정치지형은 지역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역 요인 중에서도 영남과 호남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다. 그래서 여당과 야당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도 ‘영남당’ ‘호남당’이라고 하면 어느 당을 지칭하는지 금세 안다. 그럴 정도로 양당은 50년 넘게 영남과 호남을 기반으로 각자의 지지층을 확보해 왔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이런 경향이 더욱 심해져 특정 지역에서 특정 정당이 의석을 독점하는 기형적 현상이 일반화하고 있다. 정당은 계층과 집단 등 다양한 이해를 대변하는 조직이어야 하는데 지역 요인에 의해 당의 정체성이 좌우되는 형편이다.

금강 절경과 어울리는 황산서원
노론 송시열의 ‘거친 입’과 대비

주자 해석 둘러싸고 나라가 분열
잇단 음모와 탄핵에 혼인도 기피

‘서원의 고장’ 논산의 뜻은 어디에…
진영 싸움에 갇힌 지금을 보는 듯

특정 지역에 의존하는 한국 정치

금강 하류에 위치한 황산서원 내부 모습. 노론의 영수 송시열이 소론에 맞선 곳이다. [사진 김정탁]

금강 하류에 위치한 황산서원 내부 모습. 노론의 영수 송시열이 소론에 맞선 곳이다. [사진 김정탁]

물론 이런 현상을 꼭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미국에서도 지역에 따른 정치지형이 분명히 존재한다. 크게 보아 민주당은 동부와 서부해안에서 강하고, 공화당은 남부와 중서부에서 강하다. 그렇더라도 특정 지역에서 한 정당이 독식하는 경우는 드물고, 또 특정 지역이라도 지지층의 변화는 계속된다. 남북전쟁 이후 북쪽의 공화당과 대항하기 위해 남부를 배경으로 성장한 민주당이 그렇다.

그래서 남부는 원래 민주당의 아성이었는데 지금은 공화당 텃밭으로 바뀌었다. 지금 우리로선 이런 변화를 상상하기 힘들다. 영남이 더불어민주당의 기반이 되고, 호남이 국민의힘 기반이 된 것과 같아서다.

금강 하류에 위치한 황산서원 외부 모습.

금강 하류에 위치한 황산서원 외부 모습.

지역에 따른 정치지형은 우리나라에서 그 뿌리가 깊어 이미 조선 중기부터 있었다. 선조 때 사림(士林)이 훈구세력을 대신해 영향력을 키우자 일단 동인과 서인으로 나누어졌다. 동인과 서인이란 이름은 김효원과 심의겸이 이조정랑 자리를 두고 다퉜을 때 김효원이 한양 동쪽에 살고, 심의겸이 서쪽에 살아서다.

그런데 이는 편의상의 구분이고, 지역에 따른 정치지형이 실제로 존재했다. 서인은 자신의 세를 경기도 북부인 파주에서 시작해 기호지방으로 확장했고, 동인은 그 한 갈래인 북인이 광해군 몰락과 함께 사라지자 남인으로 명맥이 이어지면서 영남을 기반으로 뿌리를 내렸다.

학문인가 종교인가, 주자학의 변질

윤증의 집인 명재고택. 사진 가운데의 사랑채 앞에는 담이 없다. [사진 김정탁]

윤증의 집인 명재고택. 사진 가운데의 사랑채 앞에는 담이 없다. [사진 김정탁]

영남이 남인의 본거지가 된 데는 퇴계의 영향력이 무엇보다 크다. 남인의 원조 격인 동인이 퇴계를 종주로 삼아서다. 퇴계가 세운 안동 도산서원은 남인에겐 정신적 의지처였다. 반면 서인은 송익필과 그의 수제자 김장생, 또 그의 아들 김집이 조선 유학의 맥을 예학(禮學)으로 이었는데, 그 중심에 논산 돈암서원이 있었다.

그리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 예학이 조선왕조를 지탱해준 기반이 되면서 서인은 정계 실세로 부상했다. 게다가 송시열과 송준길 대에선 주자학이 조선 성리학의 주류가 되었는데, 이때 주자학은 서인에게 학문을 넘어서 종교로 변질하였다. 그 결과 당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서인 예학의 근거지인 돈암서원. [사진 김정탁]

서인 예학의 근거지인 돈암서원. [사진 김정탁]

한편 율곡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사후에 서인의 종주로 받들어졌기에 억울해할 수 있다. 율곡은 개혁성에서 이들 서인과 큰 차이를 보여서다. 서인, 그중에서도 노론은 예학의 강화를 통해 노비를 해방하는 면천법 폐지와 조세 비리를 차단하는 대동법에 대체로 반대했다. 반면 율곡은 개혁적 성리학자로 면천법과 대동법의 원조인 대공수미법 실시에 누구보다도 앞장섰다. 율곡의 이런 개혁적 태도가 이들 서인에 이르러서 예학으로 변한 건 조선 성리학이 사회 변화를 흡수하지 못하고 관념에 빠져서다. 그렇다면 이들은 율곡 사상의 진수를 계승한 게 아니라 껍데기 학맥만을 이은 셈이다.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진 서인

이런 서인도 숙종 때는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졌다. 서인의 실력자 김석주가 빌미를 제공했는데 숙종의 외삼촌 김석주가 숙종의 장인 김만기와 함께 척신정치를, 또 어영대장 김익훈과 함께 공작정치를 벌여 상당수 남인을 제거했다. 그러자 서인 내에서도 이들의 행동을 두고 논란이 크게 일었다.

우암 송시열

우암 송시열

이때 송시열이 스승의 손자인 김익훈을 처벌할 수 없다고 하자 박세채가 송시열을 비판했다. 이에 박세채는 신진 사림의 희망으로 떠오르면서 소론 영수로 추대되었다. 윤증(尹拯)도 남인을 적으로 모는 김석주 태도에 반대해 박세채와 함께 소론을 이끌었다. 한편 송시열을 옹호한 사람들은 노론을 형성했다.

그 후 노론과 소론 간에 벌어진 당쟁은 이전에 동인과 서인 간에 벌어진 당쟁 못지않게 치열했다. 얼마나 치열했는지 노론은 소론을 ‘모기’라 부르고, 소론은 노론을 ‘빈대’라 부른 데서도 잘 나타난다. 상대방을 모기와 빈대로 호칭한 건 소론은 틈만 나면 물기를 일삼고, 노론은 끊임없이 음모를 잘 꾸며서라고 보아서다.

송시열과 윤증, 대 이은 갈등

소론 윤문거·윤선거·윤증을 배향한 노강서원 입구. 지금은 수리 중이다. [사진 김정탁]

소론 윤문거·윤선거·윤증을 배향한 노강서원 입구. 지금은 수리 중이다. [사진 김정탁]

이런 가운데 이인좌의 난이 발생하고, 소론 김일경의 탄핵으로 노론 사대신인 김창집·이이명·조태채·이건명이 죽는 일까지 벌어지자 노론과 소론은 도저히 화해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혼인도 서로 기피했는데 같은 지역에 살던 안동 김씨와 안동 권씨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노론과 소론의 갈라짐은 송시열과 윤증의 아버지인 윤선거(尹宣擧) 간에 이미 잉태되었다. 이는 윤휴에 대한 서로 다른 태도에서 비롯되는데 윤휴는 효종의 뜻에 따라 청나라를 치기 위한 북벌을 실제로 준비했다. 그러니 말로만 북벌을 외친 송시열에겐 부담스러웠다.

또 송시열은 주자 해석만을 받든 데 반해 윤휴는 성리학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을 내놨다. 송시열이 이런 윤휴를 두고 사문난적으로 몰자 윤선거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자 윤휴보다 먼저 벌 받을 거라는 악담을 윤선거에게 퍼부었다. 이런 갈등은 윤선거 아들로까지 이어져 윤증과 송시열이 벌인 유명한 회니시비(懷尼是非)를 낳았다.

윤증 고택에 담이 없는 까닭

명재고택 옆에 위치한 궐리사. [사진 김정탁]

명재고택 옆에 위치한 궐리사. [사진 김정탁]

송시열이 윤선거에게 험한 말을 퍼부은 곳이 논산의 황산서원(黃山書院)이다. 지금은 죽림서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서원으로 아담하게 지어져 처음 찾아갔어도 왠지 친근감이 느껴진다. 또 그 옆에 흐르는 금강은 비단처럼 아름다워 황산서원과 조화를 잘 이룬다. 이런 곳에서 송시열의 입에서 험한 말이 나왔다는 게 좀체 믿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논산은 좋은 서원이 많기로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김장생과 김집을 배향한 돈암서원과 윤황·윤문거·윤선거·윤증을 배향한 노강서원이 으뜸이다. 두 서원은 서인과 소론을 각기 대표하는 서원인데 서로 가깝게 있는 게 이채롭다.

명재 윤증

명재 윤증

또 논산에는 공자가 태어나고 자란 중국 권리촌(闕里村)의 이름을 따 만든 궐리사란 사당이 있다. 이 사당은 송시열이 원래 세우려고 했는데 정읍에서 사약을 먹고 일찍 죽는 바람에 제자들에 의해 세워졌다. 그리고 궐리사 바로 옆에는 소론의 영수였던 윤증의 집이 있다. 이 집은 윤증의 호를 따 명재(明齋) 고택이라 불린다.

노론은 하필 윤증의 집 바로 옆에 궐리사를 지었을까. 윤증의 집에 누가 드나드는지 감시하기 위해서라는 설이 있는데 이를 뒷받침하기라도 하듯 명재 고택에는 담이 없다. 누가 드나드는지 노론에게 죄다 공개하겠다는 윤증의 역발상 때문이다.

나라 전체가 ‘당쟁의 논산’이 된 듯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논산이란 지명에는 특이하게 논(論)이란 단어가 있다. ‘논’이란 ‘말하다’ ‘사리를 밝히다’라는 걸 뜻하는데 지명에 어째서 이런 단어가 들어갔는지 언뜻 이해되지 않는다. 논산이란 지명은 영조 때 편찬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처음 등장하는데 한자어 ‘답산(畓山)’과 실제 부르는 ‘논뫼’ 간에 차이가 커서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자 그 음과 뜻을 살려 논산으로 표기했다고 한다. 지금의 논산은 일제강점기 때 강경읍과 연산현·노성현·은진현 일부가 통합돼 만들어졌다. 그렇더라도 노론과 소론 간의 당쟁에서 보듯이 논쟁(論)이 많아 논산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도 좀체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은 나라 전체가 논산처럼 돼간다는 느낌이 든다. 정치권이 진영 논리만 내세워 합의는 사라지고 논쟁이 넘쳐나서다. 한편 윤석열 대통령은 소론 영수였던 윤증의 후손이고, 이해찬 전 총리는 충남 청양이 고향인데 여기는 노론 세가 절대적이다. 그래서인지 조선의 당파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힘을 발휘하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드는 데 이건 비단 필자만의 생각인지….

김정탁 노장사상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