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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임종주의 시선

추석 밥상머리 담론의 무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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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임종주
임종주 기자 중앙일보
임종주 정치에디터

임종주 정치에디터

추석 연휴 초입에 낯선 뉴스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 중인 자동차 노조원들을 찾아갔다.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사진을 찍더니 확성기까지 손에 들고는 “계속 투쟁하라”고 독려했다. 2020년 미국 대선을 전후로 워싱턴 특파원을 지낸 필자는 이런 광경을 보거나 들은 기억은 없다. 백악관은 “현직 대통령의 노조 파업시위 참여는 처음”이라며 대대적으로 홍보까지 했다. 그만큼 한 표가 아쉽다는 방증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6일(현지시간) 미국 미시간주 웨인 카운티의 제너럴모터스 물류센터 인근에서 파업 중인 전미자동차노조(UAW) 조합원들의 파업 집회에 동참해 확성기를 들고 연설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6일(현지시간) 미국 미시간주 웨인 카운티의 제너럴모터스 물류센터 인근에서 파업 중인 전미자동차노조(UAW) 조합원들의 파업 집회에 동참해 확성기를 들고 연설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그보다 열흘여 앞서 워싱턴포스트(WP)는 “바이든이 2024년 대선에 출마해선 안 된다”는 칼럼을 실었다. 바이든이 좋아하는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이그나티우스가 "말하기는 고통스럽지만, 바이든 대통령과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은 재선에 도전하지 말아야 한다"고 공개 촉구했다. “바이든이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할 때면 82세가 될 것”이라며 제론토크라시(고령 정치)를 가장 큰 걸림돌로 꼽으면서다.

바이든의 강력한 지원군이던 WP의 변심(?)과 현직 대통령의 파업시위 동참이라는 파격 행보의 기저엔 다름 아닌 트럼포비아(트럼프 공포)가 똬리를 틀고 있다. 트럼프 포퓰리즘의 회귀가 미국을 다시 망가뜨리고 세계를 전쟁 위기로 몰아넣을 것이라는 불안감이 확산한다. 워싱턴 정가에선 트럼프 방어(Trump-proof)라는 신조어도 회자한다. 트럼프 재집권에 대비해 대통령 권한을 견제하는 입법 알박기를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5일(현지시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서머빌에서 열린 집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5일(현지시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서머빌에서 열린 집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AP=연합뉴스

트럼프 재선 도전 열차는 실로 파죽지세다. 지난달 24일 공개된 WP·ABC 여론조사에선 지지율 51%로, 42%에 머문 바이든을 무려 9%포인트 차이로 따돌렸다. 오차범위를 꽤 벗어난 수치다. WP도 놀란 듯 “이상 수치일 수 있다”고 전제해 “자사 조사결과를 스스로 먹칠한다”는 트럼프 캠프의 조롱까지 받았다. 트럼프는 공화당 경선 레이스에서도 59%로 압도적 독주 체제다. 2위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16%)와의 격차는 무려 40%포인트가 넘는다.

쇠락한 공업지대 백인 노동자 계층을 중심으로 움텄던 트럼프 열성 지지층은 속속 재결집 태세다. 영국 경제학자 노리나 허츠는 이들이 트럼프의 ‘MAGA(Make America Great Again,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슬로건에 취하게 된 심리적 기제는 고립과 허무, 소외, 그리고 지위·자긍심의 상실이 복합적으로 맞물려 작용하는 ‘외로움’이라고 진단했다. 이는 주변에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의 물리적 차원이 아닌 소통과 단절에서 비롯되는 문제다.

극단과 광기, 포퓰리즘은 이 틈을 놓치지 않는다. “과거 일터를 비롯한 공동체에서 느끼던 전통적 유대감을 상실한 이들은 어딘가에 소속되기를, 무언가의 일부이기를 갈망한다. 트럼프는 바로 이 욕구에 직접 말을 걸었다 (…) 트럼프의 정책이 실제로 그들의 삶을 개선해줄지 여부보다 더 중요했다.”(노리나 허츠 『고립의 시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AF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AFP=연합뉴스

오래전 나치의 전략도 이와 흡사했다. 독일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로 외로움에 주목했다. 산업화·도시화 물결 속에서 본래 있을 자리를 잃고, 잉여인간으로 전락한 대중들은 ‘고립’과 ‘정상적 사회관계의 결여’ 상태로 내몰렸고, 이는 나치 추종자 사이에서 목격된 주요 특성이라는 것이다.

포퓰리스트는 외로운 대중의 심리적 약점을 파고들어 사회 분열과 갈등을 악화시킨다. 선동적 정치에 휘둘린 사회는 갈등 양상이 정서적 양극화 단계로 심화한다. 자기와 동질적인 내집단에는 심리적 애착을 느끼지만, 이질적인 외집단에는 반감이 강해져 감정이 양극단으로 대립한다. 미국과 영국 등 양당제 국가뿐 아니라 벨기에와 네덜란드 등 다당제 국가를 가리지 않는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패턴이 이미 목격되고 있다.

미국서 들려온 트럼프의 기세
정서적 양극화로 사회갈등 심각
한국 ‘대결의 정치’도 위험 수준

그걸 풀어야 할 일차적 책임 역시 정치에 있다. 정신적·물질적 위기에 내몰린 서민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고, 사회가 소통하고, 타협과 절충의 근육을 단련할 수 있도록 조정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 정치는 그 기능을 상실한 듯하다. 도처에서 대결적·전투적 정치가 횡행한다. 국민 전체가 정서적 내전 상태에 빠졌다는 섬뜩한 경고음도 들린다. 골수 지지층만 바라보는 정치로는 아물게 할 방도가 없다.

바이든-트럼프 간 리턴 매치 전망은 곧 다가올 미국 최대 명절인 추수감사절 밥상머리 이슈로 떠올랐다. 거기엔 앞날에 대한 걱정이 짙게 배어 있다. 총선을 앞두고 맞은 우리 추석은 어땠을까. 기성 정치에 대한 실망과 환멸, 변화에 대한 갈망이 분출했다면, 그 힘을 개혁의 동인으로 모아내는 데 주저할 이유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