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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577돌 한글날 특별대담 | 국어학자 전영우와 이낙연 전 국무총리, ‘말의 품격을 논하다’

중앙일보

입력

“말은 곧 인격, 나를 낮춰야 마음 얻는다”  

■혐오와 폭력을 조장하는 말, 방치하면 사회문제 심화
■정보의 범람이 오히려 ‘정보 편식’과 ‘탈 진실’ 부추겨
■진실이나 공정보다 진영 영합주의가 정치 언어 지배
■‘쓰기’에 치우친 국어 교육, 말하기 중심으로 개선해야

원로 국어학자 전영우 박사와 이낙연 전 국무총리가 만났다. 9월 8일 서울 종로구 이 전 총리 사무실에서 두 사람은 한글날 577돌에 즈음해 ‘말의 품격’에 관해 대담을 나눴다.

원로 국어학자 전영우 박사와 이낙연 전 국무총리가 만났다. 9월 8일 서울 종로구 이 전 총리 사무실에서 두 사람은 한글날 577돌에 즈음해 ‘말의 품격’에 관해 대담을 나눴다.

품격의 ‘품(品)’은 입(口)이 세 개 모여 있는 형상이다. 입은 말이 나오는 통로다. 말은 곧 품격의 가늠자다. 말글을 보면 그 사람과 사회의 수준을 알 수 있다. 거친 말본새는 세대·성별·계층·이념의 갈등과 혐오, 대결 구도를 고착화하는 흉기다. 정치권의 극한 대립, 담론의 실종, 혐오범죄의 확산은 말의 품격이 사라진 ‘단절 사회’의 단면이다.한글날 577돌을 맞아 ‘말의 대가’들이 만나 우리말의 품격을 논했다. 전후 1세대 아나운서 출신 원로 국어학자 전영우(89) 박사와 ‘5선 대변인’이라 불리는 이낙연(71) 전 국무총리다. 두 사람은 과거 동아방송과 동아일보에서 아나운서와 기자로 일한 선후배 사이이기도 하다. 대담은 9월 8일 오후 서울 종로구의 이 전 총리 사무실에서 3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편집자 주]

박사님은 [우리말발음사전]을 만드셨죠. 어떤 계기로 우리말 발음 연구를 시작하셨나요.

전영우(이하 ‘전’)_ “1953년 대학교 2학년 때 서울중앙방송국(KBS 전신) 아나운서가 됐어요. 뉴스 준비를 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의 내용에 의하면’이라고 읽었더니 한 선배가 ‘대학에선 발음 같은 거 안 배워?’ 하는 거예요. ‘이승만 대통령에 담화에 내용에 의하면’ 이렇게 읽어야 한다는 거예요. ‘-의’를 ‘에’라고 읽으라는 거죠. 외국어 사전엔 발음 기호가 있는데 국어사전에는 왜 발음 기호가 없을까 의아했어요.”

그래서 말하기 연구에 천착하셨군요.

전_ “영어를 배울 때는 말하기부터 배워요. 그런데 국어는 글부터 배워요. 말하기는 안 가르치고 ‘국문’만 가르치는 거예요. 균형이 안 맞는 거죠. 우리말은 소리글이에요. 철자와 발음이 달라요. 말하기 분야를 개척해야겠다 생각했어요. 아나운서 경험을 토대로 1992년에 처음으로 한국어발음사전을 펴냈어요. 그다음엔 한국화법학회를 만들었죠. 지금은 익숙해졌지만, 스피치란 용어를 퍼뜨린 게 저예요.”

아나운서에서 학자로… 우리말 화법 개척

이낙연(이하 ‘이’)_ “선생님, 그때 혹시 이런 고민은 안 하셨어요? 스피치를 어떻게 우리말로 바꿀 수 없을까.”

전_ “했죠. 그게 화법(話法)이에요. 언론계 거목이신 오종식(1906~1976) 선생께 여쭤봤어요. ‘제가 스피치를 하는데 적당한 용어가 없을까요’ 했더니 ‘언변(言辯)’이라고 하라는 거예요. 그런데 난 ‘변(辯)’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어요. 그래서 ‘화술(話術)’은 어떨까, 근데 이건 재주, 기술이란 말입니다. 그다음 궁리해낸 게 ‘화법’, 말하는 법이에요. 그렇게 화법이란 용어가 스피치 대신 자리 잡았어요.”

우리말 화법을 개척한 공로로 2017년 한글날 기념식 때 이 총리로부터 문화포장을 받으셨죠.

이_ “훈·포장을 드리는 이는 대통령이고요. 저는 우체부 노릇을 했을 뿐입니다.”

총리님도 말하기에서 둘째가라면 서운할 달변 정치인으로 꼽히죠. 대변인을 다섯 번이나 맡았던 건 전무후무한 기록입니다.

이_ “저는 대변인 취임할 때마다 이렇게 말씀드렸어요. ‘눌변 대변인이 되겠습니다. 많은 기대는 마십시오.’ 제 자랑 하나 해볼까요. 2011년에 바른 언어 쓰는 정치인을 표창해서 국회의 막말 문화를 바꿔보자고 ‘국회를 빛낸 바른 언어상’이 제정됐어요. 교수님과 학생들이 국회 회의록과 동영상을 분석해서 평가하는 건데요. 1회의 으뜸, 최고상 수상자가 바로 접니다.”

총리님의 말을 들으면 ‘보통 준비한 게 아니구나’ 싶을 만큼 잘 정돈돼 있어요.

이_ “아마 TV 녹화할 때 글자 수를 세면서 대변인 노릇 한 건 제가 처음이었을 거예요. 보통 TV에 육성 나오는 시간이 8초거든요. 8초를 한 문장으로 말하면 42자까지 들어갑니다. 두 문장으로 끊으면 40자, 세 문장은 39자예요. 세 문장으로 할 때가 제일 좋아요. 듣기 싫어도 귀에 들어와요. 한 문장은 평균 13음절이죠. 평소 말하는 속도로 글자 수를 세어서 세 문장, 39자로 말했어요. 8초 안에 다 들어가니까 ‘시간상 잘랐습니다’란 말을 못 하게 하는 거죠.”

전_ “이 총리 말씀을 들어보면 월남 이상재(1850~1927) 선생의 인상을 받아요. 제가 박사 논문(한국 근대토론사 연구)에서 월남, 우남 이승만, 도산 안창호를 연구했어요. 월남은 유머가 많았어요. 그때도 여야와 좌우가 있었어요. 월남 선생이 토론 사회를 보면 싸움 없이 끝내요. 웃겨가면서 할 건 다 하는 거예요.”

이_ “요새 같으면 사회주의자로 몰렸을 겁니다. 이념 과잉 시대에 사회를 자주 봤으니(웃음)….”

“대변인만 다섯 번… 글자 수까지 세어가며 준비”

전영우 박사는 1953년 서울중앙방송국 공채로 입사한 우리나라 1세대 아나운서로 꼽힌다. 이후 동아방송과 KBS 아나운서실장을 거쳐 수원대학교에서 화법론을 개척했다.

전영우 박사는 1953년 서울중앙방송국 공채로 입사한 우리나라 1세대 아나운서로 꼽힌다. 이후 동아방송과 KBS 아나운서실장을 거쳐 수원대학교에서 화법론을 개척했다.


두 분은 정치인 중에서 말 잘하는 인물로 누굴 꼽으시겠어요?

이_ “미국 대통령 중에선 레이건과 링컨의 유머가 참 좋았어요. 레이건은 스피치 라이터 팀에 코미디언을 두 명 채용했습니다. 끊임없이 웃겨야 하니까요. ‘레이건 유머’라는 유튜브 프로그램도 있을 정도예요. 링컨에게 어느 장관이 물었답니다. ‘각하, 사람의 키는 어느 정도가 적당합니까?’ 링컨의 대답이 걸작이에요. ‘섰을 때 발이 땅에 닿는 정도가 적당하다.’”

전_ “나는 우남 이승만을 꼽습니다. 4·19 때문에 그늘에 가려져 있는데 동포들에게 희망을 불어넣는 연설을 잘했어요. 1940년대 초 국제연맹 방송시설을 통해서 한국이 독립돼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곧 희망의 초석이 올 것이다. 여러분은 고국에서 일어나라’고 독려했어요. 우남은 유일하게 ‘스피치 어드바이저’가 있었어요. 로버트 올리버라는 미국 사람이에요. 우리에겐 정치 고문으로 알려져 있는데 본래 스피치 고문이에요. 아마 대통령 중에 유일할 거예요.”

이_ “김대중 대통령도 쉬운 말로 오래 기억되게 말씀하시는 분이죠. 예를 들면 ‘돈 없어서 학교 못 가는 사람, 돈 없어서 병원 못 가는 사람 없게 하겠습니다’ 이렇게 명료해요.”

전_ “루스벨트 대통령은 연설에 중·고등학생도 이해하는 단어를 썼다고 해요.”

이_ “김대중 대통령은 끊임없이 퇴고하고 다듬어서 완성된 연설문을 사용하시는데, 노무현 대통령은 의표를 찌르는 반전이 있어요. 예를 들면 장인어른이 공산주의자 아니었느냐는 지적에 ‘그럼 아내를 버리란 말입니까’ 이 한마디로 모든 게 끝났죠. 2001년 광주에서 이런 일이 있었어요. 김대중 정부 4년 차에 호남지방 민심이 안 좋아져서 민주당 지도부가 급히 광주로 내려갔습니다. 그때 한화갑 대표부터 최고위원들이 연설을 해요. ‘광주시민 여러분, 저희가 더 부지런히 노력해서 예산 더 많이 가져오겠습니다.’ 다들 그런 톤이었어요. 대여섯 번째에 노무현 최고위원이 올라가서 이걸 뒤집었어요. ‘저 경상도 사람입니다. 빨갱이라고 손가락질받으면서도 김대중을 지지했습니다. 우리 마을에 길 닦아주길 바라서 지지한 것 아닙니다. 광주시민 여러분도 길 닦아달라고 지지한 게 아닐 겁니다. 그분의 사상이 옳고 그분의 삶이 올곧았기 때문에 지지한 것 아닙니까.’ 앞선 분들과 정반대 얘기에 사람들이 박수를 치는 거예요. 단상 맨 뒷줄에서 그분 뒷모습을 보면서 ‘아, 저분 물건이다. 거인이 탄생하고 있다’ 생각했어요.”

단지 순발력만으로 큰 울림을 만들어내긴 어렵겠죠.

이_ “깊은 사유에서 올 겁니다. 많이 읽고 많이 써봐야 합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재임 중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청와대에서 대통령 해보니 책 읽을 시간이 없다. 아무래도 감옥에 또 한 번 가야 할 것 같다.’ 말의 매력은 겸손과 유머라고 생각해요. 제가 배웠던 분 중에서 가장 겸손하셨던 분은 조순 선생님이에요. 서울시장 하실 때 항상 허리가 약간 굽어요. 학자로서의 신념이 대단히 굳고 카리스마가 있는 분인데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겸손하셨던지.”

전_ “한자 숙어에 ‘유능제강(柔能制剛)’이란 말이 있어요. ‘부드러운 것이 능히 굳센 것을 이긴다’는 뜻이에요. 수준 있게 웃기면서도 할 말 다하고 상대를 일깨울 수 있는 게 필요해요.”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

2018년 5·18 민주화운동 38주년 기념식에서 이낙연 당시 국무총리가 연설하고 있다. 이 총리는 이날 “광주는 광주다웠습니다”란 연설로 깊은 울림을 줬다.

2018년 5·18 민주화운동 38주년 기념식에서 이낙연 당시 국무총리가 연설하고 있다. 이 총리는 이날 “광주는 광주다웠습니다”란 연설로 깊은 울림을 줬다.

개인적으로는 이 총리 연설 중 2018년 5·18 기념식에서 했던 ‘광주는 광주다웠습니다’란 문장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이_ “네. 그때 저도 울컥했어요. 원고 쓰는 데 한 달 걸렸습니다. 퇴근해서 고치고, 다시 고치고. 문재인 대통령이 그걸 서울에서 들으시고 ‘뜻깊은 연설이었다’ 칭찬해주셨죠.”

전_ “도산공원(서울 강남구)에 있는 비석에 새겨진 안창호 선생 말씀 중에 이런 게 있어요. 한일합방 되고서 사람들이 이완용, 송병준을 매국노라고 몰아붙이니까 도산 선생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이천만 동포여, 어찌 매국노가 이완용, 송병준 두 사람뿐이요. 우선 내가 매국노고 이천만 동포 전체가 매국노 아니겠소. 우리에게 힘이 없어서 당한 것이요. 우리 이천만 전체가 매국노요.’ 울림이 있고 정신을 일깨우는 말씀이죠.”

요즘 정치권의 말들을 두 분은 어떻게 보시나요.

이_ “진실이나 공정보다 진영 입맛에 맞추려고 하는 진영 영합주의가 정치권의 말을 지배하고 있어요. 그러다 보면 상대 진영에는 적대감이 커지고, 국민은 분열되고 정치는 양극화하죠. 국가적으로 큰 불행입니다. 올해 통계청 발표를 보면 국회 신뢰도가 24%예요. 1년 사이에 10%p가 또 떨어졌어요. 진실하지 않다, 공정하지 않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품격이 없다, 이런 것이 합쳐져서 이런 불신이 오는 거겠죠.”

전_ “영락교회에 한경직 목사님이 계셨는데 참 설교를 잘한다고 소문이 자자해서 기독교 신자는 아니지만 교회를 가서 설교를 들어보고 설교 전집을 사서 읽어봤어요. 그분이 가장 많이 인용한 성경 구절이 마태복음 7장 12절이더라고. 이 구절은 ‘황금률'이라고도 해요. ‘무엇이든지 남에게서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화법에서 중요한 원칙이 바로 이거예요.”

이_ “국회는 항상 공방과 토론이 있기 마련이죠. 때론 싸움도 합니다만, 서로 부정적인 것보다 긍정적으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제가 총리 때 한 번은 야당 의원으로부터 이런 공격을 받았어요. 한·일 간의 문제에 관해 일본이 우리를 비판할 때 썼던 논리로 비판하는 거예요. 그 경우 보통은 ‘의원님은 한국 대통령보다 일본 총리를 더 믿으십니까’ 이렇게 응수하죠. 하지만 저는 반대로 ‘의원님께서는 한국 대통령보다 일본 총리를 더 믿으시진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했어요. 상대도 상처받지 않으면서 곰곰이 생각해보고 느끼게끔 하는 말이죠.”

넘쳐나는 말들에 ‘정보 편식’ 심화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달변가로 꼽힌다. 김 전 대통령은 성에 찰 때까지 끝없이 말을 다듬는 완벽주의자인 반면, 노 전 대통령은 즉흥적이고 직설적인 언어로 상대의 허를 찌르는 게 특기였다.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달변가로 꼽힌다. 김 전 대통령은 성에 찰 때까지 끝없이 말을 다듬는 완벽주의자인 반면, 노 전 대통령은 즉흥적이고 직설적인 언어로 상대의 허를 찌르는 게 특기였다.

말문을 막으면서도 모욕감은 주지 않는 절묘한 화법이네요.

전_ “나를 내세우면 협력이 없어요. 나는 당신만 못하다 그럴 때 협력이 이뤄지지, ‘내가 당신보다 낫다’고 하면 협력이 있을 수 없어요. 유머도 ‘당신만 못하다’고 해야 웃지, 당신보다 내가 잘났다고 하면 누가 웃나요. 이런 지혜와 인격을 도야(陶冶)하려면 끊임없이 공부해야 돼요. 말은 입이 하는 게 아니라 인격이 하는 거예요. 무엇이든지 남에게서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해라, 이게 율법이고 품격 있는 말의 원천이에요.”

이_ “선생님 말씀에 동감합니다. 자기를 높여서는 절대로 웃어주지 않습니다. 전에 어떤 행사에 가니까 제 지위가 조금 높아졌다고 선배님들보다 저를 먼저 연설을 시키곤 해요. 그럼 제가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펌프로 물을 뿜어낼 때 허드렛물을 먼저 붓지 않습니까? 제가 허드렛물입니다. 맑은 물은 선생님한테 들으실 겁니다’ 이렇게 해드려요.”

전_ “공화당 때 국회의원이었던 이도선 씨가 참 말을 잘했어요. 근데 이 의원이 하루는 기분 나쁜 말을 들었다고 하더래요. ‘너는 참 말은 잘한다.’ 기분이 나쁘대요. 그럼 어떻게 하면 좋아 하고 물었더니, ‘말도 잘한다’라고 ‘도’자 좀 붙여주면 안 되냐는 거죠.”

설득보다 공격과 비난의 말이 난무하는 건 비단 정치권의 문제만은 아니죠. 상대방의 감정을 동요시키는 감각적인 말이 넘쳐납니다. 혹시 ‘어쩔티비’란 말을 아시나요?

전_ “처음 듣는 말이에요. 몽골 말인지, 중국 말인지 모르겠어요. 불통이죠.”

이_ “저도 모르는 말이 많아요. 어쩌다 청년 세대가 만든 말을 조금씩 알아가기도 하지만, 제가 좇아가는 속도보다 새로운 말이 나오는 속도가 훨씬 빠르니까 도저히 그 간극을 못 좁히겠어요. 그런 현상이 가져온 사회적 비용이 너무 크다고 생각해요.”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요.

이_ “ 탈진실의 시대 흐름도 있을 거고, 정보 과잉 시대에 사람들이 대응하는 방식이기도 할 거예요. 작년부터 올해까지 미국에 있으면서 정치 양극화에 관한 책을 봤어요. 그 원인 중 하나로 ‘매체의 범람’을 지적하더군요.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는 서너 개의 신문과 TV를 보면서 균형 있는 뉴스를 접할 수가 있었는데, 지금은 너무 많다 보니 결국 자기 입맛에 맞는 것만 고르게 되고, 점점 그쪽으로 빠져들어 간다는 거예요. 일종의 ‘정보의 편식 현상’이죠. 또 하나는 SNS의 발달 때문에 모든 사람이 소비자인 동시에 생산자가 된 것이죠. 경쟁적이고 일정한 규칙 없이 마구 뱉는 거예요. 언론처럼 일정한 ‘데스킹’이 없으니 여과 없이 마구 나와요. 짧고 자극적이고 가벼운 언어의 범람 속에 사람들이 놓이게 됐고, 그 결과로 품위와 신뢰를 잃는 말이 넘쳐나는 우려스러운 상황이 생기는 거예요.”

전_ “제가 방송국에 있을 때 국어 순화 운동에 관심을 기울여 왔어요. 그런데 이런 의견도 있었어요. ‘(언어란) 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건데 왜 순화하려고만 하느냐’는 거예요. 우리가 수돗물을 정화해서 먹지 그대로 먹진 않잖아요? 언어도 나쁜 언어는 걸러야죠. 캠페인이 필요하다고 봐요.”

이_ “언어의 변화 자체를 나쁘다거나 피하자고 할 순 없다고 생각해요. 단지 변화하되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또는 혐오가 포함된 그런 변화는 피했으면 좋겠어요. 말의 품격은 한 나라의 자산이고 국격이에요. 변화는 수용하되 저급한 쪽으로, 폭력적인 방향으로 가지 않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아요.”

“말이란 사람을 얻는 것”

이승만 전 대통령은 해방 전 국제적으로 송출되는 라디오 연설을 통해 독립의 당위를 설파하며 동포들에게 희망을 전했다. 그는 스피치 전문가인 로버트 올리버(오른쪽)를 고문으로 두고 정치적 조언을 두루 구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해방 전 국제적으로 송출되는 라디오 연설을 통해 독립의 당위를 설파하며 동포들에게 희망을 전했다. 그는 스피치 전문가인 로버트 올리버(오른쪽)를 고문으로 두고 정치적 조언을 두루 구했다.

전_ “말은 잘하는데 품격이 없는 사람이 많아요. 노자의 〈도덕경〉에 ‘대변약눌(大辯若訥)’이란 말이 있어요. 말을 잘하는 사람은 말더듬이처럼 보인다는 거예요. 장자는 ‘말 잘하는 것은 말이 없는 것이다(대변불언, 大辯不言)’라고 했어요.”

이_ “말이 품격을 잃어가는 여러 원인 중 문화, 특히 방송의 영향도 크죠. 짧고 재미있는 건 좋은데 공격적이고 자극적이에요. 누구를 출연시키고 어떻게 기획하느냐 못지않게 자막을 뭘로 뽑느냐가 굉장히 중요해졌어요. 시청자들이 출연자의 말 전체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한두 마디로 요약되는 자막에 점점 집중하니까요. 선생님 혹시 ‘짤’이란 말 아세요?”

전_ “몰라요.”(웃음)

이_ “영상을 짧게 만든 형태인데 영어로는 숏폼이라고 하죠. 점점 그쪽으로 가는 것 같아요.”

전_ “요새는 시간이 급하거든요. 짧게 말하고 각계각층에서 캐치프레이즈로 의사를 표현해요. 좋은 방향으로 가면 아주 효과적이에요. 전에 강화도에서 표어를 본 적이 있어요. ‘꺾는 데 1초 키우는 데 10년’ 기가 막히죠. 짧지만 수긍하게 만드는 힘이 있어요.”

두 분은 말의 달인들이시니 남다른 비결이 있을 것 같아요.

전_ “아리스토텔레스가 ‘레토릭’을 썼어요. 우리에겐 수사학이라고 알려졌는데 저는 ‘변론법’이라고 생각해요. 변론법의 한 챕터가 수사학이에요. 아리스토텔레스가 세 가지를 얘기해요. 먼저 에토스, 즉 인격이에요. 인격이 말하지 입이 말하는 게 아니다. 인격이 사람을 설득한다고 본 거예요. 다음으로 파토스, 바른말을 하더라도 사람이 싫으면 듣기도 보기도 싫어져요. 감정적으로 말하면 자기 손해예요. 격을 갖추면서 호감을 살 수 있어야 해요. 마지막이 로고스예요. 논리는 맨 나중이고 인격을 갖추고 호감을 사는 인간관계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이_ “말만으로 소통하는 게 아니라 때로는 말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웅변보다 더 강한 공감을 얻을 수 있어요. 제가 전남지사로 일할 때가 세월호 침몰 직후였습니다. 미수습자 가족들이 있는 현장에 가서 깨달았어요. 어떤 위로는 선의로 하더라도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요. 때로는 말을 줄이고 들어주는 게 최고의 위로일 수 있어요. 영어로는 ‘심퍼시(sympathy, 동정)’와 ‘엠퍼시(empathy, 공감)’의 차이랄까요. 심퍼시는 고통 겪는 사람에 대해 타자인 내가 느끼는 연민과 동정이에요. 엠퍼시는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거예요. 흔히들 기껏해야 심퍼시로 접근하려 하는데, 엠퍼시가 되도록 노력해야 해요. 말이란 사람의 마음을 얻는 거죠.”

말의 승부수는 ‘띔’과 ‘경청’

전영우 박사와 이낙연 전 총리는 동아방송과 동아일보에서 근무한 선후배 사이다. 전 박사는 우리말 화법의 개척자로, 이 전 총리는 정제된 말을 쓰는 으뜸 정치인으로 꼽힌다.

전영우 박사와 이낙연 전 총리는 동아방송과 동아일보에서 근무한 선후배 사이다. 전 박사는 우리말 화법의 개척자로, 이 전 총리는 정제된 말을 쓰는 으뜸 정치인으로 꼽힌다.

전_ “요새 TV를 보면 출연자들의 말이 너무 빨라서 알아들을 수 없어요. 대개 머리가 빠르고 지적 활동이 왕성한 사람의 말이 빨라요. 그건 말을 진정으로 하는 게 아니에요. 일방적으로 ‘해버리는’ 거예요. 이럴 때 ‘포즈(pause)’를 넣으면 좋아요. 그것만 해도 듣기가 편해져요.”

이_ “선생님 말씀대로 잠깐의 ‘띔’이 웅변의 요체가 아닐까 해요. 말이 아니라 잠깐 멎는 그 순간, 그 멈춤을 어디에 어떻게 놓을 것인가가 말의 승부일 수 있습니다.”

전_ “대화에서 중요한 게 그거예요. ‘난널좋아해’ 이거 감정이 없잖아요? ‘난, 널, 좋아해.’ 이게 포즈예요.”

문득 한 사람,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떠올라요. 국회에서 답변하는 모습을 보면 굉장히 빠르게 받아치는 말솜씨가 인상적인데요. 좋은 말하기는 아니겠군요.

이_ “뭐랄까. 좀 더 다듬고 좀 더 절제했으면 좋겠다 싶어요. 면전에서 상처받게 하기보다 집에 가서 곰곰 생각해보니 ‘아, 그렇구나’ 이렇게 느끼게끔 하는 게 어떨까 싶을 때가 있어요. 연설하다 보면 격렬하게 ‘옳소’ 하는 반응을 끌어내는 것도 좋지만, 조용히 머리를 끄덕이게 하는 게 가장 성공적인 말인 것 같아요. 공감하게 하라, 그것이 성공이다.”

전_ “말하기에 있어서 중요한 건 듣기예요. 내 말을 듣는 사람 입장에서 말해야 하니까요. 들을 땐 우선 정신을 집중해야 합니다. 미국의 실험심리 연구에서 사람이 정신을 집중하는 시간이 불과 3초에서 24초라는 보고가 있어요. 둘째는 적절한 질문이에요. 우린 질문을 잘 안 하죠. 알아도 안 하고, 몰라도 안 하고, 애매해도 안 해요. 질문 잘하는 사람이 말도 잘해요. 셋째가 응대, 맞장구예요. 상대가 말하면 ‘그렇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렇군요’ 이렇게 응대를 잘하는 게 좋아요. 그래야 상대방이 신이 나죠. 넷째가 확인이에요. 저는 누구와 약속하면 자꾸 물어봐요. ‘어디죠? 몇 시죠? 언제까지 가야 하죠?’ 자꾸 물어봐야 내가 자신이 생겨요.”

이_ “선생님이 경청의 중요성을 말씀해 주셨어요. 행정의 달인으로 가장 많이 꼽히는 분이 고건 총리일 거예요. 그분께 한 번 여쭤봤어요. ‘서울시장 두 번이나 하시고, 총리도 두 번이나 하셨는데 수많은 민원인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그분의 대답이 엉뚱해요. ‘잘 들어드리면 민원의 50%는 해결된 겁니다.’ 행정의 달인 고건 총리의 말씀이에요. 근데 사실이더라고요.”

감동·유익·재미·여운 주는 말이 좋은 말

전_ “말의 품위를 높이기 위해선 독서를 많이 해야 돼요. 다양한 접촉에서 얻어지는 지혜가 말 재료가 되거든요. 그리고 말은 쉽고 재미있고 유익해야 해요. 감동을 줘야 하고요. 마지막으로 여운을 남겨야 해요. 요즘은 형식적인 말은 잘하는데 실질적인 말을 잘 못 해요. 왜냐하면 지혜를 터득하지 못해서예요. 지식만으로는 좋은 말이 안 나와요. 김형석 교수님의 글을 보면 반드시 지혜가 있어요. 그런 걸 본받아야 돼요.”

이_ “역시 선생님하고 같습니다. 많이 읽고 써보고 소통하고 만나서 겪어보고 터득하는 것이 말의 품격을 높이는 길이죠. 또 그 지혜를 평이하면서도 명료한 문장으로 전해 주시니까 더 읽기가 쉽고 빨리 전달되는 것 같아요. ‘은근함’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은근한 공격과 은근한 방어, 은근한 촌철살인. 저도 한때는 촌철살인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그걸 계속했더니 나중엔 연쇄살인이라 하더라고요. 자신을 낮춰 웃음거리로 만드는 걸 사자성어로 ‘살신성소(殺身成笑)’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전_ “한 가지 덧붙이자면, 한글을 제대로 읽고 발음할 수 있어야 해요. 소리가 통해야 뜻이 통하지 소리를 모르면 뜻이 안 통해요. 그런데 발음이 틀린 게 많아요. 그게 좀 답답해요.”

이_ “높임과 낮춤이 무너져버렸어요. 어느 유명한 운동선수가 TV에 나와서 ‘우리 부인이’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이게 무슨 말인가요. 부인이란 건 상대의 아내를 높이는 말이에요. 수많은 유명 인사들도 숱하게 틀린 표현을 거리낌 없이 쓰곤 해요. 이런 사소한 잘못이 품위를 깎아 먹곤 하죠.”

오늘 뜻깊은 말씀 감사합니다. 박사님의 화법 이야기, 총리님의 ‘살신성소’ 자주 접할 기회가 있기를 기대하겠습니다.

※ 전영우
■1934년 서울 출생
■경복고, 서울대 국어교육과
■서울중앙방송국 아나운서
■동아방송, KBS 아나운서실장
■수원대학교 인문대학장, 명예교수
■한국화법학회 초대 회장
■국민훈장 목련장(1982), 문화포장(2017)

※ 이낙연
■1952년 전남 영광 출생
■광주제일고, 서울대 법학과
■동아일보 기자
■제16, 17, 18, 19, 21대 국회의원
■전라남도지사
■제45대 국무총리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현)

- 진행 유길용 월간중앙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 사진 최영재 기자 choi.yeongjae@joongang.co.kr / 정리 권혁중 월간중앙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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