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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좌와 우를 넘어” “분열 대신 통합” 미완의 숙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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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한국 현대사 빛낸 ‘실패의 순간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역사는 과거가 아니다

과거에 있는 모든 일이 다 역사는 아니다. 굳이 얘기하자면, 역사는 과거에 있었던 일 중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일을 뽑아서 모아놓은 것이다. 과거에 있었던 모든 일을 역사 속에 서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떤 시대에는 역사에 포함되었던 사건이 시간이 흘러 다른 시대에는 역사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 시대의 상황에서 더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사건이 새롭게 역사 범위에 포함되는 것이다.

역사의 범위가 모든 과거를 다 포괄하지 못하다 보니 실패한 사건이나 감추고 싶은 사건은 역사 서술 속에서 사라지거나 점차 그 비중이 줄어든다. 성공의 역사가 오늘의 현실을 만드는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던 만큼 역사 속에서 더 부각된다. 하나의 민족이 국가를 형성하는 민족국가 시대에 들어와 그러한 경향은 더욱 가속되었다. 때로 실패했지만, 성공한 역사보다 더 소중했던 역사가 있다.

농지개혁 합의한 해방 후 좌우합작, 여운형 암살로 사라져
김구·김규식의 남북협상, 조봉암의 ‘제3정당’도 결국 무산
1997년 DJP 연합, 야합 비판에도 금융위기 신속하게 극복
2005년 노무현의 대연정 제안…극한 대립의 현재 되비춰

3·1운동과 이승만의 유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밑거름이 된 1919년 3·1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밑거름이 된 1919년 3·1운동.

그 대표적인 경우가 의병운동과 3·1운동이다. 두 운동의 목표는 독립이었다. 두 운동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3·1운동은 대한민국 수립의 정신적 기초가 되기 때문에 헌법 전문의 가장 첫 문장에 등장한다. 대한민국 국회 개원식 날 이승만 의장은 다음과 같이 개회사를 했다.

“나는 이 대회를 대표하여 오늘에 대한민주국이 다시 탄생된 것과 따라서 이 국회가 우리나라에 유일한 민족대표 기관임을 세계만방에 공포합니다. 이 민국은 기미년 3월 1일에 우리 13도 대표들이 서울에 모혀서 국민대회를 열고 대한독립민주국임을 세계에 공포하고 임시정부를 건설하야 민주주의에 기초를 세운 것입니다.

불행히 세계 대세에 인연하여 우리 혁명이 그때 성공이 못되었으나 우리 애국남녀가 해내해외에서 그 정부를 지지하여 많은 생명을 바치고 혈전고투하여 이 정신만을 지켜온 것이니 (중략) 29년 만에 민국의 부활일임을 우리는 이에 공포하여 민국 연호는 기미년에서 기산할 것이오, 이 국회는 전 민족을 대표한 국회이며, 이 국회에서 탄생되는 민국정부는 완전한 한국 전체를 대표한 중앙정부임을 이에 또한 공표하는 바입니다,”

이승만은 대통령 취임 후 국회가 ‘민국’ 연호 대신 ‘단군’ 연호를 쓰는 데 대해서도 많은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일각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을 부각하려고 노력하면서 막상 그가 정통성의 근거로 내세웠던 임시정부를 폄하하려 했으니, ‘민국’ 연호를 쓰려했던 역사 역시 실패했지만, 기억해야 할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46년 좌우합작운동의 추억

1945년 말 임시정부 환영식에 참석한 이승만(왼쪽)과 김구.

1945년 말 임시정부 환영식에 참석한 이승만(왼쪽)과 김구.

성공하지 못했지만, 기억해야 할 또 다른 역사도 있다. 사실 지금까지는 역사 속에서 그다지 중요하게 주목받지 못했고, 또는 성공의 가능성이 낮은 정치적 노력으로 평가받았지만, 지금 현 상황에서 우리가 주목해야만 하는 역사다. 좌와 우,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정치적 목표를 놓고 볼 때 어느 한쪽에 대한 확실한 목소리보다 중간에서 분열을 막고 급진적이지 않고 합리적인 정책을 내놓아야 한다는 주장은 결코 매력적이지 않다. 정체성 논란에 빠질 수 있으며, 상대 진영을 이롭게 한다는 ‘2중대’로 규정될 수도 있다. 한국 현대사에서도 결코 성공하지 못한 역사였다.

1946년 시작된 좌우합작위원회는 미군정에 의해 시작되었다. 분열보다 통합을 원했던 목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던 우익의 민주의원과 좌익의 민주주의민족전선은 대표를 파견했다. 좌우합작위원회는 농지개혁과 친일문제 해결을 포함한 7개의 원칙에 합의하였지만, 미군정 하 입법기구의 수립을 놓고 대립하다가 결국 여운형의 암살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반공주의자 김구의 예상된 실패

유엔의 결정에 의해 38선 이남에서 선거가 실시될 때 마지막까지라도 분단정부 수립을 막겠다는 의지로 북으로 갔던 김구는 당시 가장 강력한 반공주의자였다. 그는 1940년까지 독립운동 시기 좌파 독립운동가들과의 어떠한 합작도 거부하고 임시정부를 지켰다. 1945년 말부터 시작되었던 신탁통치 반대운동은 강대국 위임통치에 대한 반대의 의미도 있었지만, 소련의 위성국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강력한 반공 의지를 반영한 것이었다.

김구는 이렇게 강한 반공 의지를 갖고 있었음에도 분단 정부 수립이 결국 전쟁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자기의 노선을 꺾었다. 중도 우파의 김규식과 함께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을 만나기 위해 38선을 넘어간 것이었다. 이 협상은 실패했다. 북한은 약속과 달리 자기들만의 선거를 실시했고, 남북협상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어쩌면 김구나 김규식 역시 예상했던 결과였을 수도 있다. 미군정은 김구와 김규식이 북으로 간다고 했을 때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고 했지만, 김규식은 합작과 통합을 위한 노력이 이게 마지막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라고 했다. 그러한 노력은 1950년대 이후에도 계속되었지만, 남북협상도 그 자체로서는 실패했다.

‘제3의 길’ 찾은 조봉암의 최후

비록 통합을 위한 움직임은 아니었지만, 제대로 된 정책정당을 만들겠다며 제3정당을 만든 것은 조봉암이었다. 당의 이름은 진보당이었고, 얼핏 보면 진보, 또는 좌파들만의 당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 진보당의 강령은 좌와 우, 진보와 보수 사이의 제3의 길을 주장한 것이었다.

진보당은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바람을 일으켰다. 국민은 평화를 원하고 있었고, 어느 한쪽의 극단보다 중간에 서 있는 정치인과 정책정당을 원했다. 극심한 관권 선거 속에서도 그는 200만표 넘게 득표했다. 1958년 총선을 앞두고 진보당 사건이 터져 이듬해 당은 해체되었고, 조봉암은 처형되었다.

이후 유신체제를 거치면서 정치지형은 독재와 민주화 세력으로 양분되면서 좌우, 보수·진보의 화합을 추구하는 노력은 진행될 수 없었다. 민주화 이후 1990년 민주자유당이 탄생하면서 보수 진보의 정치지형이 형성되면서 다시 한번 중간에서 극단적인 정책보다는 합리적이고 화합적인 정책을 지향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나왔다.

정부 수립 후 첫 대연정 ‘DJP’

1997년 대선 후보 단일화를 선언한 김대중(왼쪽)과 김종필.

1997년 대선 후보 단일화를 선언한 김대중(왼쪽)과 김종필.

1997년의 DJP는 어쩌면 그 첫걸음이었을 것이다. DJP를 보는 보수와 진보 양 진영의 눈은 사뭇 매서웠다. 양쪽의 입장에서 DJP는 화합이나 중간의 길이라기보다 정치적 ‘야합’이었다. 단지 정권을 잡기 위해 충청과 호남의 표를 합치고자 한 것이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당시의 이러한 평가가 잘못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처음으로 한국 정부에서 보수와 진보 사이의 대연정이 이루어졌다.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에서 보수, 진보 정책이 모두 어우러짐으로써 한편으로는 빅딜, 성장 정책을 통해 금융위기의 빠른 극복이 이루어졌고, 다른 한편으로 기존의 생활보호법을 대체하는 국민기초생활 보장법이 입법되었다.

DJP의 또 다른 성과는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일본 총리 사이에 이루어진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과 6·15 남북 공동선언이었다. 이 두 선언은 김대중 대통령의 의지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가장 보수적이었던 닉슨 대통령이기에 마오쩌둥과 합의를 이루어낼 수 있었던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DJP 대연정은 5년을 가지 못하고 결국 갈라섰다.

이후 한국의 정치는 겉으로는 ‘평화’로운 정권교체를 겪는 것 같았지만, 실상 보수와 진보 사이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통합이나 화합은 보이지 않고, 유신시대에도 있었던 대통령과 야당 총수 사이의 영수회담도 모습을 감춘 지 오래되었다.

지역주의 해체 제안한 노무현

지금은 모두에게 잊혔지만, 2005년 7월 28일 노무현 대통령이 보수 야당에 제안했던 ‘대연정’이 떠오르기도 한다.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도 그렇지만,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도 이해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실상 노무현 대통령은 “폭탄은 저쪽을 향해 던졌는데 오히려 우리 편 등 뒤에서 터져버렸다”고 얘기할 정도로 대연정 제안의 후폭풍이 컸다.

한나라당이 주도하고 열린우리당이 참여하는 대연정 주장은 지역주의 해체를 위한 제안이기도 했다. 너무 일렀던 것일까. 노무현 대통령이 10년 앞을 내다보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대연정이 49%의 목소리가 묻혀버리는 현재 한국의 정치체제에서 부적절한 제안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진보와 보수 간의 대립뿐만 아니라 한 정당 내에서의 대립까지도 극한으로 내닫고 있는 현시점에서 한국 현대사에서 통합을 위한 노력은 그 어느 것도 성공적이지 못했지만, 극단적 분열의 극복이 절실한 지금 너무나 소중하게 다가온다. 과거에 야합이라고 평가받았던 노력까지도 다시 한번 주목하게 된다. 대연정을 위한 내각제 개헌이라도 해야 할까.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