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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성수의 우리 과학 이야기

세계 첫 금속활자 ‘직지’와 목판 인쇄가 공존한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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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송성수 부산대 교양교육원 교수

송성수 부산대 교양교육원 교수

지난 4일은 ‘직지(直指)의 날’이었다. 『직지』가 2001년 9월 4일에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직지』의 고장 청주시는 격년으로 직지문화제를 열고 있다. 1377년에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된 『직지』는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본이며 『직지심경』   『직지심체요절』로 불리기도 한다. 전체 이름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인데, 백운화상이라는 승려가 부처의 말 중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을 가려 뽑은 ‘깨달음의 핵심’이란 뜻이다.

활자는 소량, 목판은 대량 인쇄
‘직지’ 이후 다양한 활자 선보여

한국보다 78년 늦은 서양 활자
인쇄기 만들며 사회변혁 주도

국가·지역별 다양한 인쇄문화
지금 잣대로 과거 판단 말아야

지난 4일은 ‘직지(直指)의 날’

조선은 활자의 나라였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금속활자. 1434년 갑인자(甲寅字)로 추정된다. [연합뉴스]

조선은 활자의 나라였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금속활자. 1434년 갑인자(甲寅字)로 추정된다. [연합뉴스]

구한말 프랑스 외교관 콜랭 드 플랑시(1853~1922)가 구입했던 『직지』는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소개된 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돼 있었다. 『직지』가 다시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에 유학 중이던 사학자 박병선(1923~2011)의 노력 덕분이었다. 『직지』는 1972년 유네스코가 개최한 ‘세계 도서의 해’ 전시회에서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본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1455년경에 출판된 구텐베르크 성서보다 78년 정도 앞선다는 것이었다.

활판 인쇄술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명되었지만 그것의 사회적 효과가 컸던 곳은 유럽이었다. 유럽에서는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을 매개로 폭넓은 식자층의 시대가 열렸다. 인쇄술의 확산은 모국어를 사용하는 전통이 생겨나면서 더욱 촉진되었다. 유럽인은 더 이상 지배세력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정보를 해석하면서 기존의 견해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15~17세기 르네상스·종교개혁·과학혁명도 인쇄술이 없었더라면 거의 불가능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처럼 활판 인쇄술은 서양 사회의 변혁에 크게 기여했으며, 이는 ‘인쇄술 혁명’ 혹은 ‘구텐베르크 혁명’으로 불린다.

이에 반해 중국을 비롯한 동양에서는 19세기 중엽까지 목판 인쇄술이 지배적이었다. 그 이유는 목판 인쇄술이 더욱 실용적이었기 때문이다. 활판 인쇄술에 익숙한 우리에게 목판 인쇄술의 실용성은 매우 낯설게 느껴진다. 그러나 영어의 알파벳은 26자지만 한자는 수천 개에 이른다는 점을 상기해 보자. 서구에서는 활판 인쇄를 위해서 수십 개 활자 주형을 만들면 족하지만, 동양에서는 수많은 활자를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더구나 전서·예서·해서·행서·초서 등과 같은 다양한 글씨체까지 고려한다면, 동양 사회에서는 목판 인쇄술이 활판 인쇄술보다 실용적이었다는 점에 수긍이 갈 것이다.

수작업에 의존한 동양 인쇄술

목판 인쇄술의 실용성에는 문제가 있었다. 목판본을 새기는 데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소요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동양 사회에서는 목판 인쇄술에 숙달된 기술자 집단이 형성되어 있었기에 그리 심각한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16세기에 중국을 방문했던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 리치는 유럽의 조판공이 2절 크기의 페이지를 금속활자로 짜는 데 걸리는 시간과 중국의 기술자가 비슷한 크기의 목판본을 새기는 데 소요되는 시간이 비슷했다고 전한 바 있다.

우리나라의 금속활자는 15세기에 상당한 발전을 보였다. 태종 3년인 1403년(계미년)에는 금속활자를 담당하는 관청으로 주자소(鑄字所)가 설치되어 계미자(癸未字)가 만들어졌다. 계미자는 직지를 찍은 활자보다 한층 개량되었지만, 밀랍으로 고정된 활자가 인쇄할 때 흔들리는 한계를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세종 대에 들어서는 1420년에 경자자(庚子字), 1434년에 갑인자(甲寅字)가 제작되었다. 경자자의 경우에는 끝이 뾰족했던 활자를 네모반듯하게 바꾸었으며, 활자 사이의 빈틈을 대나무 조각으로 메워서 활자를 튼튼하게 고정했다.

갑인자 시기에는 밀랍을 사용하지 않는 조립식 조판법이 더욱 정교화되는 가운데 우수한 먹물의 개발, 질 좋은 종이의 제작, 정교한 활자의 주조 등이 어우러져 상당한 수준의 활판 인쇄술이 확보되었다. 갑인자로 인쇄된 초기 서적으로는 『석보상절』(1447년)과 『월인천강지곡』(1449년)을 들 수 있다. 갑인자는 조선 말기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새로 주조되어 다양한 서적 인쇄에 쓰였다.

유의할 점은 우리나라의 활판 인쇄술이 서양과 달랐다는 사실이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에서는 금속활자를 종이에 찍을 때 ‘프레스(press)’로 불리는 압축인쇄기가 사용됐다. 이에 따라 인쇄에 소요되는 시간이 매우 단축되어 인쇄물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었다. 이와 달리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활자는 금속으로 만들어졌지만 인쇄는 여전히 수작업에 의존하고 있었다. 일일이 활자에 먹을 묻히고 종이에 한판 한판씩 찍었다. 이러한 점은 1946년에 발간된 홍이섭의 『조선과학사』에서 이미 지적된 바 있다.

동양에 인쇄혁명이 없었다고?

우리나라에선 활판 인쇄술과 목판 인쇄술이 공존했다는 점도 흥미롭다. 그것은 활판 인쇄술이 목판 인쇄술을 대체한 서양이나, 오랫동안 목판 인쇄술에 의존한 중국과 대비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인쇄 분량이 많고 수요가 안정적일 경우에는 목판 인쇄술을, 다양한 서적을 소량으로 찍을 때는 활판 인쇄술을 활용하는 체제가 형성됐다. 이처럼 한국과 중국·서양의 인쇄술은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다.

누군가가 “동양에서는 왜 인쇄술 혁명이 없었는가”라고 물을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질문은 기술이 각 사회의 구체적인 맥락과 무관하게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는 잘못된 가정에 입각하고 있다. 더 나아가 서구의 기술 유형이 모든 기술의 보편적인 잣대로 기능한다는 서구 중심적인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기술이 과거에도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라는 현재 중심적 역사 해석과 무관하지 않다.

송성수 부산대 교양교육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