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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협, 정경유착 오명 씻고 '싱크탱크'로 쇄신 의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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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8호 13면

전경련, 한경협으로 새 출발

한국경제인협회 출범 표지석 제막식이 끝난 뒤 직원들이 표지석을 닦고 있다. [뉴시스]

한국경제인협회 출범 표지석 제막식이 끝난 뒤 직원들이 표지석을 닦고 있다. [뉴시스]

“창립 당시 초심을 되새기고 진정한 변화를 이루기 위해 55년 만에 단체 이름을 바꿨다.” 국내 재계를 대표하는 경제단체인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로 이름을 바꾸고 새로운 출범을 약속했다. 류진 한경협 회장(풍산그룹 회장)은 “한국을 대표하는 싱크탱크로 나아가는 길에 임직원 모두 힘과 지혜를 모아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한경협은 사실 전경련으로 이름을 바꾸기 전 옛 이름이다. 1961년 단체 창립 이후 쓰던 이름을 다시 쓰면서 초심과 함께 옛 위상을 되찾는다는 의지가 담긴 셈이다. 1968년부터 55년간 쓰여 익숙한 단체명인 전경련은 영욕의 세월과 함께 사라지게 됐다. 한경협은 19일 서울 여의도 FKI타워(옛 전경련회관) 정문 앞 표지석을 교체하면서 ‘한국 경제 글로벌 도약의 중심’이라는 새 슬로건을 내세웠다. 한국의 주요 7개국(G7) 대열 진입과 글로벌 퍼스트 무버 도약 등 비전을 위해 한경협이 싱크탱크로서 중추적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를 담았다는 설명이다.

한경협은 단순히 이름만 바뀐 게 아니다. 삼성·SK·현대차·LG 등 4대 그룹도 한경협에 회원사로 재합류했다. 이들 기업은 박근혜 정부 때인 2017년 이른바 ‘국정농단 사태’로 전경련에서 탈퇴한 바 있다. 하지만 갈 길이 멀다. 국정농단 사태 이후 재계 맏형으로서의 위상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국정농단 사태 직전인 2016년 639개였던 전경련 회원사 수는 올해 약 420개로 급감했다. 정치권과 이어져 불필요한 오해를 사는 것을 꺼린 주요 기업 총수들이 줄줄이 탈퇴한 영향이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과거 전경련은 면면이 화려했다. 역대 주요 회장만 봐도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초대, 1961~62년)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13~17대, 1977~87년) ▶구자경 LG그룹 2대 회장(18대, 1987~89년) ▶최종현 SK그룹 2대 회장(21~23대, 1993~98년) ▶김우중 대우그룹 창업주(24~25대, 1998~99년) 등 그야말로 한국의 산업화를 주도한 산증인들이 단체를 이끌었다. 이는 한경협이 출범부터 한국의 굴곡진 근현대사와 긴밀히 얽혔던 것과 관계가 깊다.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사실상 집권한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은 이병철 창업주와 면담, 경제단체를 만들어 정부의 산업 정책에 협력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이 창업주는 기업인들을 모아 경제재건촉진회를 만들고 그해 단체명을 한경협으로 바꿨다. 당초 삼성 등 기업 총수 24명은 1960년 4·19 혁명 이후 부정축재자로 지목돼 정부 조사를 받았지만, 군사정변의 주축인 박정희 당시 부의장 등은 이들에게 국가 산업 재건에 기여할 기회를 줘야 한다고 봤다. 이후 한경협은 전경련으로 이름을 바꿔 국내·외에서 미국·일본 등 한국의 주요 교역국 정상들과 만나 협력 관계를 돈독히 다지는가 하면 한국경제연구원 등을 설립해 싱크탱크로서 역할을 하면서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

‘88 서울올림픽’ 유치에 기여한 것도 전경련의 대표 업적 중 하나다. 정주영  창업주가 1987년까지 10년간 회장을 맡으면서 재계의 추진력과 글로벌 네트워크 역량을 결집했기에 올림픽 유치가 가능했다는 분석이다. 90년대 후반 외환위기 극복 과정에서도 전경련의 역할은 필수적이었다. 김대중 정부가 고강도의 대기업 구조조정 정책 추진을 강행하자 전경련은 자율조정에 나섰다. 이때 반도체 사업을 포기해야 했던 LG처럼 서운한 마음을 갖는 기업도 생겨났지만, 결과적으로 한국은 외환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경련은 정계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롭기 힘든 태생적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는 번번이 약점으로 작용했다. 역대 정부마다 대통령 또는 유력 정치인에 대한 비자금 지원 의혹으로 곤욕을 치러야 했고, 결국 국정농단 사태에 연루되면서 4대 그룹이 탈퇴하는 치명타를 입었다. 이후 들어선 문재인 정부 땐 대통령의 주요 순방에서 배제될 만큼 위상이 낮아졌다. 이런 분위기 속에 전경련 회장을 맡으려는 기업 총수도 없어 허창수 GS그룹 명예회장이 2011년부터 올해까지 12년간 6연임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이 때문에 새롭게 출범한 한경협의 선결 과제는 정경유착 의혹 등으로 ‘시대에 뒤떨어진 단체’라는 오명을 더는 듣지 않도록 분위기를 쇄신하는 것이다. 그래야 자연스레 위상도 다시 높아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한경협은 이를 의식한 듯 회원사 업종 범위도 기성 제조업 일변도에서 벗어나 정보기술(IT)과 엔터테인먼트 등 신(新) 성장 산업 분야로 넓히기로 했다. 이를 위해 최근 네이버와 카카오, 하이브 등에 가입 요청 공문을 보내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류진 회장은 “시대 변화에 맞게 회원사를 다양화해 젊은 세대와 소통할 수 있는 단체가 되도록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다만 여전한 비판론도 제기된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한경협이 신뢰 회복을 도모한다면서 단순히 회원사 숫자를 다시 늘리는 ‘세력 확장’에만 급급한 건 아닌지 짚어봐야 한다”며 “싱크탱크 역할을 강조하면서 계속 (학자들이 아닌) 기업 총수들만 전면에 내세우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한경협이 4차 산업혁명 등 커다란 시대 변화상에 걸맞은 혜안을 제시할 수 있는 싱크탱크로 거듭날 때 한국 경제 발전에 기여하는 단체라는 이미지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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