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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응교의 가장자리

문학관은 ‘역사의 허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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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

작가는 자신이 자란 공간에서 제땅말과 역사를 배웁니다. 작가가 쓰는 글은 자기만 읽는 일기가 아니며, 개인 자서전도 아니며, 공간의 숨결이 녹아 있는 ‘역사적 자서전’입니다. 문학관은 작가가 쓴 ‘역사적 자서전’을 펼쳐 놓는 공간입니다. 문학관 탐방이란 거대한 역사적 자서전을 체험하는 순례길이지요.

우리나라에는 웅숭깊은 문학관이 곳곳에 있어 행복하지요. 문학관 얘기를 쓰자면, 이 원고량으로는 턱도 없습니다. 그간 몇몇 문학관 이사나 운영위원으로 문학관 일에 참여해왔는데, 가끔 힘들지만 묘한 보람과 매혹이 있습니다.

이 땅의 말과 숨결 깃든 문학관
부여 신동엽 문학관 개관 10돌
프라하는 도시 전체가 ‘카프카’
‘독서문화진흥’ 예산 삭감 유감

올해 개관 10주년을 맞는 충남 부여의 신동엽문학관. [사진 신동엽문학관]

올해 개관 10주년을 맞는 충남 부여의 신동엽문학관. [사진 신동엽문학관]

1987년에 처음 갔던 부여 신동엽(사진) 시인의 생가에는 90세 언저리의 신연순옹이 살고 계셨어요. 아들의 시를 좋아한다며 찾아온 젊은이에게 신옹은 한 말씀 또 하고 몇 번을 반복하며 아들 이야기를 해주셨지요. 모기에 물리면서 꾸벅꾸벅 졸면서 옹의 말씀을 들었던 바로 그 시골집 자리에, 신동엽 문학관에 세워진 겁니다.

2003년 2월 19일 유족에게 그 생가를 기증받은 부여군은 2005년 대지 613평, 건평 120평의 문학관 건립을 추진합니다. 대지를 확보했지만 건축 설계도가 확정되기까지 시간이 걸렸어요. 8년이나 지나 건축가 승효상 선생의 설계도가 결정되고, 2013년 문학관이 세워집니다. 전시 물품을 선정하고 해설을 쓰고, 내부 세팅을 하고, 수장고에서 오래된 책을 넘기다가 목에 책먼지가 들어가 한 달 이상 약을 먹기도 했습니다. 혜화동 짚풀생활사박물관에 있던 시인의 유품을 문학평론가 김윤태 형과 트럭에 싣고 부여로 향했던 사늘했던 그 아침이 생각납니다.

이후 신동엽 문학관은 시인 김형수 관장의 기획으로 진중하면서도 기발한 이벤트가 이어졌습니다. 봄에는 전국 고교 백일장, 여름에는 전국 교사들이 함께하는 신동엽 부여문학기행, 낙엽이 지면 가을문학제, 겨울이 오면 송년음악회도 갖습니다. 문학관에 이르는 골목길에 검박하면서도 세련된 방식으로 시가 전시돼 있고, 작은 신동엽 공원과 신동엽길 조성사업도 있었지요.

신동엽

신동엽

걱정스러운 것은 올해 ‘국민독서문화증진 지원’ 예산이 전액 삭감된 일입니다. 2022년 이 예산은 약 62억원, 2023년 예산은 약 59억원이었는데, 올해는 아예 삭감된 겁니다. 최근 한국의 만 19세 이상 성인의 연간 독서율은 47.5%, 성인 두 명 중 한 명은 1년 동안 한 권도 읽지 않는 상황이지요. 연간 독서량도 4.5권에 그쳐, OECD 국가 중 최하위권이랍니다. 책을 읽지 않으면 도서관도 문학관도 없는 돼지들의 『동물농장』이 된다고 경고한 작가가 있어요.

조지 오웰은 소설 『1984』에서 국민을 바보로 만들어 통치하는 전체주의 사회를 썼습니다. 주인공인 하급 당원 윈스턴 스미스는 일기를 썼다가 체포됩니다. 빅 브러더가 감시하는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공간에서 “1984년 4월 4일”에 일기를 썼다가 적발된 거죠. 조지 오웰은 고전을 읽기는커녕 일기도 쓰지 못하게 하는 우중사회(愚衆社會)를 경고합니다.

세계에 자랑하는 BTS의 많은 곡이 다양한 독서를 기반으로 나왔다는 사실, 한국의 K 컬처 영화들이 인권과 민주주의 자유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프라하는 도시 전체가 카프카 문학관이더군요. 프라하를 찾는 외국인들은 카프카 맵에 쓰여 있는 20여 군데 번호 따라 답사합니다. 카프카를 상징하는 동상, 카프카가 태어난 생가와 올드타운 광장, 그가 다닌 카를 대학교, 바츨라프 광장, 근무했던 노동자상해보험공사 대리석 건물, 단편 ‘시골의사’ ‘재칼과 아랍인’ 등을 썼던 황금소로 난쟁이집, 장편소설 『성』의 배경인 프라하 성, 단골 카페 루브르, 그가 안식한 새 유대인 묘지, 카프카 문학관 등 카프카의 힘은 그 많은 세계인을 끌어당기는 엄청난 국가 자원이지요.

문학관은 변두리에 떠도는 역사가 살아 숨 쉬도록 하는 허파 같은 공간이지요. 문학관에서 지식을 얻는 방문객들은 역사의 산소를 가득 품고 돌아가, 자신의 일터에서 긍지를 갖고 생기로운 일을 합니다.

특히 올해 10월 7일이 신동엽 문학관 개관 10주년이래요. 부여군에서 백제의 미학을 담은 글씨체인 ‘정림사지체’와 ‘신동엽손글씨체’와 그 컴퓨터 폰트를 10월 9일 한글날에 발표한답니다. 일본군이 평양을 폐허로 만들던 1894년 9월 12일 2차 기병을 했던 동학농민군을 생각하며 넉넉히 흐르는 금강 곁에서 신동엽의 서사시 『금강』도 읽어 보시고요.

이 가을에 사랑하는 가족과 문학관을 찾는 고즈넉한 행복을 누리셔요. 유명하지 않아 문학관이 없지만 어둠 속 샛별 같은 작가들의 간절한 글도 기억해주시고요. 감히 역사를 흔드는 모리배들의 수작에 흔들리지 않는 문학관은 제땅말의 숨을 지키는 ‘거대한 뿌리’(김수영)지요.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