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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시인 이근배|김립의 시신이 사는 영월 노루목·어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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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누가 이 나라의 산과 물을 다 보았는가. 누가 이 나라의 풀과 나무, 돌멩이와 붉은 흙에 살과 혼을 섞어 시로 구워냈는가. 누가 한 몸을 던져 시대를 꾸짖고 또 사랑했는가.
누가 이 땅의 진정한 민중시인인가.
여기서 우리는 김삿갓(김립)을 쳐들지 않을 수 없다.
하늘(시대)을 거부하는 뜻으로 삿갓을 쓰고 한 나라를 샅샅이 파헤쳐 시의 발자국을 남긴 김삿갓. 우리는 이 한 사람의 시인만으로 위대한 시의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었고 이한 사람의 시인만으로 동서고금의 이름난 시들과 맞설 수 있는 자랑스러움을 가지게 된다.

<잘못 알려진 모습>
어찌 김삿갓의 겉모습만 가지고 그의 무량한 시의 깊이를 헤아릴 수 있겠는가. 김삿갓의 시를 바로 읽지 않고 비웃고 헐뜯고 놀리기나 하는 떠돌이 시인으로 본다면, 그래서 세상에서 흔히 가리키듯 「방랑시인」으로 못박아 놓는다면 그것은 역사를 욕되게 하는 일이요, 스스로 우리를 낮추는 일이다.
세상에 알려진 그의 한 생애는 후세의 작가들에 의해 필요이상으로 과장·왜곡·희화화됨으로써 그가 마치 봉이 김선달이나 정수동 같이 어릿광대 같은 삶을 산 것처럼 되어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김삿갓은 당대의 큰선비들이 닦은 것만큼의 학문을 연마한 지성인이었고 타고난 문장가였고 세계사에 다시없는 음유시인이었다.
비록 이름과 신분을 숨졌더라도 그의 학덕과 시문은 가는 곳마다 내노라하는 학자들의 짝이 되기에 넉넉했고 그의 풍류도 거기에 어울리는 정도일 것이었다. 이제 우리는 허황한 상상력에 의해 날조된 그의 기행 따위에 흥미를 가질 필요가 없다. 그가 이 땅에 씨뿌리고 간 천의무봉, 종횡무진의 시들에서 흠뻑 정서를 익히고 그가 휘젓고 간 눈부신 시신의 옷깃을 바라보는 것으로 감사할 뿐이다.
그러면 이 나라의 한 시대를 꿈결처럼 살다간 시신 김삿갓의 발자취를 먼저 더듬어 보자. 영월읍에서 고씨동굴을 지나는 동쪽으로 30리쯤 가다가 마대산이 있는 남쪽으로 꺾어져 선락골 계곡을 따라 20리쯤 올라가면 거기 노루목을 만나게 된다. 어디 이런 계곡이 숨어 있었나 싶게 바위와 돌들이 맑은 물로 휘감기는 물길을 굽어보며 험한 산길을 돌아들면 갑자기 눈 안에 들어오는 큰 입석이 있다.
「시선 김삿갓 난고 병연선생 유적지」. 그가 자연을 사랑한 것을 상징이나 하듯 긴 돌을 다듬지도 않고 막바로 글자만 새겨 세운 것이 인상적이다. 바로 그 자리에서 올려다보면 낮은 산자락의 빈 밭에 붉은 무덤이 보인다. 용미(무덤 뒤에 에워 쌓는 것)도 없다. 망두석도 다듬지 않은 돌이고 상석 또한 개울가에 앉았던 빨랫돌을 옮겨다 놓은 듯 하다. 「시선 김병연지묘」만이 흔히 보는 비석의 모습을 갖췄을 뿐이다.
이 김삿갓의 무덤을 찾기까지는 박영국옹(74·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수흥5리)의 숱한 걸음이 있었다. 박영국옹이 무덤을 찾기 시작한 것은 이응수가 퍼낸『김립시집』(1941년·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전라도 동복에서 돌아가신 것을 익균씨가 강원도 영월군의 풍면태백산록에 모셨다」는 대목을 읽은 후부터었다. 이것은 대원군 시대 실력자였고 김삿갓과는 같은 문중이었던 김병기가「양백지간(태백산과 소백산의 사이)에 김삿갓의 묘가 있다」고 한 것과 맞아 떨어지는 것이었다.

<자유분방한 시풍>
1982년10월17일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시인, 김삿갓의 무덤(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노루목)을 찾게 되었고 이어 무덤에서 5리쯤 산을 넘어 같은 와석리 어둔마을에서 김삿갓이 살던 집을 찾을 수 있었다.
이대로 저대로 되어가는 대로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밥이면 밥 죽이면 죽 살 가는 이대로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르고 붙이는 저대로
손님접대는 집안 형편대로 장날 팔고 사기는 세월대로 만사 안되는 것은 내마음대로
그렇고 그런 세상 지나가는 대로
(차죽피죽화거죽 풍타지죽랑타지죽 반반죽죽생차죽 시시비비부피죽 빈객접대가세죽 시정매매세월죽 만사불여오심죽 연연연세과연죽)
이 시는 김삿갓의 시 세계를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한문자를 가지고 한시의 틀(칠언)에 맞추어 쓴 것이지만 알고 보면 한시의 법칙인 대구와 평측 등을 무시한 채 쓰고싶은 글자를 마음대로 쓰고있다.
거기다 뜻글자인 대죽자를 우리발음으로 대로 쓴 것은 그의 시품의 자유 분방함을 읽게 한다. 작법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이 시는 현실에 초연한 달관의 경지와 서민적 애환을 대변해주는 정서가 담겨있다는 데에서도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김삿갓 김병연은 조선조 말엽 쩡쩡 울리던 안동 김씨 가문에서 아버지 안근과 어머니 함평 이씨의 둘째아들로 태어난다. 순조7년 (1807년) 다섯 살 때 선천부사로 있던 할아버지 김익순이 홍경래 난을 만나 투항한 것이 대역죄로 몰려 그의 집안은 멸문의 길로 접어든다.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벼슬길에 나가기 위해 글을 읽었던 김삿갓은 스무살되던 해 영월읍 도호부의 백일장에 나갔다. 그때 과제가 공교롭게도 「가산군수 정시의 충절의 죽음을 논하고 김익순의 하늘에 사무치는 죄를 꾸짖으라(논 정가산 충절사 탄 김익순죄통우천)」이였다.
김삿갓은 붓을 들어 썼다. 그 철철 넘치는 필력은 산전초목도 털끝이 일어날 만큼 준엄하였다. 그 중 한 귀절을 보면 「한번 죽음은 오히려 가볍고 만번 죽어서 마땅하다(일사유경만사의)」고 일갈한다.

<시대의 아픔 풍자>
이를 계기로 그는 비로소 깊고 깊은 산골, 길이 다한 노루목에서도 산이 닫혀있는 어둠에 숨어사는 까닭을 어머니로부터 듣게된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과 좌절에서 그가 다시 일어섰을 때 그는 이미 벼슬길을 바라보고 글을 읽는 많고 많은 선비중의 하나가 아니었다. 그의 몸뚱이는 불이 되어 있었다. 바람으로도 강물로도 끌 수 없는 불길이 되어 타오르고 있었다.
그의 몸엔 불 칼을 든 시신이 들어와 있었다. 마침내 일어섰다. 일그러지고 찢겨진 시대의 어둠을 향해 그는 칼을 휘둘렀다. 풍자로 시대를 베었다. 해학으로 시대를 베었다. 역설로 시대를 베었다. 분노로 시대를 베었다. 그리고 더 뜨거운 사랑으로 감성으로 정신으로 온몸으로 시대를 꿰매고 민중의 아픔을 달래주었다.
이응수가 「민중시인」으로 이름지은 것은 50년전 일이다. 그는 통속·인생·생활·걸인·빈궁·방랑·풍류·초탈·강개·파격·언문·과(과거)·역사·대문장가 등으로 분류하며 김삿갓의 시 세계와 시정신을 설파하고 있다. 통속·걸인·빈궁 등의 어휘선택에 문제가 있어 보이나 그렇게 라도. 김삿갓 시의 비늘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열성은 이해가 간다.
「사면기둥 붉었다/석양행객 시장타/네절인심 고약타」의 한글 시와 한문혼용의 「청송은 듬성담성입이요/인간은 여기저기유라/소위언뜩 삣뚝객이/평생쓰나다나 주라」같은 새로운 시 형식을 만들어 쓴 것도 김삿갓이기에 더 어울린다.

<잃어버린 시 많아>
온 나라를 발 안 닿은 곳이 없고 금강산만 해도 계절 따라 오르내렸다는 김삿갓, 「소나무와 소나무 잣나무와 잣나무 바위와 바위를 돌아드니 물과 물산과 산 곳곳이 빼어났구나(송송백백암암회수수산산처처기)」이렇게 금강산을 노래하기도 했다.
전하는 금강산 시만도 여러편이고 보면 잃어버린 시들이 또 얼마랴. 금강산시 뿐이랴, 누구하나 거둬줄 이 없이 흩뿌리고 간 뒤 1백년이 되어 거둔 것만 3백62편이라면 그가 쓴 시는 수천을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그의 시 소재는 자연·사람·동물·사회상에서부터 다루지 않은 것이 없고 글자를 쪼개고 붙이고 비틀고 뒤 짚고, 형식을 바꾸고 부수고 새로 만들고…, 그의 손끝에 닿기만 하면 시가 안 되는 것이 없고 시가 되었다하면 번개를 치듯 사람의 가슴을 가르고 나간다.
단종의 한이 서린 청냉포와는 반대편에 있는 노루목과 어둔, 그가 57세(1863년)로 돌아와 누운 자리 아직 떼도 뿌리내리지 않은 붉은 무덤과 옛 집터를 돌아보고 신선(김삿갓)이 내러왔다는 선락골을 내려오니 날이 어둡다. 오늘밤에는 뉘 집에서 잔다!<사진=주기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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