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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잃어버린 세대' 영화를 보면 역사가 보인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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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7호 27면

오동진의 시네마 역사 

1920년대 ‘잃어버린 세대’ 영화

1920년대 ‘잃어버린 세대’ 영화

1920년대가 문제다. 아니다. 화제다. 이 당시의 역사가 강한 토픽이 되는 요즘이다. 홍범도 장군에 대한 역사적 해석 때문이다. 봉오동 전투와 그 이후 행적에 대해 때아닌 논란이 불붙었다. 영화 ‘오펜하이머’때문이기도 하다. 영화 ‘오펜하이머’는 한편으로 오펜하이머가 공산주의자였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다룬 내용이었던 탓에 공산주의의 실체와 본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도 했다. 젊은 세대들 대다수가 알지 못하는 볼셰비키·멘셰비키 얘기까지 나왔다. 이러다가 트로츠키·로자 룩셈부르크까지 등장할 판이다. 1920년대 사람들은 누구일까. 어떤 생각들을 하고 살았을까. 그 모든 것은 다 영화에 실려 있다.

1920년대를 관통했던 사람 중 대표적인 인물은 어니스트 헤밍웨이다. 그를 두고 대문호라는 칭호를 붙인다. 『무기여 잘 있거라』에서 『킬리만자로의 눈』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작품들로 어마어마한 세계적 부와 명성을 얻었지만 일생은 지나친 음주와 여성 편력으로 얼룩졌고, 결국 엽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 어두운 영혼이었다. 헤밍웨이가 성격이 불 같고 질투심도 남다르며 마초적인 인물이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영화가 하나 있다. 우디 앨런이 2012년에 만든 희대의 코미디이자 뛰어난 상상력의 이야기 ‘미드나잇 인 파리’다.

‘봉오동 전투’ 2018년 영화로 만들어

우디 앨런 자신을 투영시킨 영화 속 주인공 길(오웬 윌슨)은 할리우드의 시나리오 작가다. 그는 약혼녀(레이첼 맥 아담스)와 함께 파리로 여행을 오지만 이상한 성격 탓에(생각이 너무 많고 이를 매사에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얘기를 해야 하는 우디 앨런 자신처럼) 그녀와 그녀의 부모와 잘 어울리지 못한다. 울적한 마음에 파리의 밤 거리를 걷던 그는 이상한 종소리와 함께 나타난 차를 얻어 타게 되는데, 차를 내리니 자신이 1920년대에 와 있음을 알게 된다. 파티에 초대된 그는 그곳에서 피카소의 뮤즈인 애드리아나(마리옹 꼬띠아르)를 만나 마음을 뺏긴다. 파티장에는 화가 피카소(마르샬 디 폰조 보) 뿐만이 아니라 F. 스콧 핏츠제럴드와 젤다 핏츠제럴드 작가 부부(톰 히들스톤과 알리슨 필), 화가 살바도르 달리(애드리언 브로디), 예술계 큰손이자 자신도 작가였던 거트루드 스타인(케시 베이츠)과 영화감독 루이스 부뉘엘(아드리앙 드 방), 그리고 시인 T.S. 엘리엇(데이빗 로우)과 헤밍웨이(코리 스톨) 등 예술가들이 넘쳐 난다.

주인공 길이 타임 슬립으로 넘어간 시공간은 다다이즘(1차 대전이후 나타난 허무주의와 무정부주의적 분위기의 사조)에 영향을 받은 작가, 예술가들이 마치 다시 한번 벨 에포크 시대(1815년~1914년까지 유럽 100년간의 태평성대. 화려한 파티와 예술이 꽃피웠던 시절이다)를 재현하려는 때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로스트 제너레이션들, 곧 전쟁의 참혹함을 목격했던 소설가·화가·시인·영화감독은 거트루드 스타인이 주선한 파티에 모여 현실의 많은 것을 잊으려 했던 것처럼 보인다. 우디 앨런의 눈에는 이 시대야 말로 예술이 꽃을 피웠던 때다.

예술은 어쩌면 파괴와 재앙을 먹고 자란다. 예술가들은 비극 속에서 심오해진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주인공 남자 길, 곧 영화 밖 우디 앨런은 불안하고 어렵지만 예술혼이 넘쳐났던 바로 그 시대를 동경한다. 지금의 세상은 편리하고 풍족해졌지만 예술은 점점 빛을 바라고 있다고 주인공과 우디 앨런은 생각한다. 세상과 예술의 발전은 반비례하고 상충한다. 시대를 논하거나 예술을 평가하는 것은 그래서, ‘절대적으로 절대적일 수’ 없다. 그 기이한 간극(비극 속 예술의 심오함과 평화 속 예술이 만들어 내는 저급함의 사이, 예술과 대중문화의 사이, 예술영화와 상업영화의 사이)이 주는 상대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사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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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니스트 헤밍웨이가 1920년대에 쓴 걸작 소설 두 편은 『해는 또 다시 뜬다』와 그 유명한 『무기여 잘 있거라』다. 둘 다 영화로 만들어졌지만 둘 다 지금은 쉽게 보기 어려운 영화이다. 특히 전자는 아예 기억 속에서 사라질 판이다. 영화 ‘해는 또 다시 뜬다’는 노년 세대라면 반드시 기억하는 미남 배우 타이론 파워와 에바 가드너가 나오는 작품이다. 1차 대전에서 살아 돌아온 주인공 제이크는 불행하게도 성불구가 된 상태다. 파리에서 살아 가는 그는 브렛이라는 여인을 사랑하지만 그녀가 다른 남자들의 품을 전전하는 것을 쓸쓸하게 바라만 봐야 한다. 제이크와 브렛, 그녀의 남자들은 스페인 팜플로나로 투우 경기를 보러 가고 거기서 여자는 또 19살 투우사 로메로(로버트 에반스)에게 빠져든다. 제이크는 혼자 파리로 돌아 오지만 곧 로메로와 헤어진 후 자신을 데리러 오라는 여자를 위해 다시 스페인으로 향한다. 둘은 정신적 사랑을 위해 길을 나선다. 맞다. 태양은 또 다시 떠오르는 법이다.

두 영화 모두 공교롭게도 1957년에 만들어졌다. 2차 대전이라는 또 다른 참혹한 전쟁에 대한 기억, 그리고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의 전조가 1차 대전이라는 ‘원조 대전’을 소환시킨 셈이다. 영화 ‘무기여 잘 있거라’에는 록 허드슨과 제니퍼 존스가 출연해 열연을 펼쳤다. 이탈리아 전선에서 부상을 당한 헨리(소설에서는 구급차 운전병, 영화에서는 군위관 중위)와 간호사 캐서린의 비극적인 러브 스토리이다. 전쟁의 모든 참화를 뚫고 스위스로 탈영한 두 연인은 평화롭고 행복한 둘만의 인생을 꿈꾼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의 아이를 낳다가 죽는다. 아이도 죽는다. 이때의 헤밍웨이에게는 해가 또 다시 떠오르지 않았던 셈이다. 두 영화 모두 지금 쉽게 보기는 어려운 작품이다. 1920년대의 헤밍웨이, 로스트 제너레이션을 대표했던 그의 마음을 헤아려 볼 뿐이다.

1920년대를 가장 영화적으로 표현해 낸 영화는 사실 진 켈리 주연의 ‘사랑은 비를 타고’다. 1927년에 나왔던 세계 최초의 유성 영화 ‘재즈 싱어’에 대한 이야기다. 뮤지컬 배우 돈(진 켈리)과 리나(진 헤이건)는 ‘재즈 싱어’에 자극받아 자신들도 유성 영화를 만들려고 하지만 그동안 감춰져 있던 리나의 허스키한 목소리와 지독한 사투리가 문제가 된다. 결국 영화사는 리나의 목소리 대역으로 캐시를 캐스팅하고 돈은 곧 캐시와 사랑에 빠진다. 최근에 나왔던 데미언 셔젤 감독 브래드 피트, 마고 로비 주연의 ‘바빌론’은 바로 이 ‘사랑은 비를 타고’를 만드는 얘기를 그린 것을 넘어 이를 비극의 아수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던 작품이다. ‘재즈 싱어’에서 ‘사랑은 비를 타고’로, 다시 ‘바빌론’으로 영화는 시간을 타고 넘나든다. 그 시대의 흐름과 역사를 관통하는 시선을 얻으면 영화가 아주 잘 보인다. 반대로 영화를 잘 들여다 보면 역사의 줄기가 보인다.

일 서구화 ‘소레카라’서 엿볼수 있어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그렇다면 1920년대의 일본은 어땠을까. 일본 영화에서는 그 시대를 어떻게 투영시키고 있을까. 1920년대의 일본은 문학으로 볼 때 나쓰메 소세키의 1910년작 『소레카라』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1937년작 『설국』이 지나가던 시기였다. 두 작품 모두 영화로 나와 있고, 특히 ‘소레카라’는 현대 감독인 모리타 요시미츠가 1985년에 만든 버전이 유명하다. 닿을 듯 닿을 듯 닿지 못하는 일본 특유의 정적인 러브 스토리가 심금을 울리는 내용이다. 유부녀 미치요(후지타니 미와코)를 사랑하는 부잣집 도련님 다이스케(마츠다 유사쿠)의 순애보가 애처롭다. 미치요 역시 남편 하라오카(코바야시 카오루)보다 그의 친구인 다이스케를 욕망하지만 기회가 있음에도 자신을 안지 못하는 남자를 두고 몰래 한숨을 쉰다. 그 ‘한숨의 컷’ 장면이 일품이다. 1910년대의 일본이 얼마나 서구화됐는지 한편으로는 놀랍고 한편으로는 그 모방의 민족성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나쓰메 소세키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길목엔 우리의 화가 이중섭이 있었다. 이중섭이 유학했던 도쿄문화학원에서는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문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중섭은 그때부터 소를 그렸는데 이중섭의 화풍은 피카소의 비구상적 터치에 살바도르 달리의 초현실주의적 상상력이 더해진 느낌이었다. 이중섭의 일생은 한번도 영화로 만들어진 적이 없다. 배창호 감독이 오래 전부터 준비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0년 두만강 위쪽 중국 지린성 부근 봉오동에서는 대한제국의 독립군과 일본 만주군 사이의 대전투가 벌어진다. 이 얘기는 2018년 원신연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졌다. ‘봉오동 전투’다. 홍범도 장군 역은 최민식이 맡았다. 최동훈 감독의 2015년작 ‘암살’에서 저격수인 주인공 안옥윤을 돕는 인물인 속사포(조진웅)는 1920년대에 운영된 지린성의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다.

1920년대는 누구에게나 격렬하고 뜨거웠던 시대였다. 몸살과 진통의 시기였다. 누구도 비극적 사건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지성의 비관주의를 의지의 낙관주의로 뚫고 가려 한 때이기도 했다. 2023년 현재는 묘하게도 100년 전의 시대상황과 맞물리는 면이 있다. 지금 우리에게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누구인가. 해는 또 다시 떠오를 것인가. 무기에게 영영 이별을 고할 수 있겠는가. 사랑은 종종 비를 타고 오는 법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ohdjin11@naver.com 연합뉴스·YTN에서 기자 생활을 했고  이후 영화주간지 ‘FILM2.0’ 창간, ‘씨네버스’ 편집장을 역임했다.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컨텐츠필름마켓 위원장을 지냈다. 『사랑은 혁명처럼 혁명은 영화처럼』 등 평론서와  에세이 『영화, 그곳에 가고 싶다』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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