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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운것 안 먹으면 혁명 말 못해" 마오가 즐긴 마라맛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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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7호 24면

[왕사부의 중식만담]  화끈한 쓰촨요리

마파두부. 마파(麻婆)는 곰보할머니를 뜻한다. 한국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쓰촨요리 중 하나다. 안충기 기자

마파두부. 마파(麻婆)는 곰보할머니를 뜻한다. 한국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쓰촨요리 중 하나다. 안충기 기자

젊은 시절 가끔 청와대로 요리 출장을 나갔다. 플라자호텔 중식당 ‘도원’에서 칼판장으로 일할 때였다. 특급 보안공간이니 신원조회가 엄격하고 제약이 많았다. 조리 중에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안 된다. 겨자처럼 자극성 강한 향신료도 금물이다. 요리들은 대체로 맛이 순했다. 쓰촨요리(川菜·四川菜系)처럼 양념 센 음식은 식탁에 오르기 힘든 시절이었다.

중국 서남부에 있는 쓰촨(四川)은 화끈한 고장이다. 3차원 지도를 보면 지형부터 묘하다. 남한의 1.5배가 넘는 땅이 망치로 한 방 맞은 듯 움푹 들어가 있다. 먼 옛날엔 파촉(巴蜀)이라 불렀다. 서쪽에 청두(成都), 동쪽에 충칭(重慶)이 있다. 신기하게도 쓰촨분지로 흘러드는 강은 많은데 나가는 물길은 장강(長江) 단 하나다. 고원과 산맥들이 사방을 호위하고 있으니, 중세까지 사천 가는 길은 벼랑에 놓인 잔도(棧道)나 장강을 통한 뱃길뿐이었다. 게다가 뱃길은 물살 험한 협곡 구간이다. 그래서 이백은 촉도지난 난어상청천(蜀道之難 難於上靑天·촉으로 가는 길은 하늘 오르는 것보다 힘들다)이라 하고, 제갈량은 옥야천리 천부지토(沃野千里 天府之土·기름진 땅이 천 리니 하늘이 내린 땅)라 했다. 여기서 촉한 유비와 한고조 유방이 힘을 비축하며 중원을 노린 이유다. 곡절도 많아 명나라 말 장헌충의 난 때는 무차별 살육으로 일대가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청나라 말부터는 전란을 피해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충칭은 중일전쟁 때 국민당정부 임시수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던 도시다. 다양한 문화가 녹아든 덕에 음식 스펙트럼은 넓고 두터워졌다.

세 가지를 알면 쓰촨요리가 보인다. 첫째, 마랄(麻辣)이다. 마(麻)는 화자오(花椒·산초)의 산쇼올이 내는 얼얼한 맛, 랄(辣)은 라자오(辣椒·고추)의 캡사이신이 내는 매운맛이다. 이 둘이 만났으니 생각만 해도 진땀이 난다. 덥고 습한 지역이라 자극 강한 향신료는 음식 보관에 효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중남미가 원산지로 알려진 고추를 이 지역에서는 1800년대 중반에 심기 시작했단다. 기록이 맞다면 쓰촨요리가 지금과 같은 맛을 갖춘 시기는 150여 년 남짓이다. 주변의 구이저우(貴州)·윈난(雲南)·후난(湖南)요리도 쓰촨 못잖게 강렬하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nam.miga@joongang.co.kr

그래픽=남미가 기자 nam.miga@joongang.co.kr

우연이겠지만 매운 고장에서 사회주의 중국을 건설한 혁명가들이 많이 나왔다. 마오쩌둥·펑더화이·류사오치·후야오방·주룽지 등은 후난 출신이고, 덩샤오핑·주더·천이·양상쿤 등은 쓰촨 사람이다. 마오쩌둥은 ‘매운 것을 먹지 않는 사람은 혁명을 말할 수 없다(不吃辣的東西的人 不能講對革命)’는 말을 남겼다.

둘째, 쯔궁(自貢) 소금이다. 직선거리로 바다에서 1500㎞가 넘는 데서 웬 소금이냐고 하겠지만 쓰촨은 중국 성별 소금생산량 3위다. 고생대에 일대가 바다였기 때문이다. 히말라야 조산운동으로 육지가 되며 지하에 갇힌 어마어마한 바닷물이 그 원천이다. 지난 2000여 년 동안 일대에 뚫은 염정이 1만3000여 개이고 그 중엔 깊이 1000m가 넘는 구멍도 있다. 퍼 올린 짠물을 끓여 만드는 정염(井鹽)은 바닷소금보다 짠맛이 깊고 알갱이가 곱다. 중국이 김치 원조라고 주장하는 채소절임 파오차이(泡菜)도 정염이 있어 가능했다.

셋째는 ‘쓰촨요리의 영혼’ 랄두반장(辣豆瓣醬)이다. 콩·고추·소금이 어울려 탄생한 이 양념은 갖가지 요리에 두루 쓰인다.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청두 피현(郫縣)두반장 제조법은 국가급 무형문화유산이다. 대만 브랜드 하하(哈哈)의 명성도 못잖다.

마라탕(麻辣燙)과 훠궈(火鍋)는 화끈한 맛을 대표한다. 훠궈는 끓는 육수에 고기·내장·해물·채소·면 등 온갖 재료를 익혀 먹는 요리다. 장강 일대를 오가는 뱃사공들이 원조라는 설, 부두 근처 식당에서 자투리 식재료를 모아 끓여 팔았다는 설, 도축장 인근에서 고기 부산물을 모아 끓여 먹다가 퍼졌다는 설이 있다. 그릇을 홍탕과 백탕 두 칸으로 나눈 원앙(鴛鴦)훠궈가 흔하다.

널리 알려진 요리로 ▶마파두부(麻婆豆腐) ▶궁보계정(宮保雞丁·깍둑썰기한 닭볶음) ▶랄자계(辣子鷄·매운 닭튀김) ▶회과육(回鍋肉·삶은 돼지고기볶음) ▶어향육사(魚香肉絲·채썬 돼지고기볶음) ▶부부폐편(夫婦肺片·소내장 요리) ▶수자어(水煮魚·민물고기 매운탕) ▶구수계(口水鷄·닭 냉채) ▶삼선과파(三鮮鍋巴·누룽지탕) 등이 있다. 새우요리 건소명하(乾燒明蝦)의 본고장이기도 하다. 바다새우만큼 큰 민물새우가 나는 덕이다. 담담면(擔擔麵)은 갖가지 고명을 얹은 비빔국수다. 담(擔)은 메다는 뜻으로, 긴 나무막대 양 끝에 국수와 양념 그릇을 달고 어깨에 메고 다니며 팔아 이런 이름이 붙었다.

내가 요리를 배울 때는 쓰촨요리가 드물었다. 구화교 대부분이 산둥 출신이라 쓰촨에서 온 사부가 없었다. 인터넷·유튜브도 생기기 전이니 배우고 싶어도 배울 데가 없었다. 내 기억으로 쓰촨요리가 한국에 처음 명함을 내민 시기는 1970년 무렵이다. 그 뒤 서울 동부이촌동 리버뷰 맨션에서 문 연 ‘홍보석’이 불을 지폈다. 쓰촨 요리사를 초빙했다고 ‘선데이서울’에 광고도 했다. 본토에 갈 수 없던 냉전 시기였으니 홍콩에서 데려왔을 테다. 어쨌거나 재벌가와 연예인들이 드나들며 장안의 명소가 됐다. 쓰촨요리 인기가 높아지자 짝퉁 메뉴를 내놓는 가게도 생겼다. 해삼에 화자오·후추·고추를 넣고 고추기름에 맵게 볶아서 쓰촨식이라고 했다. 내륙 한복판에서 온 해삼요리라니. 현지에 가본 사람이 드무니 그렇게 뻥 쳐도 의심하는 손님이 없었다.

지금 한국에서 유행하는 훠궈·마라탕·마라상궈 또한 당시에는 없었다. 이들은 1992년 한중수교 뒤 신화교들이 가지고 들어왔다. 동북까지 퍼진 쓰촨요리가 우회 진입한 셈이다. 당연히 원조 요리와는 맛과 형태에 차이가 있다.

※정리: 안충기 기자

왕육성 중식당 ‘진진’ 셰프. 화교 2세로 50년 업력을 가진 중식 백전노장. 인생 1막을 마치고 소일 삼아 낸 서울 서교동의 작은 중식당 ‘진진’이 2016년 미쉐린 가이드 별을 받으며 인생 2막이 다시 바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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